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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망했다.."
혼이 빠진 지혜가 중얼거린다.
"내 말이.. 왜 찍어 준 거에서 하나도 안 나오냐고요.. 교수님.."
"그래도 이제 시험 다 끝났다아~!!"
지혜와 같이 듣는 전공 수업의 기말고사를 마지막으로 1학기가 끝났다.
생과일주스를 하나씩 마시며 후문으로 가는 길에 문득 저번 일이 생각나서 물었다.
"맞다 지혜 너 윤 교수님은?"
안 그래도 시험 때문에 어두웠던 지혜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진다.
"그냥.. 그래, 따로 연락은 안 하고, 수업은 계속 있으니까 강의실에서 마주치는 정도“
“그냥 교수님하고 학생 사이...? 넌 괜찮아?”
“아직 마음이 쓰리긴 한데.. 저번에 많이 울어서 좀 털어진 것 같아”
"흠.. 여러모로 너 좀 대단한 듯“
"어디다 소문이나 내지마"
"걱정 마~ 말 할 사람도 없어~ 넌 방학 때 뭐 할 거야?"
"나 그냥 알바 하려고, 쏭 너는 뭐 할 건데?"
마침 게시판 앞을 지나가던 차에 던져진 지혜의 질문에 나는 멈춰 서서 포스터를 찾았다.
"여기 있을 텐데.. 아 찾았다! 나 이거!"
"이게 뭔데?"
★경영학과 취업 문 뽀개기 스터디 모집!!!★
"취뽀 스터디... 여기 스터디 이름이 좀 구린데?"
"귀엽지 않아? 멍멍이 같기도 하고, 우리 과에 로하 언니랑 윤재 오빠 알지?
그 선배들이 만든 스터디래. 이번에 나랑 아영이랑 같이 하기로 했지롱“
나는 취업스터디에 들어간 게 스스로 뿌듯해서 으스대며 말했다.
"아, 이로하 언니? 나 그 언니랑 같이 교양 들은 적 있어. 그 언니 우리 과 수석이잖아.
아마 이번 방학 때 하계 인턴도 나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웬일로 너희를 껴 줬지?"
"진짜 열심히 하겠다고 내가 졸졸 따라 다녔거든..."
"하긴.. 쏭 너도 이제 슬슬 준비가 필요할 때다. 졸업하면 뭐 할 거야?"
"나 아직 3학년인데.. 그런 질문은 넣어둬.."
"시간 금방이다? 보통 4학년 때 취업하는 사람도 있잖아. 그럼 방학 때 학교? 수연이는?“
우리는 다시 후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이었다.
"방학 때 집에 들어가야 한대. 은근히 부모님이 엄한 가봐"
"걔 하고 다니는 거 보면 안 그럴 것 같은데... 나는 알바“
“오~ 무슨 알바?”
"나 원래 알바 하는 곳이 있거든, 거기 사장님이 나 좋게 보셔서,
항상 방학 때마다 가서 일해. 아마 이번에도 거기서 일할 듯"
"어디 이상한 데는 아니지?"
"아니거든 그냥 동네에 있는 카페야, 이 언니가 또 한 커피 한다“
"어? 뭔가 어울려! 너 바리스타 자격증 같은 거 따 봐"
"커피 재미있긴 한데~ 그래도 그건 취미로 해야지. 난 재무 쪽으로 가고 싶어“
“너 은근히 꼼꼼해서 재무 잘 맞을 것 같아”
“나한테 잘 맞는지 알기조차 어려워서 문제지... 일자리나 있으려나...”
“넌 그래도 가능성 있잖아~ 힝.. 난 졸업하고 뭐 하지..."
"걱정 마~ 어디 가서 굶어 죽겠어? 이번에 스터디 가서 로하 언니한테 많이 배워~"
“그래야겠다. 일단 토익을 해야 하나..."
해가 뜨거워진 여름 날, 우리는 주스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서서 수다를 떨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지혜를 배웅 해 주고, 나도 자취방으로 향했다.
여름방학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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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반갑다~ 난 ‘이로하’고, 이쪽은 ‘한윤재’“
"잘 해 보자"
로하 언니 옆에서 꾸벅 인사하는 한윤재 선배는 저번에 조별과제를 같이 해서 안면은 있었다.
그 때는 조장오빠라고 불렀는데, 주변 사람들을 잘 이끌었던 타입인 걸로 기억한다.
"어차피 다 같이 공부하는 모임이라 필요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누군가는 주도해서 연락도 돌리고 해야 하니까 윤재가 회장 맡아주기로 했어.
다들 괜찮지?"
"네~~!"
뭔가 말 잘 듣는 어린이가 된 느낌이다.
