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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왕비님의 알바일지
작가 : 박티티
작품등록일 : 2018.12.7

만년 배우 지망생 희우는 오늘도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낙담한다. 그러던 와중 왕비역을 구한다는 알바 공고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하는데, 뭐? 진짜 마왕이 왕비를 구하는 거였다고? 1년의 계약기간동안 마왕성에서 벌어지는 왕비님의 흔한 알바일지

 
#12-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작성일 : 18-12-23 00:37     조회 : 206     추천 : 0     분량 : 4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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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방에 딸린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희우의 표정이 어색하다. 소매가 넓은 셔츠와 베이지색을 띤 긴 가죽 조끼, 붉은색이 감도는 바지와 무릎까지 오는 갈색 부츠. 평소에 인간계에서 입던 옷과는 그 모양이 완전히 다른 탓에 마계에 처음 와서 드레스를 입었을 때만큼이나 낯선 기분이다. 그러고보니 바지를 입어본게 얼마만이더라? 하지만 신기하게도 옷은 미리 사이즈를 재고 맞춘 것처럼 몸에 꼭 맞았고, 또한 간만에 무거운 치맛자락에서 해방되었더니 홀가분하기도 하다. 디노는 희우의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역시 내 눈은 정확하다니까. 딱 맞죠?"

 "그러게요..."

 ​

 어찌된 영문인지 옷뿐만 아니라 신발 사이즈까지 정확하다. 서랍장에 기대어 있던 디노는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팔짱을 풀고 자리에 똑바로 선다.

 

 "그럼 어디 가볼까."

 

 카펫 위 널찍한 공간에 선 디노가 무어라 나직히 중얼거리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에 원을 그린다. 그러자 그의 손 끝을 따라 공간에 틈이 벌어지더니 곧 거기에 동그란 구멍이 생겼다. 사람 머리 정도 크기의 구멍은 디노가 가볍게 손바닥을 펴는 모션을 취하자 불쑥 자라나서 사람도 문제없이 드나들만큼 커진다. 구멍의 건너편은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보니 나무가 무성한 숲 속 같았다. 디노가 먼저 그 안으로 발을 들이며 희우에게 손을 내민다.

 

 "자, 손 잡아요."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하라는대로 디노의 손을 잡아본다. 그리고 희우의 몸이 완전히 그 구멍을 넘어갔을때, 방금 전 느껴지던 실내의 아늑한 공기 대신에 차갑고 눅눅한 습기가 살갗을 건드린다. 우거진 나무 틈 사이로 달빛이 슬쩍슬쩍 새어들어오지만 주변은 매우 어두웠고 풀벌레 소리도 하나 없는 탓에 을씨년스러운 기분마저 들 것 같다. 희우는 앞뒤마저 분간하기 어려운 숲이 무서웠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

 디노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작은 횃불같은 것이 나타나 주위를 밝힌다. 그는 희우를 돌아보며 신신당부를 한다.

 ​

 "길을 잃으면 큰일나니까 바짝 붙어서 따라와요. 그리고 발 밑 조심하고."

 ​

 희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디노를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불꽃 덕분에 어느 정도 주변은 볼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길이 나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에 드레스를 입고 왔다면 걷기는 커녕 한발자국도 못 뗐을거란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덧 희우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자 디노가 물었다.

 ​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

 동서남북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컴컴한 숲을 헤쳐나가려니, 사실 힘든것보다는 막연함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디노는 희우를 안심시키려는듯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

 "사실 이렇게 이런 한밤중에 숲을 다니는건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알로시네는 밤에 활동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아..."

 "거기다가 외부인을 좋아하지 않아서 알로시네를 만나기란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나랑 있으면 괜찮을거에요. 그들은 날 좋아하니까... 아, 다왔다."

 

 땅 위로 튀어나올만큼 두꺼운 나무뿌리를 하나 넘었더니 곧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난다. 겨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앞을 살펴보니 거기에는 작은 호수같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호수라기에는 작고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큰 모호한 크기의 물웅덩이였다. 디노는 물가에 서서 소리친다.

 ​

 "이봐! 나 왔어!"

 ​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하나도 없다. 아마 알로시네를 부르는 거겠지만 민망할 정도로 아무런 반응도, 기처곧 없어서 희우는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다.

 ​

 "체로니! 나 왔다니까?"

 ​

 그래도 역시나 숲은 잠잠하다. 디노는 쳇하고 혀를 차더니 불만스럽게 중얼거린다.

 ​

 "어쩔 수 없네. 이봐, 할망구! 나 왔다고! 나이 들더니 이제 귀도 먹었어?"

 ​

 그러나 역시 묵묵부답에 오리무중이다. 희우는 그저 옆에서 듣는것만으로도 머쓱해져서 한마디 하고 말았다.

 ​

 "누굴 부르는거에요? 여긴 아무도 없..."

