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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용오름-영웅의 기준
작가 : 대홍수2
작품등록일 : 2018.12.6

슈퍼히어로 '용오름'이자 대학생인 정일은 여러 범죄를 해결하던 중 잠깐의 휴식을 가지며 친구들과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이 정일을 갉아먹기 시작하는데...... 대홍수의 슈퍼히어로 시리즈 <증인들>의 첫 번째 이야기!

 
6화
작성일 : 18-12-23 16:53     조회 : 216     추천 : 0     분량 : 16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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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슈퍼히어로 불가살이는 활동용이 아닌 인터뷰용으로 제작된 코스튬에 붙은 넥타이를 정리했다. 전설 속에 나오는 불가사리의 특성인 코끼리나 곰 보다는 불가살이 제과의 귀엽지만 위엄이 있는 사자 같은 느낌의 마스코트를 더 닮은 가면을 쓴 불가살이는 헛기침을 하고 몇 차례 목을 가다듬었다. 평소에도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불가살이였지만 이번 인터뷰는 조금 특별했다.

 “슈퍼히어로의 죽음은 모든 슈퍼히어로를 향한 도전입니다. 저, 불가살이는 전국의 모든 슈퍼히어로를 대표해서 MH라이트닝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에게 법의 철퇴를 안겨줄 것을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 이름을 건다는 말. 나중에 실패하면 불가살이 제과에서 광고모델이 본사의 이미지 하락에 책임을 묻지 않을까요?”

 “시끄럽다.”

 거울 속 불가살이의 형상이 일그러지더니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30대의 곰 같은 덩치를 한 불가살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보다 두 뼘은 모자라 보이는 키 때문에 어린이로 보이기도 했지만, 거울에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불가살이는 상대가 옆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다른 슈퍼히어로, 니토크리스라는 것을 알아보았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니토크리스가 불가살이의 뒤를 가리켰다.

 “거기, 그 쌀과자 좀 줄래요? 부럽다, 나도 제과점에 들어갈 걸.”

 불가살이가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는 쌀과자를 집어 니토크리스를 향해 던졌다. 거울에 부딪쳐 과자나 거울 중 하나가 깨지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니토크리스는 거울 밖으로 손을 뻗어 과자를 움켜쥐었다.

 “merci!”

 “한국어로 해라.”

 “duc? waki bun du quinx ziz!”

 “너, 존재하지도 않는 문장 지어내고 있지?”

 열심히 문장을 짜내던 니토크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과자를 뜯었다. 입과 눈 부분이 없어 표정이 보이는 불가살이와는 달리 얼굴이 완전히 가려져 있어 알 수 없지만 가면을 벗기면 불가살이가 상상하는 그 표정이 있을 것 같았다. 니토크리스가 가면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입 부분만 드러나게 당겼다. 삐죽거리는 입술이 과자를 물고 다시 가면 안으로 숨었다.

 “아무튼 이번에 협찬히어로와 진짜 슈퍼히어로 사이에 구분이 생길 것 같지 않아요? 하릅이는 저랑 같은 대기실이고, 옆옆 대기실에는 다빛 누님이랑 온새미로도 와 있던데요.”

 “다빛이?”

 불가살이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니토크리스가 불가살이의 동요를 못 본 척 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요. 이따가 들을 거긴 한데 아무래도 미리 알면 좋잖아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불가살이는 거울이 있는 곳은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니토크리스의 능력에 도움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나쁜 소식만을 들려주는 사람은 그 내용이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짜증을 부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MH라이트닝이 같은 슈퍼히어로라는 대목 말인데요. 일단 아저씨가 우리 대표로 말하는 거니 제 의견을 말하자면 그 부분에서 선을 조금 그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마 MH라이트닝은 동글이한테 범죄 조작을 사주했다가 둘 다 잡혀 죽은 모양이거든요.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으로서 같은 취급 받는 건 불쾌해요.”

 “이건 내 선언이야. 일단 참고는 할 테니 더 할 말 없으면 가봐.”

 “네, 네. 알겠습니다.”

 니토크리스가 말했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마지막에는 아무런 추임새가 없어 표정을 알 수 없는 가면이 불가살이의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을 보는 듯 해 미끌미끌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니토크리스가 추락하든 거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불가살이의 얼굴이 거울에 등장했다.

 “떳떳하고 당당하다? 남의 개인사에 침범하는 불쾌한 놈.”

 불가살이가 자신의 턱을 주무르며 표정을 진정시키려다가 관뒀다. 다소 화가 나 있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불가살이 씨. 15분 뒤 인터뷰 시작입니다.”