"나는 이번에 S그룹 인턴 나가게 돼서, 스터디 자주 나오긴 힘들 수도 있는데,
S그룹 목표로 하는 후배들 도와주려고 만든 그룹이니까,
여기 회계 쪽 관심 있는 사람은 나한테 개별적으로 물어 봐"
와... S그룹, 아 근데 회계 나 못 하는데...
"일단 토익 점수 올리는 게 중요한데, 이번 달 토익은 패스하고,
우리는 7월 30일하고, 8월 13일을 목표로 하자. 다들 지금 토익 점수가 어떻게 돼?
참고로 로하는 980점이다. 나도 아직 800점대라 좀 부족해"
우와아.. 로하 언니 대단하다... 윤재 오빠도 공부 잘 하네..
"저는 가장 최근에 본 게 790점이요"
"오, 아영인 나쁘지 않네. 그럼 7월에 850점을 목표로 해 보자"
강아영... 언제부터 저렇게... 배신자....
"이나는? 토익 몇 점이야?"
"네? 저요? 저.. 저는 아직 토익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럼 내가 수준 테스트 할 수 있는 모의고사 줄 테니까, 다음 시간에 해 올래? 자 여기"
"네..."
윤재 오빠는 내 대답에 조금 당황하며 USB를 하나 건네줬다.
여태 토익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라는 눈빛이었다.
"필요 없을 줄 알고, 따로 출력은 안 해 왔는데, USB 꽂으면 바로 뜨니까 찾기 쉬울 거야.
아, 일단 이거 공부 해 볼래? 기초라서 나는 필요 없어"
내 손에 들려진 책은 하늘색 표지의 해커스 토익 스타트다.
앞에 10장만 너덜거리고 뒤는 새 책이라는...
나도 이거 집에 있는데, 차마 가지고 있다고는 말 못하고 얌전히 받았다.
영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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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아영아...나 공부하기 싫어어... 내가 이걸 왜 하겠다고 했지?"
스터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안 그래도 더워서 기운 안 나는데
해커스가 들은 가방이 무거워서 더 진이 빠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윤재 선배가 이것저것 챙겨주더라. 넌 왜 여태 토익을 안 봤어?"
"나 사실 영어 진짜 못 한단 말이야.. 아영이 넌 목표가 어디야?"
"나 사실 하고 싶은 거 없어"
"왜? 어디 들어가려고 토익 따 놓은 거 아냐?"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그냥 해 놓는 거야. 언젠가 필요할까 싶어서, 딱히 꿈이 없다~"
"흐음... 나는 마케팅 쪽이 재미있던데.. 어? 야 쟤 김상현 아냐?"
멀리서 본관 앞을 지나가는 상현이 보였다.
"그러게, 저 기럭지로 저렇게 허우적대면서 걷는 건 김상현뿐이지..."
"야아~~~! 기임~ 사앙~ 혀어언~~!!"
방학이라 텅텅 빈 학교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치니 반가웠다.
조용한 교내에 매미 소리와 함께 내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상현이 좀 부끄러워하는 눈치다.
"야~~!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반가운 마음에 나는 상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 1학년 때 F 나온 거 있어서 재수강하느라...“
“군대 가기 전에 그렇게 술을 퍼 마시더니....”
“이제 정신 차렸다~~ 송이나 넌 학교에 있으면서 나한테 연락도 안 했냐?"
"난 당연히 너 없을 줄 알았지"
"군대 갔다 왔더니 연애질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나한테 너무 무신경한 거 아니냐“
"내가 너한테 신경을 왜 써야 하지...?"
"김상현 오랜만이다?"
내 뒤로 천천히 걸어 온 아영이 인사를 건넨다.
"어! 아영아.. 넌 하나도 안 변했네.. 더 예뻐진 것 같.."
"너 '프리메로'는 나가?"
상현의 수줍은 인사는 무시하고 내가 물었다.
"나? 나도 바빠서, 그냥 오다가다 동아리 사람들 보면 인사는 하지"
동아리에 안 나간다는 상현의 말에 묘한 흡족감이 들었다. 아, 나도 정말 유치하다.
"요 계집애~ 수빈이 형 궁금하냐? 그 형 여친 생긴 것 같던데“
"헐 진짜? 누구??"
"같은 동아리라던데? 나도 군대 가고 나서 들어온 애들은 잘 모르겠더라.
좀 통통하고 머리 짧은 앤데... 이름이 뭐였지"
"통통..? 지민이 아니야? 또 누구 있나..?"
"지민이 같은데? 대박..."
나와 아영인 상현이 던져준 단서로 수빈의 새 여친은 누구인가 추론하기 시작했다.
