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우리가 맞았네~ 지민이더라"
"진짜? 지민이 진짜 괜찮은데, 애가 밝고 인사도 잘 하고...“
"그러니까, 어쩌다 수빈이 같은 새끼랑 사귀지?“
수빈 오빠가 좀 허세가 심하긴 해도 사람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라고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가 찬 주제에 이제 와서
두둔하는 것도 웃겨서 그냥 맞장구 쳤다. 솔직히 지민이가 아까운 건 사실이니까
"지민이는 나랑 수빈 오빠 사귀었던 거 알지 않나?"
"알지.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었잖아 서민준 토한 날도 있었고"
"아! 맞다 그랬지 나 앉아서 토하는 사람 처음 봤어. 더러워서 진짜..."
"네가 술을 거지 같이 먹이니까 그렇지 누가 막걸리에 소주를 붓냐?"
"난 진짜 맛있어질 줄 알았다니까?"
"내가 다음에 제조 해줄게"
"아..냐, 안 먹어봐도 될 것 같아 윽 사람 많네"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수업 교재 제본을 찾으러 후문 앞에 있는 인쇄소에 들렀다.
"사람은 많은데 주인아저씨는 왜 안 계시지?"
"잠깐 기다릴까?"
아영인 빈 자리에 앉았고 나는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려고 일회용 종이컵을 뽑고 있었다.
그 때, 딸랑 하며 문이 열리더니 지민이와... 수빈 오빠가 들어온다.
와씨.. 물마시고 있었으면 백 퍼 뿜었겠다.. 1학년 때 헤어졌으니까.. 2년 다 되어가네
그 동안 학교에서 한 번도 못 봤는데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아.. 이나야 안녕"
"어.. 어.. 오빠 안녕 오랜만이네"
먼저 건넨 수빈 오빠의 인사에 나도 엉겁결에 인사를 했다. 생각도 안 하고 살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마주치게 되니 옛 생각이 나는 것도 같고 기분이 이상했다.
"안녕하세요~"
지민이가 나와 아영이에게 인사한다. 들어올 때부터 잡고 있던 수빈 오빠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뭔가 나를 의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과민반응일까..?
"안녕~ 지민이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선배"
아영이 그 둘에게 인사를 하고, 정적이 흐른다.
"오빠 얘기 들었어~ 하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둘이 너무 꼭 붙어 있는 거 아냐?"
뭔가 굳어 있는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농담을 던졌는데, 분위기가 더 얼어붙는다.
수빈 오빠는 지민의 손을 슬쩍 놓으며 말했다.
"에이 뭘, 이나 너는 잘 지내지?"
"응.. 나야 뭐.. 잘 지내야지.. 아, 나 그만 가 볼게~"
마침 주인아저씨가 들어 와서 얼른 제본을 찾아서 나왔다.
가게에서 멀어지자 나는 한숨 돌리며 말했다.
"와.. 어떻게 그렇게 딱 마주치냐? 어디 피할 데도 없는 만남 이었어..."
"쏭 너 원래 박수빈한테 반말 했었나?"
"사귈 때는 뭐, 섞어 쓰기도 했는데 반말이 더 많았을걸?
아! 이제 헤어졌으니까 존댓말 썼어야 했나??“
“너 반말해서 식겁했다”
“오늘은 나도 당황해서 어쩌다 보니.."
"뭐 어때~ 우리 이제 동아리도 안 나가는데 뭘, 지가 선배인가“
"그렇겠지~? 아, 진 빠진다..."
재혁이도 군대에 있고, 민준이도 연락 안 하니까 뭔가 긴장이 풀어졌나보다.
다시 매의 눈을 가동시키면서 다녀야지... 으으 어색한 거 진짜 싫다.
.
.
"생일인데 네가 쏘는 거지?"
"아 뭐래 김상현 꺼져"
23살 생일, 상현, 아영이와 함께 또 깡통포차에 와서 앉았다.
