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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용오름-영웅의 기준
작가 : 대홍수2
작품등록일 : 2018.12.6

슈퍼히어로 '용오름'이자 대학생인 정일은 여러 범죄를 해결하던 중 잠깐의 휴식을 가지며 친구들과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이 정일을 갉아먹기 시작하는데...... 대홍수의 슈퍼히어로 시리즈 <증인들>의 첫 번째 이야기!

 
4화
작성일 : 18-12-23 16:50     조회 : 221     추천 : 0     분량 : 15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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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정일은 자고 있지 않았다. 몸은 지쳐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불안감이 계속해서 정신을 맑게 했다. 정일은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뗏목은 틀렸다. 그럼 다음 방법은 뭐가 있지? 아무튼 바다로 나가지 않는 건 말도 안 돼. 여기 계속 있는 건 오늘 익사하기 무서워서 내일 굶어 죽겠다는 거니깐. 그런데 바다로 나가면 뭐가 나아지지? 바다를 통해 집으로 돌아갈 길이 있다 해도 어디에,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이상 무작정 수영을 한다는 것도 말도 안 돼.’

 정일은 자신들은 이미 죽었고, 여기는 불가능에 고통 받는 지옥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아직까지는 일행들도 다소 힘겨울 뿐, 죽을 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죽음이 확정된 지역에서야 교수대에 매달리기 직전의 힘이 넘치는 사형수만큼의 전망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정일이 인기척을 느끼고 실눈을 떴다. 동아와 혜린이 돌아온 것인가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묵묵히 자리에 앉아있던 수종이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땔감이 다 떨어졌나?’ 수종이 사라지자 정일이 몸을 일으켰다. 불이 닿지 않은 곳이 차갑게 느껴졌다. ‘동아, 혜린이도 춥겠다. 빨리 좀 돌아올 것이지.’

 정일이 벌떡 일어났다. 밤은 춥다. 몰랐던 것도 아니다. 분명 전날 밤 추워서 다 같이 불가에 모여서 잤음에도, 그리고 혜린이 일행 중 려경, 수종, 자신 중 누구도 추운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동아와 혜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피곤하고, 여기 위험한 요소가 없어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면 여기에 오게 됐을 때처럼 또다시…….’

 정일이 려경을 흔들었다.

 “려경아, 려경아. 일어나 봐.”

 “우우웅……. 뭐야? 벌써 내 차례야?”

 “어쩌면 동아와 혜린이가 위험할지도 몰라.”

 잠꼬대같은 소리를 하며 뒤척이던 려경의 눈이 위험이라는 단어에 번쩍 뜨였다. 려경이 몸을 일으키고 수종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에? 수종이는?”

 “숲에 들어갔어. 아마 땔감이 필요해서 들어간 모양인데 일단은 수종이도 위험할지도 몰라.”

 “숲에 들어가는 걸 알고도 그냥 뒀다는 거야?”

 정일이 귀를 막았다. 려경의 비명 섞인 고함과, 자신의 귀를 막은 양 손 때문에 정일은 려경보다 한 호흡 늦게 반응했다. 려경이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보았다.

 “수종이 비명소리야!”

 “뭐?”

 려경이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일어났다가 정일을 바라보고 멈칫했다.

 “그런데 위험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설마 이 숲에 괴물이라도 산다는 거야?”

 “이제부터 그걸 알아봐야지. 따라와!”

 정일이 려경의 손을 잡고 달렸다. 비명을 지르게 할 만 한 무언가가 섬에 서식하고 있다면 혼자 움직이는 것 보다는 다소 위험한 곳에 가더라도 둘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정일이 발을 내딛을 때 마다 모래사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아스팔트길을 달리듯 엄청나게 보폭이 벌어졌다. 려경은 정일에게 거의 매달리듯이 끌려갔다. 비명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정일도 방향과 위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살려줘! 정일아! 려경아!”

 정일이 려경의 손을 잡은 손을 놓았다. 당황한 려경이 정일의 손을 다시 붙잡으려 했지만 자신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자 균형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정일아! 나 갑자기…….”

 “그거 나야. 일단 조용히 따라와.”

 정일이 나무를 발로 차고 좌우로 빠르게 뛰며 앞으로 달렸다. 려경은 정일의 앞에서 정일의 손짓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며 나무를 피해 함께 날아갔다. 려경은 어지럼증에 머리를 쥐고 눈을 감았다. 정일의 말대로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숲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정일의 방향 탐지를 방해하고 있었다. 정일이 려경의 목소리에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해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수종아! 어디 있어!”