"몰라 확실하진 않아. 아무튼 너희는 왜 학교에 있냐?“
"우리 스터디 때문에"
"아, 너 아직도 진성 오피스텔 살아?"
"응 너도 자취 해?"
"야 나 대명 빌라 살잖아~"
"어! 우리 맨날 거기 지나가는데! 완전 가까웠네? 오늘 모일까?"
"그러자~ 유나는 안 불러? 걘 자취 안 하나?"
오랜만에 나온 이름에 괜히 죄 지은 기분이 들었다.
"유나는.. 이따 말해 줄게, 오늘은 우리 셋이서 놀자 오랜만에"
순간 굳은 나를 알아차린 아영이 간단하게 정리해준다.
"콜콜~ 나 집에 간장게장 있다? 집에서 보내 줬어. 우리 집 여수잖아"
상현의 자랑에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 간장게장 완전 좋아!! 너희 집으로 갈게, 쌀은 있어?"
"당근~ 올 때 술은 사 와라"
"그래! 이따 봐, 한 7시쯤 갈게~~"
"오키 빠이염~"
.
"아~ 그런 일이 있었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냐 섭섭하게"
우리는 상현이네서 술을 마시며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들었다.
내가 민준이와 사귀고, 수빈 오빠와 헤어지고, 유나와 싸우고 동아리를 그만둔 것까지
"너 군인이었잖아..."
"아...“
갑자기 침울한 분위기를 밥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깼다.
“어, 밥 다 됐나 보다. 자자~ 다들 그릇 주세요~"
상현은 주걱을 들고 말했다.
"여기! 나 밥 많이! 오예! 간! 장! 게! 장!!"
"쟤 원래 게장 비리다고 싫어하지 않았나? 우리 1학년 때 그랬던 것 같은데"
상현이 갸우뚱 하자 아영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크크 어디 가서 간장게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게장의 맛에 눈을 떴단다"
"...? 그게 뭐래"
.
밥도 잔뜩 먹고, 술도 먹고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덧 12시다.
"흐음 어쩔까, 우린 내일 아무 것도 없는데, 상현이 넌 내일 수업 있어?“
“아니, 아까 듣고 와서 내일은 나도 아무 것도 없음”
"그럼 달리쟈아! 머꼬 죽자아~~"
"먹고 죽을 술이 없다.."
상현이 텅텅 빈 냉장고를 연다.
"아~ 뭐야앙 벌써 다 마셔써어~? 가서 사와아!!"
"얘 취했지?"
"그런 것 같은데? 너랑 나랑 둘이 갔다 오자"
아영과 상현은 나보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고 편의점에 다녀왔다.
우리의 술자리는 새벽 3시까지 이어졌고, 다들 헤롱헤롱 한 상태로 술자리를 정리했다.
상현은 침대에서, 나와 아영인 상현이 던져 준 이불을 바닥에 깔고 잠깐 눈을 붙였다.
배가 싸르르 아파서 눈이 떠졌는데, 아직 5시다. 아.. 배 아픈데... 이건.. 분명.. 그거다..
"아영아.."
소곤소곤 아영일 부르니 아영이 실눈을 뜬다.
"...왜.."
"나 배 아파.. 나 먼저 집 간다..."
"뭐..? 왜..? 괜찮아?"
"술똥... 집으로 가야 마음이 편할 듯.. 안녕..!"
나는 아영을 두고 후다닥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는 5분도 안 걸렸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아~ 살 것 같다...
그러고 침대에 누운 지 1시간도 안 지났는데, 아영이 들어온다.
"응? 왜 벌써 와"
"그냥..."
아영이 피곤한 얼굴로 내 옆에 눕는다.
"야, 김상현 나 좋아하냐?"
그대로 자나 싶었는데 뜬금없이 이런 걸 묻는다.
"어? 왜?"
그걸 이제야 알았니.. 걔 1학년 때부터 너 좋아했다.
"그냥 뭔가 촉이 와서? 어제 너 방에 있고 우리 둘이 편의점 갔다 왔잖아"
"응, 고백이라도 받았냐?"
"아니 편의점에서 술사고 음료수 보고 있는데, 걔가 나 아직도 이것만 마시냐고
웰치스 꺼내 주더라?“
“하긴 강아영 너 그것밖에 안 먹지, 그것도 딸기 맛만"
"그러니까, 그걸 기억하더라니까? 그리고 아까 새벽에 너 가고 나서
난 좀 더 자려고 누워 있었거든, 근데 김상현이 나한테 이불을 덮어 주는 거야.
괜히 어색해서 그냥 집에 간다고 했는데 데려다 주겠대.