"나 여기 1학년 생일 때 왔었는데... 왜 내 생일마다 여기 오는 거 같지..?"
"우연이야 우연~ 신 메뉴 나왔대 우리 이거 먹어 볼까?"
아영이 메뉴 판을 보면서 말했다.
"강아영 네가 고른 거지 술집..?"
"내.. 내가 왜..?"
예리한 눈초리로 지적하자, 아영이 당황한다.
"너 꿀 맥주 좋아하잖아! 꿀 맥주는 학교에서 여기 밖에 안 팔고"
"에이~ 쏭 너도 좋아하잖아 사장님~ 여기 일단 꿀맥 3개요"
"윽 난 단 거 싫은데, 난 그냥 맥주 마시면 안 돼?“
상현이 으웩하는 표정을 짓는다.
"김상현 너 꿀 맥주 안 먹어 봤지? 진짜 맛있어, 일단 먹어 봐"
"그래? 그럼 뭐 한 잔 정도는 특별히 먹어 줄까, 수연이는?"
아영이가 맛있다니까 바로 순순히 먹겠다고 하는 거 봐라~ 으이그 속 보인다
"좀 이따 온대. 10시쯤? 너무 늦어서 우리끼리 먼저 먹고 있는다고 했어 짜잔~ 이것 봐라"
나는 아까 지혜에게 받은 치즈케이크를 꺼냈다.
"오 뭐야?"
"아~ 아까 지혜가 준 거구나. 그러고 보니 지혜도 오라고 하지"
"힝.. 불렀는데, 지혜 오늘 집에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한대.. 대신 얘 불렀잖아"
"뭐야 나 땜빵이야? 너무 한다 너네"
상현이 삐진 척 말한다.
"에이 땜빵이라니 정식으로 초대한 거지~ 김상현 넌 내 불ㅇ... 아냐 차마 말 못하겠다"
"저, 저! 저 계집애 저거 음란 마귀 저거, 너 신고할 거야"
"야 음란 마귀는 네 마음속에 있는 거지~ 나 안주 나오기 전에 화장실 갔다 와야겠다.
여기 화장실 밖으로 나가야 하나?"
"응 계단 내려가야 될 걸~ 같이 가 줄까?"
"아냐 괜찮아 금방 갔다 올게~ 먼저 먹지마라~!"
.
화장실에 갔다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려고 계단을 오르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내려온다.
...도영 오빠와 수빈 오빠다.
아오씨...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친담. 어색하게,
나는 대충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가려는데 도영 오빠가 나를 부른다.
"야 송이나"
"..네?"
"잠깐 얘기 좀 하자?"
나는 그 둘을 따라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건물 뒤편으로 자리를 옮긴 도영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낸다.
“야, 너 저번에 수빈이한테 반말 했다며?”
“네..?"
갑작스런 반말 얘기에 당황했다.
"너 저번에 얘네 봤다며~ 지민이하고 있을 때~
어디서 건방지게 선배한테 반말이나 찍찍해 대고 지랄이야"
"어.."
아니 무슨.. 그.. 아니, 반말을 한 건 맞는데, 이게 이유라고 대고 있나 싶어서 말문이 막혔다.
"씨발 위 아래도 없냐 너는? 이제 동아리 안 나온다고 막 나가네 이 년이,
너 지민이한테도 깝쳤다며?"
"야 살살해~"
수빈 오빠는 옆에서 담배를 피며 킥킥 웃고 있었다.
"네가 뭐라고 지민이한테까지 지랄이야~ 지랄이. 아오 이걸 확 그냥!
너 내가 예전에 수빈이랑 헤어졌을 때 손봐주려다가 수빈이가 하지 말래서
참았어. 알아? 미친년 냅두니까 계속 지랄이네 이거“
저번에 인쇄소에서 반말 한 것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건가..?
그 때 농담 삼아 한 마디 던진 걸로 이 새끼들이 지금 이 지랄을 하는 건가...