 땅에 내려선 정일이 려경에게 손을 뻗었다가 세게 당겼다. 려경의 몸이 정일에게 끌려왔다. 정일이 려경의 코와 입을 손으로 막았다. 려경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비명을 질렀는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정일은 려경을 보지 않고 숲을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찾았다. 우측에서 흐릿한 신음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일이 다시 려경을 집어던지고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정일의 귀에 들리는 신음소리와 숨소리가 각각 가진 생명력의 크기가 너무나도 달랐기에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소리의 진원 예상 지점에 도착한 정일이 려경을 나무 위로 던졌다. 나무에 걸쳐진 려경이 헛구역질을 했다. 설령 정일의 머리 위로 구토를 했더라도 정일은 이를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초점을 잃은 수종은 멍한 눈으로 땅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내장의 절반이 씹히고 있고, 절반이 타인의 손에 들려 있는 상황이라면 생명보다는 시체로서의 잠재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양 어깨는 이미 뜯겨져 나가 팔 하나가 보이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땅에 내팽개쳐져 있었는데 정일이 있는 거리에서는 오른팔인지 왼팔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반신은 어둠에 가려진 것인지, 아니면 역시나 함께 뜯겨져 나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일은 차라리 후자이길 바랬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일찍 이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종에게서 조금만 시선을 위로 돌리면 수종의 내장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포식자를 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인간으로 착각할 수 있는 외형이지만 정일은 그것이 인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어야 했다. 그래야 정일이 마음 놓고 그것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뒤이어 내지른 려경의 고함이 정일의 분노에 찬물을 부었다.

 “동아야! 정일아! 저거 동아야! 동아야! 정신 차려! 수종아!”

 맥락 없이 던지는 려경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정일은 수종의 얼굴을 긁는 그 왼손에서 혜린과 동아가 함께 맞춘 커플링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려경의 고함에 동아가 려경을 바라보았다. 동아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본 정일이 외쳤다.

 “려경아, 피해!”

 웃기는 소리였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떨어질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는 려경이 도약하는 동아를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동아가 뛰어오르자 려경은 눈을 감았다. 정일이 주먹을 쥔 손을 들고 힘차게 내렸다. 동아가 무거운 무언가에 눌린 듯 허공에서 추락했다. 동아가 정일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정일의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동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일아.”

 목소리가 동아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느낀 정일이 무의식적으로 힘을 풀었다. 동아는 기괴하게 뒤틀린 웃음을 지으며 정일에게 달려들었다. 우측 입꼬리는 인간을 초월해서 올라가고, 반대 방향은 일자로 완전히 무표정했다. 눈은 반대로 좌측은 폭소를, 우측은 감겨 있었다. 정일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동아를 다시 눌렀다. 동아가 괴성을 지르며 정일을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정일아!”

 려경의 비명에 정일이 고개를 들었다. 려경이 매달려있던 나뭇가지가 심하게 기울어 있었다. 원래 약했던 것인지, 려경이 놀라 발버둥 치다 구부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정일은 동아를 향해 힘차게 손을 뻗었다. 강력한 척력에 동아의 몸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갔다. 동시에 나뭇가지가 부러져 려경이 추락했다. 동아가 려경을 끌어당겼다. 려경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과속비행을 겪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일이 말했다.

 “려경아.”

 려경이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일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정일이 전방에 시선을 주시했다. 멀리서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내 고기야! 절대 못 가져가!”

 “려경아, 저게 나타나면 일단 도망쳐. 내가 죽으면 너도 죽겠지만 여기 있으면 널 지키면서 싸울 수가 없다. 내가 밀어서 모래사장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나무를 피해 조종할 수가 없으니 네가 가야 해.”

 려경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기절한 것일까 시선을 옮기려는 찰나에 동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정일과 눈을 마주친 그 괴형은 정일을 보고 다시 이를 드러낸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도망쳐!”

 “내꺼야!”

 정일을 향해 달려들려던 동아는 정일의 척력에 벽에 막힌 듯 허공에 부딪치고 땅에 곤두박질쳤다.

 정일이 외쳤다.