 스태프 중 하나로 보이는 사람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불가살이가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하릅과 니토크리스는 이미 밖에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어린 강아지 같은 코스튬의 하릅이 불가살이를 보고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니토크리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불가살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불가살이 역시 훌륭한 포커페이스로 손을 잡아 주었다. 하지만 여성 대기실에서 온새미로와 함께 나오는 다빛이 나오자 불가살이는 자신도 니토크리스처럼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빛은 불가살이를 보고도 별 동요 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진짜인가. 함께 한 시간이 몇 년인데 겨우 실수 한 번. 아니, 두 번에 이렇게 무시하는 거야? 내가 누구를 위해 한 일인데. 아니, 어쩌면 태연한 게 아닐지도 몰라. 저 가면 안에서는 어쩌면‥‥‥.’ 불가살이가 표정을 풀지 않자 니토크리스가 손뼉을 쳤다.

 “자, 자! 우리 정의를 집행하러 갑시다!”

 모두에게 통하는 말이지만 불가살이를 향한 말에 정신을 차린 불가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히어로에게 범죄와 싸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수많은 카메라와 시청자들 앞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말실수 하지 않고,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고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되 거짓말을 하지 않고, 혹시 하게 되면 은퇴할 때 까지 들키지 않기를 시행할 차례였다.

 

 

 *****

 

 

 정석은 그 날 이후로 언제나 가방에 용오름 가면을 챙겨 두었다. 개학하는 날 학교에서 우연히 열려있는 정석의 가방을 보았다가 그 가면을 본 시아는 기절할 뻔 했다. 하지만 정석은 당당했다.

 “대전은 용오름이 지키는 거야!”

 “맞아, 용오름이 지켜야지 저작권이 뭔지도 모르는 표절 고딩이 지키면 안 되지.”

 “표절도 표절 나름이지.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 못 봤어? 거의 시뮬라크르의 경지라고.”

 “그리고 슈퍼빌런 나오면 염력은 어떻게 쓰려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주먹질?”

 정석이 빠르지만 그 정도로 빠르지는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주먹에 맞으면 맞는 부위가 터져 나갈 것이다. 시아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평생의 트라우마(피해자에게는 그 시간이 매우 짧겠지만)를 안겨줄 아이디어에 탄식했다.

 “농담이지?”

 “안 되겠지?”

 “안 돼. 진짜 안 돼. 절대 안 돼. 위험해? 진짜 위험한 거 알지?”

 정석이 책상에 턱을 대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아가 정석의 등을 두드렸다.

 “대신 이따가 불가살이 보러 갈래?”

 “불가살이? 불가살이가 여기로 온대?”

 이틀 전 불가살이를 포함한 다섯 슈퍼히어로가 대전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개학이 코앞이라는 이유로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정석도 이제 고3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개학하는 첫날에 야간자습이 없다는 것은 구속의 마지막 날 만큼은 휴식을 보장해 주겠다는 일말의 인간적인 양심이리라. 학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정석과 시아 둘이 동의했으니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소수의견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정석이 바람이 일 정도로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협찬히어로도 협찬히어로 나름이지 불가살이처럼 아이돌이 아닌 영웅도 있었다. 정석은 불가살이가 위험이 난무하는 1년 전의 토이맨 백화점에서의 테러 사건에 맨몸으로 뛰어 들어가 테러범들을 모두 진압한 사건을 기억했다. 결국 테러범들의 실수로 폭탄이 터져 테러범들이 모두 사망했고, 건물도 무너졌지만 불가살이가 아니었다면 몇 배나 되는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었다.

 “볼 수 있어? 당연히 가야지! 당장 가자!”

 “수업 끝나고 나서. 바로 나가서 사인을 받는 거야. 대신 가면은 이제 집에 보관하고.”

 “아‥‥‥.”

 정석이 다시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네가 가서 찾는다는 생각 하지 마. 불가살이는 용오름을 싫어하는 거 알지? 가면 쓰고 뛰어다니는 거 아니면 내가 무조건 너보다 먼저 찾을 수 있어.”

 “그래, 알겠어. 대신 불가살이 뿐 아니라 니토크리스, 하릅, 다빛, 온새미로 각각 다 한 장씩 사진 찍을 수 있게 해주면.”

 “니토크리스는 조금 힘들 텐데. 아니, 근데 내가 왜 너랑 거래를 해야 되냐? 네가 위험한 문제잖아. 내가 네 엄마도 아니고 너 몸에 좋은 브로콜리 먹이는데 네 용돈을 늘려준다는 이야기를 해야 돼?”

 “쳇, 안 넘어가네. 알겠어.”

 정석이 결국 포기의 뜻으로 양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리고 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덧붙였다.

 “고마워, 아무튼 날 신경 쓰는 게 너밖에 없네.”

 “네 가족들도 나 이상으로 널 신경 써줄 거다. 친구니까 조금 더 당연하지 않게 여겨져서 고맙게 느껴지는 거지. 부모님께 더 감사하렴?”

 “와, 내 감동 돌려줘.”

