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18! 내가 왜 형수야? 시집도 안 간 년에게. 어~~ 이 중요한 시점에 뭔 놈의 담이 와!’
당장이라도 ‘으악~~’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심정뿐이었지만 목이 돌아가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처지라 이빨만 갈고 있었다.
이놈! 수리와의 인연은 되돌릴 수 없는, 오도가도 못할 신세, 온 동네에 ‘우리 연애하오’라고 떠벌리듯 같이 다녔던, 얼마 되지도 않은 과거, 족쇄! 족보 같은 일기장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년에게 이런 족쇄는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정말로, 참말로 다행인 건, 문서 같은 일기장에 이름 한 점 없다. 과거 있는 여자로 전락해 가십거리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소문. 그 소문을 헛소문에 불과하게 만들어 준 놈. 당신의 속 깊은 배려가 눈물 겹도록 가상하다. 그런데 나는 어찌 나를 이렇게도 가련한 년으로 매도를 하고 있는가?
‘아! 어쩌다가 이런 처량한 신세’ 자책할 자격도 없구나. 아니 땐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나겠느냐?
그러나 순희는 직장에서 받은 서글픈 심정보다 더 큰 허무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이 와중에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런 메모장에 분노할 필요 없다. 일기장에 이름 한 점 안 올려줘 오히려 고맙다. 새끼야! 일기장이 증인이고 증거다. 너와 난 아무 사이도 아니다. 나에게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놈! 깔끔하게 손 털자. 마음은 이렇게 다져 놓고 순희 눈은 또 사진 첩으로 가서 사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 사진이 있으면 가져 가야겠다는 일념. 그런데 이상했다. 순희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눈물도 찔끔거리고 있었다.
“애야! 무슨 일인데 눈물까지 흘려?”
밉다. 서럽다. 놀림감이 됐다. 저 할망구가 더 밉다. 그래도 지금 당장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릴 사람이라고는 영악한 할망구뿐.
“어~~ 머~~님! 사람이 어쩜 이래요. 어떻게 제 사진도 없고 제 이름도 없어요. 사랑은 둘째치고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한 이유가 다 있었네요. 그 흔한 데이트 한번 가자는 말도 없더니.”
한번 터진 봇물이 술술 새 내고 있었지만 수리 어머니 귀에는 이 무슨 자다가 홍두깨 두드리는 소리야? 두드릴 년은 난데. 순희 똥 방지를 차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곧 다른 방법으로 실천을 했다.
“내 놔!”
어머니가 벌어진 손바닥을 순희 눈 밑에 갖다 댔다. 가까이 있으니 바로 보고 바로 묻는다.
“뭘요?”
“둘이 싸돌아 다니느라 쓴 돈. 전국 방방곡곡으로 안 가 본 데가 없다는 걸 내가 다 알고 있어. 그 돈 어미로써 받아야 할, 내게 할당된 분량이었어. 그걸 자네가 착복해 갔어. 내놔!”
순희는 펄쩍 뛰었다. 오리발을 사정없이 흔들어 댔다. 변명의 도를 넘어 증거 있냐며 추궁까지 시작했다.
“아니! 우리가 언제 싸돌아 다녔어요. 데이트 가자고 한적 단 한번도 없었단 말입니다. 어머님! 어떻게 없는 말을 지어내고 계세요. 증거 있어요?”
그때 수리 어머니 눈에서 불화살이 순희 눈에 꽂혔다.
“당연히 있지. 일기장 보여줘?”
뒤에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니의 크나큰 실언. Big Mistake. 자재하지 못한 흥분. 연세 탓. 아니다. 순희에게 기를 뺏겨서였다. 순희에게 반격의 기회만 준 셈. 때는 늦었다.
“아! 그건 제 실언! 같이 다니긴 했어도 좋아한다는 말 한번 안 했고요. 손도 한번 안 잡았어요. 그런데 어머니! 왜 남의 일기장을 보세요. 아무리 아들이지만 지켜야 할 지켜야죠. 남의 사생활을 몰래 보는 짓… 아니… 행동….어쨌던 둥 정말 나빠요. 어머님!”