 “이동아! 정신 차려! 나도 더는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동아는 정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괴성을 지르며 보이지 않는 벽을 부수려는 듯 허공을 때릴 뿐이었다. 동아의 피비린내 나는 숨결이 투명한 벽을 뚫고 정일과 려경의 코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참상을 외면하던 려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공포영화 하나 제대로 본 적 없는 일반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공포였다. 최악의 악몽을 곰인형으로 만들 수 있는 그 외모에 려경이 비명을 질렀다. 동아와 정일의 시선이 동시에 려경에게 향했다. 려경은 무작정 동아와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정일은 짧게 안도하고 다시 동아를 돌아보았다.

 동아는 나무 두 그루를 연속해서 밟고 허공에 뛰어올라 정일을 넘어 곧장 려경에게 달려들었다. 정일이 다시 손을 들었다가 세게 내렸다. 동아가 다시 바닥에 추락했다. 아까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더 세게 떨어졌기에 땅이 흔들리고, 려경이 넘어졌다. 동아가 땅을 긁으며 려경에게 기어갔다. 정일이 다시 손을 올렸다가 세게 내렸다. 동아의 몸이 바닥으로 호되게 눌렸다. 정일은 반복했다. 동아는 한 번 뭉개질 때 마다 계속해서 괴성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저건 내 고기야! 내꺼라고!”

 “배고파, 배고파! 뜨거운 피!”

 “내장을 파내고 피를 마시자! 고기를 씹고 뼈를 부수자!”

 려경은 넘어지며 다리를 다친 듯 주저앉은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면서 동아의 몸이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을, 그리고 끊임없이 고기를 탐하는 것을 보고 들었다. 정일은 생명력이 질긴 바퀴벌레를 죽을 때 까지 짓밟듯 계속해서 동아의 몸을 뭉개고 또 뭉갰다. 마침내 동아의 팔다리가 모두 부러지자 정일은 공격을 멈췄다. 동아는 여전히 려경을 향해 이를 딱딱대며 달려들려 했지만 으깨진 팔다리가 땅에 짓이겨져 접착제 역할을 해 동아의 움직임을 막았다. 정일은 팔을 내리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정일이 동아에게 다가갔다. 다급한 상황과 과도한 흥분이 도를 넘는 폭력을 창조했지만 지금이라도 멈춰야 했다.

 려경을 가리고 동아의 앞에 섰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식인괴물이 된 친구를 되돌리는 꿀팁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동아는 턱으로 땅을 긁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천천히 걷는 것 보다 느린 속도였다. 정일이 말했다.

 “동아야, 정신 차려.”

 동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동아가 정일의 말을 듣는 듯하자 려경이 용기를 내고 동아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동아야! 혜린이는 어떻게 했어? 정신이 돌아와?”

 동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눈동자의 검은 비율이 50퍼센트에서 100퍼센트를 빠르게 오갔다. 동아가 고통스러운 듯 땅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흙바닥이었음에도 이마가 파이고 찢어질 정도로 힘찬 박치기에 려경과 정일은 사색이 되었다.

 “안 말리고 뭐해!”

 “어떻게 말려 저걸!”

 정일이 팔을 들어올렸다. 동아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땅에 접착된 팔다리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나갔다. 동아가 고개를 들었다.

 “정일아? 려경아?”

 정일이 앞으로 나가려는 려경을 팔로 막고 말했다.

 “너, 뭐야? 정신이 돌아왔다고?”

 “돌아왔다니 무슨 말이야? 난 그냥 혜린이랑 숲에서 놀다

 …….”

 “보지 마!”

 동아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향해 시선을 내리자 정일이 동아에게 달려들어 눈을 손으로 가리려 했다. 동아의 눈동자가 다시 검게 물들었다.

 “잡았다!”

 동아가 정일의 팔을 깨물었다. 정일은 비명을 질렀다. 고통이 온전히 느껴지기도 전에 정일의 몸이 날아갔다. 려경과 정일은 한 몸이 되어 섞이며 나무에 들이받았다. 정일이 허벅지를 꼬집어 비명을 참았다.

 “방금 뭐지?”

 몸을 일으킨 정일은 10초 전만 해도 동아가 있던 자리를 구덩이가 대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아야!”