 정석이 시큰둥한 시아의 답변에 상처받은 척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상처가 있기는 했다. 정석은 며칠 전 처음으로 용오름 가면을 쓰고 날아오른 날 있었던 가족 간의 불화를 떠올리고 불편함을 느꼈다. 정석이 불편을 떨쳐내며 화재를 되돌렸다.

 “아무튼 이따가 바로 불가살이 보러 가는 거다? 약속했어?”

 “그래. 그런 덩치만 큰 방탄 사나이가 뭐가 멋지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네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시간낭비가 뭐 그리 대수겠니.”

 “크으, 감동. 나 지금 울면 되니?”

 “저기 구석에서 울어라. 안 보이게.”

 “아 내 감동 가져가지 말라고!”

 정석이 다시 한 번 투덜거렸다.

 

 

 *****

 

 

 정일은 냉장고를 열었다. 오렌지주스? 아니면 커피?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 더위가 완전히 가시기 전이니 상큼한 주스가 더 나을 것 같았다. 찬장에 손을 넣고 엄마가 경찰과 심리치료사가 오면 먹고 싶은 만큼 꺼내 내오라고 사둔 다과를 보지 않고 랜덤으로 한 움큼 꺼낸 정일은 쟁반에 종류별로 정리했다. 약과 넷에 한과 다섯. 정일은 한과를 하나 더 집어서 수를 맞추었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경찰 혼자 왔으니 이정도면 충분하겠다 생각한 정일은 거실로 나왔다. 자신을 김영화라 소개한 낯선 얼굴의 여자가 거실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다가 정일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비해 큰 안경이 눈에 띄는, 그동안 찾아온 경찰에 비하면 어리다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젊은 모습에 정일은 의아했지만 보기보다 유능해서 일찍 승진한 사람이거나 정일 자신이 이제 단물이 빠져 아무나 갖다 붙인 것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자면 다를 것 없고, 후자면 좋다고 생각하며 정일은 쟁반을 들어주려는 영화의 손을 살짝 빼고 책상에 다과를 올려놓았다.“아니, 뭘 이렇게 많이…….”

 “제가 산 것도 아닌데요.”

 정일이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반복한 대사를 또 읊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나요?”

 “회사 갔죠. 어차피 이제 거의 괜찮아요.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요.”

 “정일 씨가 괜찮다면 다행이네요. 학교는 휴학했다고 들었는데 맞죠? 아, 잠깐만요. 이걸 좀 꺼내야겠네.”

 영화가 가방에서 타블릿pc를 꺼냈다. 정일과 관련된 파일을 찾은 영화가 말했다.

 “자, 최정일 씨. 나이는 1997년이면 16학번이죠?”

 “15학번이요. 생일이 2월이라. 그건 따로 어디 메모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매주 틀리는 것 같은데.”

 “아, 그래요? 그럼 그건 수정하겠습니다. 자, 보시면 여기 옆에 메모해놨어요. 됐죠?”

 영화가 태블릿을 돌려 정일에게 보여 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주소는 여기 맞고, 정신과 진료는 받지 않겠다고 했네요. 맞나요?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말하고 싶지 않아서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요?”

 “네.”

 “하지만 정일 씨의 친구의 가족들은 친구들이 걱정되지 않을까요?”

 정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일은 자신이 범죄자도, 용의자도 아니기에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불이익을 줄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저 어리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젊은 경찰도 금방 포기하고 작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영화가 침묵의 여유를 이용해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정일이 말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거짓말을 해야 돼요.”

 “그래요? 하는 수 없네요. 오늘은 선생님도 없이 저 혼자 왔으니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요? 밖에는 나가나요?”

 “아직 집에 돌아온 뒤로 밖은 한 번도 안 나가봤어요.”

 “아직 밖에 나가는 게 무서운가요?”

 “아뇨, 휴학하고 나니 나갈 일이 없어서요.”

 정일은 거짓말했다.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엘리베이터가 보이는 계단식 아파트 대신 친구들의 시체가 썩고 있는 흑혈도의 모습이 나타날까 두려웠다. 영화는 곧바로 거짓말을 잡아냈다.

 “그러면 우리 밖에 나가서 이야기할래요? 요즘은 날씨가 많이 풀려서 선선하고 좋아요.”

 “굳이요?”

 “싫으면 하는 수 없죠.”

 영화는 곧바로 포기했다. 그것만으로 정일은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을 깨달았다. 기분이 찝찝했다.

 “아, 혹시 슈퍼히어로 좋아해요?”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러면 경찰은 싫어하겠네요?”

 “싫어할 이유가 없죠. 경찰은 돈을 벌겠다고 가짜 범죄자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헤치지도 않고, 무고한 사람을 몰아간 뒤에 제대로 보상하지 않은 사건들도 많았지만 그런 무고한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경찰서에 던져놓은 것이 슈퍼히어로인데요. 그러고 슈퍼히어로는 가면을 벗고 일반인처럼 살면 그만이죠.”