그러나 수리 어머니는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부질없는 생각에 긴 시간을 소비하지도 않았다.
“야! 이 놈아! 네가 남이지. 어떻게 내가 남이냐?”
그 뒤로 순희가 눈물을 펑펑 흘리는 짓, 소박맞은 며느리, 그럴 자격이 없어 그럴 수도 없었지만, 그보다 더 급한 헤쳐가야 할 긴박한 현실. 애타게 발을 동동 굴리는 경호를 보자마자 정신을 번쩍 차린다.
“어머님! 급합니다. 빨리 사진 주세요. 2회전은 다음에 해요. 빨리 주세요.”
순희 눈뿐만 아니라 정신도 번쩍 뜨게 하는 말이 나왔다.
“좋아! 도둑놈 사진 필요하지?”
그냥 연륜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준 어머니의 예리한 통찰력. 순희는 겸허히 받아들이며, 이 또한 습득도 모방도 하려고 다짐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수그러져야 했다.
“예!”
직장에서 터득한대로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작에 말하지. 나도 그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난리냐? 수리가 도둑을 잡았어? 그럼 보상금만 받아오면 되는 거 아냐?”
그때 경호머리에 가장 먼저 번뜩인 건 다름아닌 계산이 밝은 근호였다. 피는 못 속이는 구나. 그 뒤로 헌혈 당하고 있구나. 두 집안의 영악한 피를 순희가 수혈 받는 중이라 경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그 사진을 줘야 받을 수 있습니다.”
순희 눈이 반짝 했다. 사진을 확인하고 세는 속도가 돈 세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그런데 세기만 했지 사진은 경호에게 건너지 않고 물었다.
“이 사진 복사해서 가져가면 안돼?”
“왜요?”
그때서야 수리 어머니 눈도 번쩍 했다.
“그래! 원본 가져갔다가 혹시라도 훼손되면 안되잖아. 애기 말대로 복사해 가거라.”
말문을 잃은 경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신발도 벗지 않고 무릎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어떻게 두 분이 똑 같습니까? 이리 줘보세요. 제가 골라 칼라로 복사해 가져 갈게요.”
순희 눈도 어머니 눈도 일심동체. 불안에 떠는 눈 밖에 없었다. 경호가 4949 탱크로리와 주변 풍경이 담긴 사진들을 빠르게 골라 한번 더 확인하고 방바닥에 데굴데굴 굴려 방문 밖으로 나가서 총알처럼 달려 갔다.
“야! 안돼!”
순희도 총알처럼 나가 신발을 급하게 들고 쫓아가다가 한 짝을 놓쳐 버렸다. 그 사이 경호 차는 벌써 출발해버렸다. 예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표정은 훤히 듣는 닭 쫓던 개가 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안순희 초롱초롱한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예비들의 혈맹이 시작되었다.
“애야! 절대 훼손되면 안 된다. 아무리 못 받아도 한 장에 20만원은 더 된다. 알았지?”
뛸 준비가 완료됐던 순희가 무장 해제 하고 미간도 찌그러지고 입술도 튀어나 온 채로 물었다.
“에게! 그것밖에 안돼요?”
“애가 지금 무슨 소리해. 방금 몇 장 가져 갔는지 알아? 100장은 더 가져 갔을 거다.”
“예? 꼴랑 탱크로리 한 대를 백장이나 찍었어요. 잉크 값도 안 나오겠다.”
오로지 실망뿐인 얼굴로 입술을 툭 내민 채 따라 갈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마루에 앉아버렸다. 그때 차 한대가 집 앞에서 섰다.
“애! 빨리! 빨리!”
어머니가 순희를 급하게 불렀다. 순희가 쪼르르 달려 왔다.
“왜요? 왜요? 저 분들 누구에요?”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사진부터 빨리 숨겨. 20 곱하기 백이 날아갈 판이야.”
영악의 무한대 단수. 순희 손이 방금 전 경호 손보다 더 빨리 200만원을 숨겼다.