 정일이 동아가 있던 자리로 달려가려다 팔이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주저앉았다. 정일은 자신의 팔에 머리만 남은 동아가 이빨로 매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정일이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려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에 부딪친 충격 때문인지, 동아의 머리가 떨어져나간 것을 본 충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일은 자신도 기절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려경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았다. 정일은 동아의 입을 벌려 자신의 팔을 빼냈다. 팔에는 피부를 파고든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앞으로는 긴팔밖에 못 입겠네. 안 그래 동아야?”

 동아의 머리는 눈을 부릅뜨고 정일의 팔을 향한 욕망을 품은 채 시간이 멈춰 있었다. 정일은 동아의 머리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 제압만 하고 정신 차릴 때 까지 붙잡아 놓으려 했어. 내가 한 게 아냐. 일부러 한 게 아니었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긴 시간이 지나고 정일은 려경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뒤척이는 것을 들었다. 정일은 려경을 돌아보고 말했다.

 “동아가 죽었어. 아무래도 내가 죽였나봐.”

 “수종이는?”

 려경의 말을 들은 뒤에야 정일은 수종을 잊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마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겠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지금 볼게.”

 “그럴 필요 없어.”

 정일이 엉거주춤하게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얼어붙었다. 온 몸이 차가운 와중에 옆구리 한 쪽만이 그 얼음을 녹이려는 듯 맹렬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일이 고개를 숙였다.

 려경이 굵은 나뭇가지로 정일의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

 

 

 시아와 시아의 부모는 정일이 있는 병원까지 찾아갔다. 이틀만 지나면 전라도에서 대전으로 옮긴다고 했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시아의 친오빠인 동아는 아직 발견되지도 않았다. 정일의 병실에 들어가자 이미 적잖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전날 미리 출발한 정훈을 제외한 정석의 가족들, 그리고 답답해서 가슴을 치면서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 하는 나머지 둘은 아마도 혜린, 수종, 려경 중 한 명의 부모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은 눈으로 벽과 자신 사이의 공기를 바라보고 있는 정일이 있었다.

 “저희는 동아 부모입니다.”

 “아, 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드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저희는 정일이 부모고, 저 분들은…….”

 “혜린이 엄마입니다. 우리 애가 동아 이야기를 많이 해서 나중에 우리도 소개해 준다고 하더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혜린의 엄마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일은 바다에서 떠다니던 중 구조되었다. 옆구리에 박혀있는 나뭇가지는 죽은 지 100년이 넘은 나무이며, 어느 나무의 가지인지는 알 수 없다고, 최소한 한국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무가 그렇게 박혔으니 2차 감염이 일어나야 정상이지만 의사들 말로는 옮겨지면서 조금 오염되었을 뿐, 형 몸에 박힐 때만큼은 갓 소독한 수술용 메스보다 더 깨끗했다더라.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건지.”

 시아는 정일에게 다가갔다. 정일은 시아가 시야 안에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오빠, 오빠?”

 “소용없어.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말하는 것도 거의 반응 못 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겠어. 왼팔을 보니까 무언가에 물린 것 같아. 광견병 같은 걸 수도 있고. 아니, 바다에서 발견됐으니 그건 아니겠지. 공수증 환자가 수영을 할 리가 없으니깐. 아무튼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왜 정신이 나간 건지, 정신이 돌아올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모양이야.”

 “동아는, 동아는 어떻게 됐는지 들었니?”

 시아의 엄마가 정석의 손을 잡았다. 세게 잡으면 동아가 살아날 확률이 높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한 악력에 정석이 움찔했다.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간절함의 크기가 느껴짐에도 원하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심리적인 고통 때문이었다.

 “모르겠어요. 형은 대답을 안 하고, 다들 어디로 갔다가 실종됐는지도 모르니까요. 멀리서 왔는데 좋은 소식을 못 들려줘서 죄송하네요.”

 정석이 고개를 떨궜다. 안타까운 진심을 전달하기 위한 다소의 연출이었다. ‘너무 과해.’ 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처럼.’

 “아니다, 안 와도 된다는 이야기 듣고 찾아온 우리가 불청객이지.”

 시아의 엄마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코를 세게 풀었다. 시아가 말했다.

 “그래, 우리는 이제 갈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거라. 나중에 오빠가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해 줄래?”