 ‘나처럼.’ 정일이 뒤에서 짧게 덧붙였다. 정일이 아는 선에서 무고한 인물을 제압한 적은 없었지만 친구 4명을 죽이고 피해자인 척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 그 이상으로 역겨웠다. 자기혐오에 빠진 정일은 잠깐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러면 얼마 전 용오름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얼마 전이라니요? 용오름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활동하고 있었잖아요.”

 “아뇨, 진짜 용오름으로서 자신이 힘든 기억에 아파하느라 쉬고 있는 동안 가짜 용오름이 정일 씨를 표절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정일은 의자를 엉덩이로 걷어차듯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무슨 유도심문을 하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거죠?”

 “말 그대로인데요? 정일 씨. 가짜 용오름을 만들어 의심을 피한다는 발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용오름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 왜 정일 씨의 사건이 뉴스에서 하루이틀 만에 내려왔을까요? 물론 MH라이트닝의 사망이 일을 조금 더 쉽게 만들어줬지만 우리의 전문은 여론과 언론 조작 아니겠어요?”

 정일은 시아를 떠올렸다. ‘역시 그랬나?’ 시아에게 한 마디 해야 했지만 우선 눈앞의 문제가 우선이었다.

 “날 체포할건가요?”

 “그것도 좋죠. 아니면 이런 건 어때요? 정일 씨가 증인이고, 용오름이라는 것을 가족과 인터넷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공개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경찰이 민간인을 협박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시죠?”

 결국 굴복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그냥 한 번 찔러보는 사람들이 의례 하는 대사를 받은 영화가 미소 지었다.

 “아, 전 경찰이 아니에요. 경찰 혼자서 여론조작을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다음 순간 정일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정일은 영화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보는 사람의 시야를 통해 좌우가 바뀌자 자신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고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균형을 잡으려다가 그대로 왼쪽으로 넘어진 것이다. 정일은 자신이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시선은 이제 자신이 보이지 않는 자신 뒤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가 몸을 숙이자 마침내 자신의 눈에 당황한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보였다. 영화가 다시 미소 짓자 시야의 양 끝에 영화의 광대뼈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난 증인 특수요원입니다.”

 

 

 *****

 

 

 “우와, 진짜 불가살이잖아!”

 정석이 외쳤다. 서울에서는 연예인 보듯이 슈퍼히어로들이 길을 걷다가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눈앞에서 시내를 걸으며 행인들에게 인사하며 종종 손을 잡는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팬 서비스를 해주는 슈퍼히어로를 실제로 보자 느낌이 유별났다.

 “저게 뭐가 대단하냐? 티비만 틀면 ‘불가살이 감자칩 맛있어요!’ 하는 거 보면 깨던데.”

 “너 오늘 내 감동 많이 깬다? 그럼 넌 사진 안 찍을 거야?”

 “원한다면 너 찍어주는 정도는 해줄게.”

 “고마워 사랑해!”

 시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불가살이를 노려보았다. 오랜만에 지방에서 인기를 끌더니 본분을 잊어버린 듯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손은 양 손이 펜과 팬으로 차 있어 위험에 전혀 반응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정일 오빠랑 붙으면 10초도 못 버티고 바닥에 드러눕게 생겼구만.’

 물론 불가살이 역시 쟁쟁한 사건들을 연달아 해결한 만큼 쉬운 상대는 아니겠지만 시아가 보기에는 별로 대단한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불가살이가 살인자의 타겟이 아니라서 그런 것 일수도 있었다. MH라이트닝이 범죄 조작자를 고용한 내용이 들어있는 휴대폰을 공개한 살인자인 만큼 살의가 그저 협찬히어로가 아닌 범죄 조작이 있었던 사람에 국한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그렇다면 불가살이나 다른 히어로들을 대상으로 살인자가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범죄자를 잡는 것은 히어로가 아니라 경찰의 역할이었다. 경찰이 총을 쏘면 과잉진압으로 욕을 먹고, 히어로가 머리를 부수면 멋지다고 환호하는 세상 속에서 숨은 범죄자를 찾아내는 정보력과 끈기는 여전히 경찰이 히어로를 상대로 굳건히 주도권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아무튼 관광이나 실컷 하다 가겠네. 저 꿀 빠는 협찬 히어로들.’

 시아가 탄식했지만 여전히 불가살이에 빠져있는 정석은 시아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나, 가서 사진 찍어달라고 한다! 빨리 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입학한 것 같은 꼬마 두 명과 SNS로 생중계를 한다고 불가살이에게 떨어지려 하지 않는 남중생 하나를 지나쳐 마침내 정석이 불가살이 앞에 섰다.