 ​

 그 때 갑자기 앞에 있던 늪이 부글거리기 시작한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물 한가운데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공기방울이 점점 격렬하게 들썩이다가 곧 수면 위로 둥글고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솟아오른다. 희우는 그것이 왠 여자의 나신임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긴 은색 머리카락은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반짝거렸고, 새하얀 피부는 병자처럼 보일 정도로 창백하다. 희우는 가감없이 상체를 드러낸 그녀의 모습을 보고 민망한듯 시선을 돌리지만 막상 디노는 전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

 "방금 할망구라고 씨부린게 누구니...?"

 ​

 차분하게 들리지만 적잖이 화가 났음이 엿보이는 목소리가 꽤나 무섭다. 희우가 슬쩍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여자는 붕대인지 천인지 모를 무언가로 눈이 칭칭감겨 있었다. 앞을 못보는건가?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디노가 답한다.

 ​

 "안녕, 체로니. 오랜만이야."

 "...디노리스?"

 ​

 디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체로니라 불린 여자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더니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희우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체로니의 모습에 움찔거렸지만, 막상 그녀의 하반신이 드러나자 눈이 튀어나올듯한 얼굴을 한다. 체로니는 상반신은 여자의 모습이었지만, 허리 아래로는 뭉툭한 두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몸통과 8개의 다리가 뻗어있는 거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로 거미를 닮은 마물 알로시네였다.

 ​

 "네가 여긴 어쩐일이지?"

 "물어볼게 있어서. 방패에 문제가 생겼어."

 "방패에 문제가 생겼다...?"

 ​

 디노가 용건을 말했지만 체로니의 반응은 왠지 뜨뜻미지근하다. 그녀는 뭔가 내키지 않는듯 디노를 지켜보더니-눈이 보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듯 입가를 굳힌다. 희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체로니의 얼굴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힉하는 소리를 꿀꺽 삼켰다.

 ​

 "처음 맡는 냄새가 나는데? 누구니, 이건?"

 "내 반려, 채희우라고 해."

 "네 반려라고...?"

 ​

 체로니는 또 한번 놀라고는 아예 희우의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갸웃거린다. 희우는 체로니가 무서웠는지 옴짝달싹 못한채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한참동안 희우의 냄새를 맡던 체로니는 탐색을 마치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

 "이런 냄새는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어..."

 "그렇겠지. 인간이니까."

 "인간..."

 ​

 또 한번 놀란 체로니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지더니 길고 뻣뻣하게 다물린다. 체로니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다.

 ​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인간을 반려로 맞았다더니..."​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났다고? 거 참 빠르기도 하네."

 ​

 디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지만 희우는 어째선지 자꾸만 불안해진다. 그것은 그저 낯선 것에서 느껴지는 불안감과는 조금 달랐다. 희우는 알로시네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체로니에게서는 드러내지 않은 경계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희우가 저도 모르게 꿀꺽 군침을 삼킨다.

 ​

 "디노리스..."

 ​

 체로니가 하얗게 빛나는 상체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뒤로 물러난다. 그때서야 디노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살짝 눈썹을 찌푸린다.

 ​

 "체로니, 오늘 좀 이상하다? 무슨 일 있었어?"

 "이상하다라..."

 ​

 그녀가 디노의 말을 수상한 말투로 곱씹던 그 때, 갑자기 늪에서 기포가 솟아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방금 전 체로니가 나타날 때와 비슷한 모양으로 부글부글 피어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얼굴의 어린아이가 늪 속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희우는 그 아이가 어린 알로시네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윽고 그 옆에서 또 하나의 어린 아이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옆에서 또 하나, 뒤에서 또 하나, 앞에서 하나가 더. 마치 비가 오면 지렁이들이 머리를 내미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어린 알로시네들은 곧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이윽고 늪을 꽉 채울 정도로 불어났다. 물 위에 작은 머리들이 떠있는 모습은 굉장히 기묘했고, 또한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차갑기만 하다. 희우는 그 기괴한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

 "지금 뭐하는거야?"

 ​

 디노의 목소리가 한 층 높아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체로니는 어느덧 그 둘에게서 멀어져 있었고, 어린 거미들이 그녀를 향해 슬금슬금 뭍으로 다가온다.

 

 "체로니?"

 "실망이다, 디노리스. 귀여워해줬더니 이제와서 우리를 배신해?"

 "배신? 갑자기 그게 무슨..."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

 디노와 희우는 체로니가 왜 화를 내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눈 앞의 알로시네들은 두 사람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알로시네들의 눈이 붉게 빛나고, 그들의 어미가 붉은 혀로 제 입술을 적신다. 체로니가 살포시 지시한다.

 ​

 "아이들아. 저이들의 뼈 한조각 남기지 말고 먹어 치우려무나."

 ​

 체로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로시네들이 무섭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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