 시아가 정일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을 마주쳤다. 정일은 시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아를 바라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혹시나 정일이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쳐다보던 시아는 결국 포기하고 정일의 손을 놓았다. 가족들에게 돌아가려던 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약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정일이 인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의식이 없이 능력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정일에게 다가갈 때 까지만 해도 없었던 느낌이었다. 시아가 다시 정일의 침대 옆에 앉아 정일의 눈을 보았다. 정일이 고개를 돌려 시아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정일의 모습에 정일의 부모, 기태와 연화가 시아를 잡아당기고 정일에게 다가갔다. 시아는 넘어질 뻔 했지만 커튼을 붙잡고 균형을 잡았다.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만 한 행동이었기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정일아, 정신이 돌아왔니? 우리가 누군지 알겠어?”

 “정일아, 엄마야! 괜찮아? 우리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려?”

 정일이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

 힘겹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정일이 말했다.

 “시아만 빼고, 다 나가줘요.”

 연화가 의아한 얼굴로 정일과 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알려진 정일과 시아의 관계는 동생의 친구, 혹은 친구의 동생일 뿐. 누구나 갖고 있는 관계라 할 수는 없지만 친한 사이라 하기에는 다소 애매했다. 아니, 애매하다는 말은 정말 크게 돌려 말한 것이고 둘이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알겠다.”

 기태가 의구심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

 “밖으로 나가면 휴게실이 있으니 우리는 거기서 기다릴까요? 시아야, 이야기 끝나면 나와라.”

 “네.”

 병실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시아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둘이서만 나눈다면 무슨 이야기일지는 명백했다. 시아는 완전히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그리고 정일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도록 정일에게 가까이 가 붙었다.

 “오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동아 오빠는요? 혜린이 언니는요? 수종 오빠랑 려경 언니는요? 아니, 일단 하고 싶은 말부터 말해요.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정일이 눈을 감았다. 시아의 말이 너무 빨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가장 중요한 마지막 세 문장의 해석에 성공한 정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아야.”

 “네, 오빠?”

 정일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고 입 안에서 무언가를 우물거렸다. 물리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추악한 무언가가 정일의 입 안에서 맴돌다가 마침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나야. 내가 모두를 죽였어.”

 

 

 *****

 

 

 정일은 땅에 쓰러졌다. 동아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려경이 쓰러진 정일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나뭇가지가 정일의 옆구리를 더 깊게 후볐다. 정일은 비명을 질렀다. 정일이 려경을 밀었다. 정일의 손에 닿지도 않은 려경은 수 미터를 날아가 나무에 등을 부딪쳤지만 아픔에 신음하면서도 진정하거나 정신을 차리는 대신 더 확신을 갖고 정일을 덮쳤다.

 “너였어. 네가 용오름이야. 그래서 너 때문에 우리가 여기 갇힌 거야! 널 죽이려는 함정에 우리가 다 걸린 거라고. 모르겠어? 그게 아니면 왜, 왜! 누가 우릴 죽인다고 이런 미친 짓을 하겠어?”

 려경이 정일의 목을 졸랐다. 정상적인 컨디션이라면 상대가 안 되는 미약한 살의였지만 옆구리에 박힌 나뭇가지와 동아에게 물린 팔의 통증이 집중을 방해했다.

 “살려줘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여기에 가둔 미친놈아. 나는 아무 상관없잖아! 살려줘! 제발 살려달라고! 얘만 죽으면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잖아!”

 려경이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려경아, 정신 차려! 지금 넌 제정신이 아니야.”

 정일이 간신히 짜낸 말은 려경의 근거 없는 믿음을 깨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닥쳐!”

 정일이 려경을 다시 밀어냈다. 이번에는 팔 힘만으로 밀어냈기에 려경은 바닥에 한 바퀴 구르고 금방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일이 자세를 잡고 려경을 밀어내기에는 충분한 빈틈이었다. 정일이 려경보다 먼저 일어나 려경을 향해 팔을 뻗었다. 려경이 허공을 날아 나무에 달라붙었다. 정일은 옆구리에 박힌 나뭇가지를 잡았다. 혹시 뽑을 수 있지 않을까 힘을 주었지만 나뭇가지는 정일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을 줬다. 정일이 나무에 기대고 섰다. 다행히 나뭇가지가 지혈대 역할도 공유하여 출혈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숨 쉬기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려경아. 정신이 돌아와?”