 “저, 저기…….”

 “사진? 악수?”

 불가살이는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님을 과시하듯 자연스럽게 정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석이 황송함에 손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팬이에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될까요?”

 “둘 다구나? 휴대폰은 있니?”

 “잠깐만요. 시아야, 여기 사진 좀 찍어줘!”

 “오냐.”

 시아가 휴대폰을 꺼냈다. 불가살이가 정석과 어깨동무를 했다. 덩치 차이가 커 거의 정석을 뒤덮다시피 한 모습에 정석은 기절할 것처럼 좋아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한 장 더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자, 잘 나왔습니다.”

 “자, 올릴 때 나 태그하는 거 잊지 마라? 너희는 제일 좋아하는 슈퍼히어로가 누구니?”

 “용오름이요!”

 시아와 정석이 동시에 말했다. 불가살이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가 돌아왔다. 정석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둘 다 너무 좋아하는 팬인 것 같았지만 시아는 마치 일부러 자신이 듣고 화나라고 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그래. 그 친구도 괜찮은 슈퍼히어로지. 자, 이제 비켜줄래? 형은 지금 근무 중이거든.”

 묘하게 차가워진 불가살이의 태도에 정석은 주눅이 들었다. 불가살이가 정석을 살짝 밀치고 지나갔다. 당황한 정석이 과한 동작으로 도로로 넘어지려 하자 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불가살이가 몸을 숙여 정석의 손을 붙잡았다.

 “뭐야, 보험사기단이니?”

 그리고 불가살이의 귀가 날아갔다.

 불가살이가 무릎을 꿇고 귀를 움켜쥐었다. 정석은 가면 조각의 일부가 묻은 불가살이의 귀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허공을 나는 것을 보았다. 정석이 불가살이의 귀를 낚아챘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정석은 불가살이의 귀를 관통하고 땅에 박힌 총알을 볼 수 있었다. 시아가 총알이 날아간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저 건물 4층 환풍구에서 총구가 나왔어요!”

 “젠장, 그 살인자 놈이!”

 불가살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저기 뭐 하는 건물이야!”

 “당구장인데, 아마 망해서 다 치웠을 걸요.”

 “그래, 고맙다!”

 불가살이가 건물로 달려갔다. 정석이 불가살이의 귀를 들고 외쳤다.

 “아저씨! 여기 귀!”

 “그거 잘 갖고 있어! 저놈 잡고, 병원 가서 붙여달라고 할 거야! 잘 부탁한다!”

 불가살이는 날개 달린 탱크처럼 두 걸음에 도로 건너편에 있는 당구장에 도착했고, 벽을 짚고 세 번 만에 4층의 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정석이 시아에게 불가살이의 귀를 내밀었다.

 “받아.”

 시아가 질겁했다.

 “미쳤어! 사람 귀를 왜 줘!”

 시아가 차마 귀를 던지지는 못하고 손가락 끝으로 집었다.

 “야, 근데 이 귀를 왜 내가……. 야?”

 정석이 굳은 얼굴로 불가살이가 들어간 창문을 바라보았다. 정석의 표정에서 기대와 흥분을 읽은 시아가 정석의 어깨를 잡았다.

 “야, 안 돼. 생각도 하지 마. 진짜 죽어.”

 “나, 가야겠어. 귀 잘 갖고 있어.”

 “미친놈아! 살인자가 뭔지 몰라? 죽는다고!”

 시아의 목소리가 너무 커지자 정석이 시아의 입을 막았다. 정석이 시아를 붙잡고 인적 드문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늘지고, 사람 없는 쓰레기통 뒤의 골목길은 전통적으로 슈퍼히어로의 환복장이었다. 정석이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썼다. 가면을 시아에게 내밀었지만 시아는 손을 뒤로한채 고개를 저었다.

 “너 가면 쓰고 나가면 네 이름 부르면서 소리 지를 거야. 야! 이름표! 이름표!”

 정석이 시아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려 하자 시아가 정석을 붙잡으려 헛손질하며 외쳤다. 정석은 시아의 손을 붙잡고 이름표와 가방을 걸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가면이었지만 정석의 장난기 섞인 표정이 시아에게 보이는 듯 했다.

 “자, 이제 진짜 간다?”

 정석이 시아의 손을 놓고 밖으로 날았다. 시아는 멍하니 정석이 두고 간 흔적을 바라보았다.

 한 편. 당구장에서는 완벽과 불가살이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불가살이는 창문을 깨고 당구장 안에 들어갔을 때, 범인이 이미 총기류를 챙겨서 떠났거나, 아니면 미처 챙기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은 총기를 기둥에 대고 세워놓은 채 불가살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가살이는 괴한의 등 뒤에서 그려진 커다란 두 글자를 발견했다.