“어머! 아가씨 예쁘다. 어머님! 누구에요?”
순희는 지금까지 수리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 철부지 외아들인 줄 알았다. 한번도 형제에 대해 말한 적도 없었고 ‘아차!’ 물어 보지도 않았다.
“어! 오빠 여자 친구! 안녕하세요. 저는 동생. 이분은 우리 새 언니. 그런데 오빠 능력 좋다. 지금까지 중 최곤데!”
사근사근 웃으며 부침성은 좋은 데 벌써 경계대상 1호. 오빠의 추악한 과거를 보자마자 바로 발설을 해버려. 그럼! 나도 같은 년으로.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 다음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형님이라 부를 분. 새 언니와 비슷한 연배 일 것 같았다. 공손히 인사부터 한다.
“안녕하세요. 안순희입니다.”
“예! 반가워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 가시죠. 차라도 한잔 하시죠.”
일단 안심. 새 언니와 비슷한 성격인 것 같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사진을 빨리 숨기려고 했을까? 아무래도 경계 대상 1호일 것 같아 다시 눈을 마주쳤다.
“저는 지수에요. 그리고 한 가지. 시누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저는 천하의 바람둥이 오빠를 아주 싫어해서 친정에 자주 오지 않아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호호호!!!”
헉! 네가 제일 무서웠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순희 진도가 너무 빨랐다. 그때 어머니가 순희 어깨를 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참! 새 아가! 이 아가씨 좀 태워다 줘라. 뭐가 그렇게 급한지 경호 그 놈이 혼자 내 빼버렸다.”
“엄마! 경호 그 놈도 왔다 갔어. 걔 보고 싶었는데. 언니!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순희는 어떻게 대답할 지 몰라 수리 어머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때였다.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안 들어도 훤하다. 뭐! 5년마다 했던 행사였는데 뭐!”
분위기가 사늘해졌다. 순희는 후회하고 있었다. 짐만 싸매고 갔어야 했는데 하필 그때 그 놈들이 덮쳐서 이게 뭔 꼴이람. 지금까지 중 최고란 말과 행사. 지수씨가 눈물 나도록 고맙기만 했지만 저 가벼운 입. 순희는 눈을 잠시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언니! 그만한 일에 쫄지 마세요. 약아 빠져서 대형 사고는 안 저지르니까 크게 걱정할 건 없어요.”
성격이 밝은지 영악한지 헷갈리게 하는 지수씨 차를 타고 경찰서로 가는 동안 수리에 대한 좋은 말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언니라고 한다. 그럼! 난 아가씨라고 해야 하나? 일단 우군부터.
그래도 귀를 솔깃하게 한 말을 했다. 사진관리였다. 결혼을 해야 예비 어머니와 예비 형님이 될 두 분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수리 사진을 빼돌려 판다고 했다. 번개 불에 콩 볶듯이 이 집안과 인연이 너무 빠르게 진행돼 순희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도중에도 ‘내 청춘은 끝났다’ 을 되뇌며 옆으로 힐끔, 입을 쳐다봤다. 소름이 쫙 끼쳤다. 어~~ 수다가 장난이 아니구나. 정말 끝났다. 나의 청춘! 만약에 이 집 가족이 되지 않으면 나는, 저 사람의 입 때문에 영영 시집은 포기해야 한다.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미래를 위해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하자. 휴대폰에 손이 갔다.
“아가씨! 잠깐만요. 전화 한 통화 할게요.”
“예! 그러세요!”
제가 하는 말 절대 비밀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 말도 전세계에 퍼질 것 같아 순희는 입을 다물고 공장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사 송영석차장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공장장이 해결을 위해 불을 끄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가씨! 죄송한데 다시 집으로 좀 가 주실래요. 사진 몇 장을 더 가져 와야겠어요. 본사에 지금 보내 줘야 해서요.”
순희가 추정했던 지수씨가 아니었다. 아무 말없이 집으로 가서 옆에서 사진을 같이 찾아주면서 구겨서 버려 놓은듯한 이면지를 꺼내 차에 올랐다. 일체 이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