 려경은 나무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한 듯 흐느끼고 있었다. 팔다리를 포함한 모든 부위를 밀어내고 있었기에 팔을 들어 눈물을 닦는 것조차 할 수 없는 려경의 모습에 정일은 자신이 먼저 공격당했음에도 가해자가 된 듯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정일아.”

 려경이 고르지 못한 숨을 내뱉었다.

 “정일아, 제발. 너도 여기서 나갈 방법을 모르잖아. 나라도 살려줘. 그게 영웅 아니야? 어차피 우리를 이곳에 가둔 사람은 네가 죽을 때 까지 여기서 내보내주지 않을 거야. 바다에서 왔으니까 바다로 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려경아, 나는…….”

 정일이 한 손으로는 옆구리를,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었다. 짧은 순간 두통이 요통과 맞먹게 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던진 려경의 말을 연료삼아 두통이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어차피 넌 살인자잖아.”

 “뭐라고?”

 정일이 말했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 정일은 려경의 말이 환청이라고, 자신의 대답도 허상이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려경은 정일의 믿음을 깨부쉈다.

 “네가 동아를 죽였어. 어차피 슈퍼히어로는 불법으로 사람 죽이면서 존경받는 직업이잖아. 그러면 너보다는 내가 사는 편이 낫지 않아?”

 “너, 그게 대체 무슨…….”

 “왜? 나도 죽일 거야? 하긴, 동아 이전에 얼마나 많이 죽여 봤겠어. 안 그래? 이 살인자!”

 “그만 해.”

 정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려경을 묶어둔 힘이 사라졌다. 려경은 비틀거리며 땅에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려경의 손에는 주먹만 한 돌덩어리가 쥐여 있었다. 려경이 정일에게 다가갔다.

 “맞아, 넌 살인자야. 안 그래?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겠어? 물론 대부분은 죽어 마땅한 쓰레기일 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너는 죄 없이 누명을 쓴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 그리고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하겠지. 아니, 오히려 누명을 더 키울 지도 몰라. 슈퍼히어로는 한 번 실수하면 지금까지 눈감아 준 모든 활동이 한꺼번에 범죄의 화살이 될 테니깐. 한 번 실수를 정당화하고 나면 그 뒤에는 실수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더 위험한 짓도 저지르겠지. 너는 그런 놈이니까. 슈퍼히어로라는 것은 결국 기업의 돈을 받고 홍보하는 걸어다니는 광고판 아니면 살인자니까!”

 “그만 해!”

 정일이 려경에게 손을 뻗었다. 려경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려경은 한쪽 눈을 떴다. 정일이 옆구리를 쥐고 있던 반대 손으로 려경을 향해 뻗었던 손을 눌렀다. 옆구리에서 다시 한 번 불이 붙는 느낌에 정일은 바닥을 굴렀다. 려경이 다시 돌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정일에게 다가갔다.

 “그래, 그렇게 그냥 여기서 죽…….”

 정일은 폭발에 휘말렸다. 동아 때의 것과 같은, 그러나 조금 더 강한 충격이 정일의 몸을 날려 보냈다. 정일의 시야가 일곱 번 뒤집히고 나뭇가지가 여섯 번 더 깊게 파고든 뒤에야 정일은 날아가기를 멈췄다. 정일은 흙먼지에 눈을 뜨지 못하고 팔로 땅을 더듬어 몸을 일으켰다. 정일이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숨을 멈췄다. 함부로 움직이면 소리를 들은 려경이 다시 달려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지가 가라앉고 난 뒤에 정일은 그것이 헛된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려경아?”

 려경이 있던 자리에는 크레이터가 완성되어 있었다. 정일은 크레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려경이 빠져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정일은 그 밑바닥에 땅이 미처 삼키지 못한 붉은 피가 고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정일이 크레이터 밖으로 뛰쳐나와 구토했다.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진짜 내가 한 게 아닌가?’

 정일의 머릿속에 냉소적인 목소리가 정일을 깨웠다. 정일은 기억을 돌이켰다. 분노에, 공포에, 당황에, 절망에 가려진 감정의 조각 끝에 담겨있는 강한 살의가 다시 정일의 심장을 더럽혔다. 정일이 숲을 뛰쳐나왔다. 일직선으로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은 정일의 짐이 없는 다른 모래사장이었다. 역시 아무런 생명의 흔적도 없는 모래 위에 정일이 주저앉았다. 정일의 몸에 묻은 피가 모래를 흡수했다. 정일은 미쳐 버렸다. 정일은 옷 속에 모래를 담았다. 마른 편이었던 정일의 몸이 산타클로스처럼 풍만하게 변했다. 붉은 옷, 뚱뚱한 배. 정일은 웃었다. 인생의 마지막 웃음이 될 것처럼 웃고 난 정일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일은 서해안의 한 오징어잡이 배의 그물에 걸려 끌어올려졌다.