 完璧(완벽)

 “미친놈이 대한민국 어디서 총을 가지고 온 거야? 네가 MH라이트닝을 죽였지? 너 뭐야?”

 “나는 완벽. 너를 죽이러 왔다.”

 “그래, 내 동료들이 올 때 까지 얼마나 자신 만만하게 버티나 보자!”

 불가살이가 완벽을 덮쳤다. 완벽이 양 팔을 뻗어 불가살이의 양 손을 움켜쥐었다.

 1.9미터의 불가살이가 그대로 허공에 고정되었다.

 불가살이는 그네처럼 몸을 뻗어 완벽의 배를 걷어찼다. 완벽은 일격에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불가살이는 주먹을 쥐고 벽을 향해 걸어가려다가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벽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서 손가락이 모두 부러져 뒤틀린 것을 알게 된 불가살이가 뒤늦게 손을 품에 집어넣고 이를 갈았다. 벽 틈에서 나온 완벽은 약간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손가락은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완벽이 몸을 숙이고 불가살이를 들이받았다. 트럭에 치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불가살이가 완벽을 껴안아 함께 바닥을 굴렀다. 불가살이는 완벽의 목을 졸랐다. 완벽은 불가살이의 팔을 힘으로 풀려 했으나 신체 내구도에서는 앞서는 대신 힘에서는 불가살이가 더 강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가살이가 팔에 힘을 더했다.

 “죽어라, 이 망할 살인자 놈아!”

 레슬링선수가 탭을 하듯 불가살이의 팔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던 완벽이 불가살이의 손가락을 쥐고 다시 비틀었다.

 “아악! 이 망할 놈이!”

 불가살이가 팔을 풀자 완벽이 뒤돌아 불가살이를 덮쳤다. 완벽이 불가살이의 등 뒤로 매달려 역으로 목을 졸랐다. 불가살이는 완벽의 손을 풀려 했지만 부러진 손가락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불가살이가 기둥에 등을 들이받았다.

 한 번, 두 번. 충돌이 일 때마다 건물이 지진이 난 것처럼 휘청이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완벽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기둥을 뚫고 반대편에 이동했을 때도 완벽은 여전히 불가살이의 등 뒤에 굳건히 매달려 있었다.

 ‘젠장!’

 불가살이가 입으로 나오지 못한 비명을 표정으로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불가살이는 눈을 떴다. 그동안 밀린 숨의 채무를 변제하듯 바닥을 부여잡고 탐욕스럽게 산소를 공급한 불가살이는 멈췄던 뇌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살아있나? 얼마나 지난 거지? 완벽은?’

 불가살이는 고개를 들었다. 몸은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완벽이 불가살이의 등을 밟고 있었다.

 “너는 건드릴 생각 없다. 나가라.”

 “그건 안 되겠는데? 대전은 용오름이 지키는 거거든. 발 치워줄래? 개인적으로 팬…은 아니지만 아무튼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발 치워. 이제 나랑 붙자.”

 정석은 불가살이가 용오름을 싫어한다는 말을 떠올리고 뒤늦게 말을 돌렸다. 용오름도 불가살이를 싫어한다는 말은 못 들어봤지만. 불가살이는 정석의 하얀 교복을 보고 입을 벌렸다. 고등학생?

 완벽이 불가살이에게 발을 뗐다. 표정 없는 검은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정석을 공격할 생각은 없는 듯 양 손을 들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운 좋은 놈.”

 완벽이 불가살이에게 혐오에 찬 감정을 드러냈다. 불가살이는 의아한 얼굴로 정석을 올려다보았다. 왜 완벽이 용오름을 공격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아니었다. 그거야 체포하고 직접 물어보면 되는 일이니. 완벽의 의문은 대체 왜 물러나는 완벽을 보고만 있느냐는 것이었다. 완벽이나 불가살이와는 달리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용오름이라면 그저 손짓만으로 바닥에 눌러버리면 니토크리스가 다른 슈퍼히어로들을 여기에 모을 때 까지 충분히 시간이……. 불가살이의 의문은 정석의 화려하지만 어설픈 돌려차기로 해결되었다. 완벽 역시 상상도 못한 방식의 공격이었기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채 가슴을 직격당하고 벽에 날아가 부딪쳤다. 불가살이보다는 약하지만 역시 비인간적인 강함이었다. 그리고 용오름은 염력을 사용한다.

 “가짜?”

 불가살이가 자신이 듣기에도 한심할 정도로 멍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

 완벽이 이를 가는 소리가 정석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정석이 모둠발로 뛰어올라 완벽의 머리를 걷어찼다. 완벽의 머리가 벽에 움푹 들어갔다. 정석은 바닥에 착지하고 다시 달려들어 머리를 들이받았다. 쇳덩어리가 충돌하는 충격적인 소리가 끝나고 제압당한 쪽은 정석이었다. 완벽은 정석의 공격을 모두 무시하고 팔을 뻗어 정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정석이 양 손으로 완벽의 손을 붙잡았지만 완벽의 손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짜는 이야기가 다르지. 죽어라.”