황당해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봤다.
건물 뒤편은 가로등도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왜 따라 나왔지 아오.
"..아니, 내가 수빈 오빠 반말을 하든 말든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 요"
사고회로가 멈춘 머리가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씨발년아, 눈 안 까냐?"
와..씨 뭐..? 나 오늘 생일인데 겁나 어이없네.
"상황 제대로 알고 말하세요. 수빈 오빠가 먼저 인사 하길래, 저도 그냥 얼떨결에
인사 한 거고, 지민이한테 깝을 치다뇨~ 오랜만에 본 후배한테 농담도 못 해요?“
"네가 뭔데?"
"네..?"
"네가 뭔데 수빈이한테 인사를 했네, 농담을 했네. 지랄이냐고"
"그러는 오빠는 뭔데 지금 저한테 이러시는데요?"
"이 년이 미쳤나"
도영 오빠가 손을 번쩍 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지금 뭐 하십니까?"
어..? 얘... 누구..였지?
"여자 하나 두고 뭐 하시는 거냐고요"
얼굴이 낯익은 그가 도영 오빠의 손을 막으면서 말했다.
"넌 뭔데?"
"그건 알 거 없으시고요"
아 생각났다. 그.. 민준이네 과 동기 같은데, 예전에 같이 있었던 거 기억났다.
"쏭!!!!!!"
"어.. 아영아.."
"뭐야? 화장실 간 애가 하도 안 와서 나와 봤더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이게 다 뭐야?“
아영이는 건물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 보더니 금방 상황 파악이 끝난 것 같았다.
“너네 씨발 지금 내 친구 건드렸냐?? 딱 기다려라”
아, 우리 아영이 으리으리 의리 파였지 참.. 너네 죽었다 이제
"이.. 이것들이 쌍으로 돌았냐…"
도영 오빠의 입은 여전히 험했지만,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좀 당황한 것 같았다.
뛰어 내려온 아영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고, 덕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까 나 혼자 있을 때는 금방이라도 때릴 듯이
손까지 들더니, 아영이 쏘아붙이기 시작하자 조금 주춤한 느낌이다.
"강아영 너도 지금 이러는 거 하극상 이야 알아?"
"네가 내 선배냐? 하극상이게? 씨발 남자새끼 둘이서 여자애 불러 놓고 뭐 하는 거야!!!"
도영 오빠한테 밀리지 않고 아영이 대드는데, 뒤이어 달려 온 상현이 두 사람을 말린다.
"야.. 야.. 아영아 참아, 참아 봐. 도영이 형, 좀 진정하세요"
상현이 아영이를 감싸면서 자기 뒤 쪽으로 보낸다.
"어디 앉아서 얘기합시다 예? 아영아 너도 릴렉스"
상현인 그 쪽에 있는 무리들을 정리해서 편의점 쪽으로 갔다.
나랑 아는 사이라고 생각 했는지 민준이 친구한테 나를 부탁한다고 하고 말이다.
얘 이름 잘 기억 안 나는데...
사람들이 빠지고 긴장이 풀리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후.. 바닥에 쭈그리고 앉으니 아까 날 구해준 아무개 씨가 괜찮냐고 묻는다.
"누나 괜찮아요?"
"어.. 고마워.. 너.. 민준이 친구지?"
"네 지나가다가 뭔가 낯이 익길래... 제가 끼면 안 되는 상황이었나요?"
"아냐 도와줘서 고마워.. 너 이름이.. 김..."
"김균상이요"
"아.. 맞다 그랬지 참.. 후..."
"괜찮으세요? 어디 있다 나오셨어요?"
"나.. 깡통포차에.. 거기 가방 하고 다 있는데.."
"가세요. 바래다줄게요"
균상이는 나를 다시 포차에 데려다 주고 떠났다.
테이블에는 치즈케이크에 초가 이상한 방향으로 이리저리 꺾여서 꽂혀 있었다.