 

 

 *****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름 없는 섬이지만 이틀의 짧은 시간동안 죽은 나무의 숲이 있는 섬이라고 불린 그 땅은 이제 네 명의 시체만을 남겨놓고 다시 이름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섬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었기에 숲 중앙에서 수직의 틈이 생겨나 그 사이에서 한 마리의 늑대인간과, 한 명의 흡혈귀, 한 명의 흑마법사와,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기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존재하기를 충실하게 해냈다.

 푸른 죽음은 자신의 대검을 땅에 꽂고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일행을 향해서가 아니라 섬, 아울러 이 행성의 모든 것을 향해 바치는 기도였다.

 “언제나 우리를 위해 빛을 비추어 주시는 청월(靑月)이여. 당신의 명을 받들어 동족들을 이끌고 있는 그대의 종복이 잠시 당신에게 받은 검으로 이 땅을 돌이켜 보고자 하니 허락하여 주소서.”

 응답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시 후 푸른 죽음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눈에 보이는 은빛 검신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큰 검이지만 이를 둘러싼 늑대인간만이 소유한 투명한 금속은 전투에서 상대에게 검의 사거리를 파악할 수 없게 하는 역할과, 차원을 찢어 이동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푸른 죽음이 대검을 등에 걸치고 말했다.

 “자, 이제 만져도 좋다.”

 프렐라티가 기다렸다는 듯 손에 마력을 담아 가장 가까이 보이는 나무에 손바닥을 댔다. 평소에 마음껏 남용하는 생명력 흡수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프렐라티가 감탄했다.

 “진짜 전부 죽었네. 그런데 이렇게 살아있어 보이게 생겼다니 대단한 걸? 멸균의 행성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그렇다면 대륙으로 나가면 신선한 시체가 넘치겠네.”

 푸른 죽음은 프렐라티가 계획을 시행할 경우 프렐라티의 팔다리를 나누어 각 대륙에 전파해 더 쉽게 표본을 모을 수 있게 돕겠다고 말했고, 프렐라티는 그 마음은 고맙지만 그렇게 된다면 푸른 죽음의 호의를 갚을 방법이 없으니 표본은 그대로 두겠다고 대답했다. 이종(二種)의 언쟁을 듣던 데우스가 말했다.

 “푸른 죽음은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을 만끽하게 해주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지.”

 데우스의 말에 프렐라티가 푸른 죽음과의 말싸움을 일방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푸른 죽음은 불쾌했지만 데우스의 호의는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기에 언쟁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멸균의 행성이라 불리는 늑대인간들의 고향은 전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희귀한 행성 중 하나라 불릴 만 했다. 물론 우주 공간에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별은 드물지 않지만, 하나의 문명이 이루어질 정도로 왕성한 생명 활동을 했던 행성이 다시 플랑크톤 하나 살지 않는 철저한 무생물의 땅이 된 것은 데우스의 지식의 범주 안에서는 이곳이 유이(有二)했다. 프렐라티는 혹시라도 살아있는 생명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땅에 손을 짚었다. 프렐라티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흘러나와 섬을 잠식했다. 에르제베트가 깜짝 놀라 망토를 펼쳐 날아올랐고, 데우스는 에르제베트의 발목을 붙잡아 함께 허공에 떠올랐다. 에르제베트가 외쳤다.

 “야, 이 미친 독불장군아. 우리를 다 죽일 셈이냐!”

 프렐라티는 에르제베트를 올려다보았다. 프렐라티는 주먹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앗, 내 실수.”

 섬을 전부 삼킬 듯 잠식하던 마력이 순식간에 프렐라티의 몸으로 돌아왔다.

 “장난이지, 장난. 그 정도 범위 조절은 이미 3세기 전에 완숙했다고. 그리고 겸사겸사 시체 수습도 끝.”

 프렐라티가 품에서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자 사람의 다리뼈가 튀어나왔다. 프렐라티가 다시 다리뼈를 집어넣었다.