 완벽의 목소리가 정석의 손에 힘이 빠지게 만들었다. 정석이 완벽의 팔에 몸을 매달리고 힘을 줬다. 뼈가 아니라 금속이 깨지는 것 같은 느낌과 소리가 들리며 완벽이 정석을 집어던졌다. 정석은 기둥을 밟고 공중제비를 돌아 땅에 등부터 착지했다. “아야.” 사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크나큰 민망함이 정석을 덮쳤다. 민망함 뒤에는 완벽이 정석을 덮쳤다. 정석이 몸을 굴려 완벽의 주먹을 피하고 몸을 일으켰다. 힘은 완벽이 훨씬 강하지만 민첩함에서는 정석이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완력이라면 완벽보다 강한 사람이 있었다. 완벽이 정석에게 집중하는 사이 불가살이가 완벽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완벽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불가살이가 말했다.

 “꼬마야, 세상에는 저작권이라는 게 있단다.”

 “이 상황이면 저작권보다는 사칭 금지라거나…….”

 “아무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가면을 쓴다는 건 장난이 아니라고.”

 “아저씨 방금 나 아니었으면 죽을 뻔 한 거 알죠?”

 “난 저 가면이 정말 싫어.”

 불가살이가 짜증 섞인 한탄을 했다.

 “무리하지 마라. 저놈도 우리 동료가 더 온다는 걸 아니까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 할 거야. 알겠지?”

 “옙.”

 완벽이 불가살이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불가살이가 팔꿈치로 완벽의 주먹을 붙잡고, 정석이 빈틈을 걷어찼다. 쇳덩어리를 치는 것 같은 충격에 정석이 발을 흔들었다. 완벽은 정석의 공격이 거의 타격이 없는 것을 알았는지 정석을 무시하고 불가살이만을 공격했다. 불가살이는 팔을 들어 방어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완벽의 주먹이 불가살이의 팔을 뚫고 얼굴에 박혔다. 불가살이가 코피를 쏟으며 창틀에 매달렸다. 정석은 완벽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완벽이 두 걸음 정도 밀려나더니 정석의 머리를 무릎으로 차올렸다. 정석의 몸이 수직으로 솟아 4층과 옥상 사이의 층간에 박혔다. 완벽이 불가살이의 멱살을 잡고 건물 안으로 던졌다. 떨어져봐야 죽을 불가살이가 아니니 밖으로 던지는 것은 탈출시켜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불가살이간 바닥을 구르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완벽의 발이 불가살이의 목을 걷어찼다. 불가살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저씨!”

 정신을 차린 정석이 땅으로 내려와 불가살이가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완벽이 정석을 바라보았다. 짧게나마 불가살이를 마무리할 것인지 정석을 잡을 것인지 눈에 띄게 고민하던 불가살이가 발을 들어 불가살이의 손을 짓밟았다. 불가살이가 비명을 질렀다. 정석은 공포에 질렸다. 상대가 안 된다. 정석의 힘이 너무 부족해서 완벽에게 방해가 되지를 않았다.

 “야! 짭오름! 거기서 나와!”

 등 뒤에서 들리는 고함에 정석이 몸을 숙였다. 작은 물체가 창문을 깨고 날아왔다. 정석이 팔로 눈을 가리며 날아온 물체가 무엇인지 가늠했다.

 그것은 손바닥 정도 크기의 작고 예쁜 손거울이었다.

 정석은 거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고, 완벽이 거울을 향해 부서진 벽의 파편을 던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더 빨리 불가살이를 잡고 거울 속으로 끌어당겼다. 불가살이가 흡수되듯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 직후 거울이 콘크리트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정석은 당황했다.

 “뭐야, 나 혼자야?”

 정석의 의문에 대답하듯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에 걸터앉은 강아지 코스프레같은 코스튬의 하릅, 계단을 올라오는 청동색의 동상 같은 온새미로와 양 손등에 망원경 모양의 비살상용 총이 붙어있는 다빛이 완벽을 포위했다. 하릅이 거울을 꺼내자 니토크리스 역시 거울에서 튀어나와 양팔을 뻗고 외쳤다.

 “내가! 이 전투를! 끝내러 왔다! 용의자는 스타킹을 벗고 항복해라!”