저거 분명 김상현 작품이겠지.. 하하..
금방 들어올 줄 알고 휴대폰도 안 가지고 나갔는데,
확인하니 재혁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아.. 짜증나... 별 거지같은 것들 때문에 재혁이 전화도 못 받고...
수빈 오ㅃ.. 아니 무슨 오빠야, 박수빈 개새끼는 아무리 헤어졌대도
지 친구가 자기 전 여친한테 지랄하는데 옆에서 실실 웃기나 하고
와... 설마 자기가 시킨 거 아냐? 도영이 그 새끼는 뭐 쫄따구야? 참나...
아니, 인사는 지가 먼저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지랄이야. 진짜 찌질하네, 개새끼...
심지어 그 와중에 날 도와준 사람은 민준이 친구다.
엉망진창이네.. 진짜 최악의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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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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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상현이 좀 멋있었어. 애가 키가 커서 그런 지, 좀 듬직하더라니까?
이나 너 술집으로 들어가고, 나랑 상현이랑 편의점 앞에서 얘기 하는데 애가 평상시에
좀 느슨한 타입이잖아. 완전 논리적으로 얘기하더라"
"아 진짜? 의외네 김상현 어버버 거리지 않았어?"
"아니야~ 완전 남자다웠음. 그 때 처음으로 걔를 남자로 느꼈던 것 같긴 해, 뭐 시키지?"
아영이 오늘도 메뉴 판을 뒤적거리며 말한다.
"난 네가 더 대단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미친년처럼 대들 수가 있냐? 남자 둘한테"
"야.. 나도 솔직히 무서웠지, 근데 너한테 손 올리는 걸 봤는데 나도 제 정신이 아니었어"
"봤어?"
"어. 너 하도 안 와서 찾으러 나갔다가 창문으로 밖에 보다 깜짝 놀랐잖아“
"진짜 그 때 균상이가 막아줬으니 다행이야.."
아영이 균상이를 기특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켜, 오늘 내가 살게"
나는 균상을 바라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에비마요"
균상은 메뉴판을 신중히 보더니 하나를 골랐다.
한참 뒤 직원이 안주를 들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균상이 기대하며 젓가락을 든다.
근데... 아까 균상의 말을 아무도 못 들은 것 같다..
테이블에 놓인 건 딸기망고화채
"젠장..."
균상의 나지막한 한 마디가 술집에 맴돈다.
"에비마요 먹고 싶다고!!"
"아까 우리 비슷한 거 먹었잖아. 겹쳐. 상큼하게 화채 먹자 에비마요 느끼해"
아영이 앞 접시를 하나씩 나눠 주며 균상의 의견을 상큼하게 무시한다.
"앜 김균상 완전 웃기넼 크크"
"먹고 싶은 거 시키라며!!"
"에비마요 먹고 싶어? 다음에 먹자~ 나중에 톡으로 에비마요, 에비마요, 에비마요
이렇게 세 번 써서 보내면 내가 신호로 알아듣고 사줄게"
"진짜다?"
"응 진짜"
이상한 인연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나와 술 한잔 기울이고 있는 건 균상이니까 말이다.
그 때 그 사건 이후로 균상이와는 어찌어찌 계속 연락이 이어져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다.
이 사람과는 평생 가겠지 하는 마음이 든 사람과의 인연이 어느 날 갑자기 뚝 끊기기도 하고,
전혀 연결 고리가 없이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 나중에는 내 곁에 남아 있기도 하다.
인연의 또 다른 신기한 점은 같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게 기억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나를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내가 먼저 손을 놓긴 했지만, 나는 그를 첫 연애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기억했는데,
상대방은 아니었나 보다. 하긴, 나를 좋게 기억 할 리가 없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닿지 않는 인연을 억지로 이으려고 하지 않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를 받기에는 내가 너무 소중하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의 인연의 끈을 미련 없이 놓을 수 있다.
물론 조금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나는 지금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니까,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에게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