 “필요한 재료는 모두 모았다. 이제 돌아가도 돼.”

 “조금만 쉬었다가 가도록 하지. 푸른 죽음은 오랜만의 귀향이니까.”

 “젊은 왕이 늙어서 고향을 돌이켜본다. 그렇지만 고향에는 남은 건 죽음뿐이고. 슬픈 이야기네.”

 “남아있는 것이 죽음뿐임을 확인한 왕은 돌아볼 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과 함께 앞을 걸어갈 사람들을 책임지기 위해 현재에 더 집중하게 되겠지.”

 데우스가 푸른 죽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읊었다. 데우스의 말처럼 푸른 죽음은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무거워져 있었다. 푸른 죽음이 만족스럽게 성장하기를 기다리던 데우스가 말했다.

 “아, 프렐라티. 휴대폰 있지? 네 거 말고, 여기서 죽은 애들 거.”

 “왜? 탐나?”

 프렐라티가 품속에서 휴대폰 4개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주머니지만 사람 4명이 들어가고도 안을 가늠할 수 없는 넓은 크기였다. 데우스는 그 중 아무 장식 없는 검은 휴대폰 하나를 고른 뒤 나머지를 다시 프렐라티에게 돌려주었다.

 “그건 그 여자 거네. 마지막에 죽은 여자.”

 “응.”

 “왜 그것만 따로 챙기는 거지? 멍청한 여자의 멍청한 말이 신경 쓰였나?”

 “멍청한 말이 신경 쓰이냐고?”

 데우스가 에르제베트에게 되물었다. 에르제베트가 대답하지 않자 데우스가 실소하고 말했다.

 “이 여자는 선각자야.”

 “선각자라니, 그러면 진짜로 용오름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덮어씌울 거라는 말이야?”

 “그건 아니지. 용오름은 마지막까지 영웅으로 죽어야 해.”

 데우스는 피 묻은 휴대폰의 화면을 켰다. 학교를 배경으로 려경을 중심으로 정일, 동아, 수종, 혜린이 웃으며 찍은 사진이 바탕에 나타났다. 데우스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머지는 직접 생각해. 왜 저 여자가 선각자라고 한 건지. 우리는 이제 돌아가자. 푸른 죽음 부르자.”

 “알겠어.”

 프렐라티가 땅을 구르자 푸른 죽음의 발밑에 구멍이 생겼다. 하늘로 연결된 구멍에 떨어진 푸른 죽음이 프렐라티의 앞에 착지했다.

 “한 번만 더 예고 없이 이런 짓을 하면…….”

 “아마, 대륙에 팔다리 하나씩 보관되겠지. 자, 이제 가자.”

 프렐라티가 손을 휘저어 푸른 죽음의 말을 끊었다. 데우스가 말했다.

 “다음 목적지는 용인이다. 거기서 영웅이 되지 못할 쌍둥이를 만나러 가자.”

 “오, 용인(龍人) 쌍둥이라니 뭔가 아주 재밌어 지는 걸?”

 “방금 그 말이 농담이면 도저히 용인(容忍)할 수 없는 수준인 걸? 마법으로 유머감각은 어찌 못 하나?”

 푸른 죽음은 프렐라티와 에르제베트의 대화를 무시하고 대검을 뽑아 세로로 길게 허공에 그었다. 빈 공간에 푸른 죽음의 칼의 궤적에 맞춰져 흰 선이 그어졌다. 푸른 죽음이 선을 붙잡고 좌우로 길게 당기자 강원도의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죽음은 여전히 용인으로 다양한 말장난을 하는 프렐라티의 목을 움켜쥐고 공간 너머로 집어던졌다. 프렐라티가 비명을 지르며 산으로 떨어졌다.

 “잘 했어, 푸른 죽음.”

 “글쎄.”

 푸른 죽음은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구석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나오는 것 까지 숨기지는 못 했다.

 “놈은 예의가 조금 부족하기는 했다. 자, 빨리 안 가면 너희도 집어던진다.”

 “예, 폐하. 받들어 모십죠.”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공간을 넘어갔다. 데우스까지 완전히 공간을 넘어간 것을 확인한 푸른 죽음은 마지막으로 공간을 넘어간 뒤 선을 다시 합쳤다. 그렇게 멸균의 행성의 죽은 자의 숲이 있는 이름 모를 섬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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