 언제나처럼 진지한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유쾌한 니토크리스의 모습에 정석이 실소했다. 니토크리스의 말을 듣고 보니 검은 겨울용 스타킹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희망을 동반한 웃음이었다. 네 명 다 어디 불가살이 못지않게 뛰어난 슈퍼히어로들이다. 완벽은 심각성을 깨달은 듯 벽에 기대서서 네 명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정석은 궁금했다. 항복할까? 아니면 싸울까? 완벽은 다빛에게 달려들었다. 온새미로가 다빛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냘픈 몸이 완벽과 충돌해 거대한 굉음을 일으켰지만 온새미로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평소에는 일반인과 다름없고, 경화라 불리는 능력을 사용하면 전혀 움직일 수가 없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엄청난 능력이었다. 온새미로에게 막힌 틈을 타 다빛이 사방으로 고무탄을 발사했다. 겁에 질려 무분별하게 발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고무탄은 팔방을 튕기며 힘을 더해 벽을 등져 가려진 완벽의 무릎 뒤를 가격했다. 완벽의 무릎이 구부러지자 하릅이 완벽의 등을 걷어차 벽에서 떨어뜨렸다. 그 뒤에는 정석은 인터넷에서만 보던 하릅과 니토크리스의 협공을 볼 수 있었다. 하릅이 거울을 던지면 니토크리스가 팔, 혹은 다리만 내밀어 완벽의 급소를 때렸고, 하릅은 니토크리스가 정신을 붙잡는 동안 고양이 같은 민첩함과 곰같은 힘으로 완벽의 무릎을 집중 타격했다. 제 3자로 보고 있는 정석마저도 움직임을 다 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완벽은 하릅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 때마다 다리 사이로, 혹은 머리 위로 빠져나간 하릅이 거울을 던졌고, 니토크리스가 자신의 주먹질로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안 뒤에는 거울에서 주먹과 발 대신에 망치와 폭약이 튀어나왔다. 완벽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나자 온새미로가 완벽에게 달려들었다. 완벽은 사각에서 달려온 온새미로를 보지 못했고, 온새미로가 완벽을 껴안았을 때도 경화를 걸기 전에 제때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온새미로는 완벽을 뒤에서 안고 오른손을 완벽의 왼쪽 어깨를, 왼손은 완벽의 허리를 두른 채 경화를 걸었다. 온새미로를 움직일 수 없는 이상 완벽은 완전히 움직임이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울에서 튀어나와 체조선수처럼 포즈를 잡은 니토크리스가 정석밖에 없는 관객석을 향해 경례하고 완벽의 가면을 벗겼다.

 정석은 눈을 감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시 완벽의 얼굴을 본 정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완벽의 얼굴은 심한 화상을 입어 온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입술 일부가 사라져 입을 다물고도 이를 드러내고 있었고, 볼에도 힘줄이 드러나 있었다. 표정은 분함이나, 절망 없이 철저하게 무표정이었지만 그것이 포커페이스의 유지인지, 표정을 지을 수조차 없이 근육이 망가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석은 현기증을 느꼈지만 니토크리스는 장난기 많은 성격과 달리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경험자답게 별다른 동요 없이 하릅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자, 집에 가자!”

 하릅 역시 개 발바닥을 니토크리스와 맞대며 강아지 소리를 냈다. 다빛이 완벽의 얼굴에 다시 가면을 씌웠다.

 “기본적으로 가면을 벗겨서 연행하게 되어 있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하자.”

 “그래요, 맨얼굴로 내보내면 사람들이 악몽 좀 꾸겠네.”

 하릅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석을 바라보았다. 정석이 괜히 움츠러들며 몸을 뒤로 뺐다.

 “대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슈퍼히어로 사칭 문제가 되게 예민하죠?”

 “그런 편이지. 아무래도 모방범이 생기기 쉬운 직업이니까.”

 다빛이 하릅의 말에 대답했다. 니토크리스가 당장이라도 2차전을 벌일 듯 몸을 낮추는 하릅의 강아지 귀를 잡고 말했다.

 “아까 보니까 너 아니었다면 불가살이가 죽을 뻔 했더라. 빨리 가. 이번만 못 본 척 해줄 테니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라?”

 니토크리스의 말에 하릅이 귀를 잡은 손을 뿌리치고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이 니토크리스와 하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니토크리스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했고, 하릅도 굳이 무언가 책임을 묻거나 하지는 않겠다는 듯 정석을 외면했다. 아쉽다면 아쉽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더 이상 사인을 요청하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정석이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불법이라는 식의 말을 들으니 목소리를 내는 것 조차 조심스러웠다. 정석이 사라지는 것을 본 하릅이 말했다.

 “재밌네. 용오름한테 사칭이 붙을 줄은 몰랐는데. 단순 코스프레도 아니고 저런 식의 사칭이라니.”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으니깐. 안 그래? 우리 자칭 완벽하신 사이코 씨?”

 니토크리스가 완벽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완벽은 고개를 돌릴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니토크리스가 입을 삐죽이듯 가면 밑 부분이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니토크리스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임무를 끝냈음을 자축하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자, 그럼 진짜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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