아,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뭘 데려다 주냐고 나 혼자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래도 여자 혼자 위험하다고 아직 새벽이라면서 데려다 줬어. 밖에 밝더만.."
"야씨 걔네 집에서 우리 집 뛰면 3분이다. 나는 똥과 함께 귀가했는데, 누구누군 좋겠네 아주"
"음... 에이~ 아닐 수도 있고. 걔가 워낙 착하잖아~ 잠이나 마저 자자“
아영인 커튼을 치더니 다시 꿈나라로 갔다. 불쌍한 상현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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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7월 24일 아영이 생일이다. 항상 방학이라 만나서 챙겨 준적은 없었는데,
이번엔 날짜가 바뀌기 30분 전부터 맥팡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 내일 수연이 불러서 셋이 놀까? 너 생일파티 하자!"
"어? 그럴까? 전화해봐 전화"
갑자기 제안한 내 말에 우리는 바로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민쑤~~"
"뭐야아 너네 나 빼고 술 먹고 있냐~? 우리 아영이 생일이지?! 생일 추카햄~~ 알라뷰~"
수연의 목소리가 옆에 있는 아영 에게도 들린다.
"얘 목소리 앵앵거리는 거 보니까 술 마셨네“
아영이 웃는다.
“너 내일 뭐해~ 우리 아영이 생일인데 모이자”
"내일? 나 약속 있는데.."
"누구랑?“
“있어~”
“학교 좀 놀러 와라”
"나 알바도 안 해서 돈도 없어~ 갈 시간도 없다"
"내일은 누구 만나는데 남친? 생겼어?“
“남친 아니야, 있어 그런 거”
자꾸 말을 돌리는 수연의 말에 아영이 휴대폰을 뺏어 말한다.
"야 너 저번에도 학교 왔었잖아. 우린 보지도 않고, 왜 자취방 놔두고 다른 데서 자냐“
“아 사람들 다 같이 모여 있는데 어떡해~ 그리고 그건 과모임이지"
"과 모임은 가고! 다른 약속은 나가고! 우리랑은 보기 싫으냐?“
"아 몰라몰라몰라~ 왜 자꾸 물고 늘어져 짜증나게"
"뭐?"
"아잉~ 아영아아~ 나 이번 달에 진짜 돈 없단 말이야~ 미안해 내가 8월에 꼭 갈게 알아찌?“
수연인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어휴 하면서 술을 마저 마시고 집으로 들어 간 다음 날,
페이스북을 보다 보니 수연의 상태가 업데이트 되어 있다.
“뭐야 김수연 약속 있다더니 남자였나 보네”
“나도 봐야지”
아영이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얼굴은 안 나왔긴 한데, 확실히 남자 손이네”
“근데 뭔가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인데... 누구지? 내가 아는 앤가?”
“송이나 너는 손만 보고 어떻게 알아 그걸”
“어디서 본 것 같은 손인데.... 뭔가 낯이 익은데... 전화해서 물어볼까?”
“아 됐어. 뭘 또 해, 만나 달라고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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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왜 그래?"
"아아~ 야 나 오늘은 진짜 술 안 받는단 말이야"
아영이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며 술을 뺀다.
"왜 이래.. 야 오늘 강아영 어디 아픈 가 보다. 얘가 술이 안 받는대"
"어쩐 일이래? 너 어디 아파?"
전혀 아픈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형식상 이마에 손을 갖다 댔더니 살짝 뜨끈하다.
"어? 너 진짜 열 조금 있는데?“
“거봐~ 나 오늘 아프다니까~ 아까 옆자리 대리님은 약까지 사다 줬는데”
“그 대리님 남자지?”
지혜가 예리하게 콕 찝는다.
“남자긴 한데, 그냥 내가 너무 기침을 심하게 해서 그랬을 걸?”
“너 그거 썸 아냐?”
“아니야~ 넌 뭐만 있...”
아영이 말하다가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한다.
“깡...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냐... 저녁만 먹고 들어가지 뭐”
“너 오늘은 술 먹지 말고 이거나 좀 먹어, 누룽지탕 시켜 줄게”
"응 누룽지 좋다. 주먹밥도 하나 시켜줘. 먹고 약 먹어야겠다...“
.
썸, 남녀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 미묘한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상대방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그가 건넨 사소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
평상시와 다름없는 평범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게 썸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 행동에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생각하는 작은 몸짓이 어느새 마음속에 들어와
미소 짓고 있는 걸 보면 사랑의 시작 같기도 하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라고 제일 먼저 알리는 작은 시작,
그 시작을 전하고 싶어 고민하는 동안 시나브로 들어온 그의 마음은 심장을 친다.
그래서 썸을 타면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