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귀찮았다.
난 원래 나서길 정말 싫어하고, 나설 줄도 모른다.
그런 날 운명나부랭이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는지 원.
나는 한숨을 한번 길게 쉬며 운명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노인의 말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저것들은 할아범이 말한 청룡과 백호의 힘인가요?”
노인과 나 사이 양옆으로 놓인 물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저것들을 이용해 자네의 힘을 발산시킬 것이네!”
노인은 나에게 다가와 다리의 쇠고랑을 풀어주었다.
등에 맨 붕대로 싼 방망이를 양손으로 들고 문양 중앙에 앉으라 했다.
나는 노인의 말대로 등에 메었던 방망이를 들고 문양 중앙에 앉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노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고주망태로 불리는 도깨비지!”
‘고주망태 영감이 도깨비라... 뭐 인간이 아닌 줄은 알았으니까. 묵만 드실 때부터 알아봤어.’
뭐, 그간의 일로 이젠 이쯤이야 대수롭지도 않았다.
“본래 우리 도깨비들은 주위의 물건들을 본 따 각자의 힘을 담아 사용해오고 있지! 원래의 모습은 커다란 방망이지만 각자의 개성과 능력, 애착과 밀착정도에 따라 다른 형태가 되지. 자네의 그 방망이도 마찬가지일세! 이젠 그대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 때가 온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야! 명심하게!”
노인은 방법을 알려주었고, 나는 노인의 안내에 따랐다.
그 방망이를 양반다리에 올려놓은 뒤 눈을 감고 노인이 알려준 대로 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도록 지금까지 했던 생각을 비우는 훈련에서처럼 집중하였다.
한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
때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흘러가고 나서였다.
거센 비바람이 느껴졌다.
분명 실내였을 터, 그런 게 올 리가 없었다.
‘또 저 영감이 장난을 치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자칫 숨이 멎을 뻔 했다.
내 밑으로 작게 보이는 무인도를 빼면 짙고 푸른 바다가 무서울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는 압도적인 크기의 푸른색의 용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청룡!’
그 앞에서 말 한마디 할 엄두는커녕,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들고 있는 방망이를 꽉 잡은 채, 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온 힘이 들어갔다.
“그대가 나를 깨우는 주문을 외웠는가?”
용이 나에게 물었다.
울릉도에서 외쳤던 주문이 생각났다.
여전히 말이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아 고개만 가까스로 끄덕였다.
“음, 보아하니 고주망태 영감한테 다녀왔군, 그대가 삼형제의 힘을 전승한 자 중 한명이란 말이지? 그녀의 피가 흐르긴 하나보군!”
나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청룡은 나를 시험하겠다며 돌진해왔다.
나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다음 순간 눈을 찡그리며 떴을 때 내 모습은 청룡을 들고 있던 방망이로 막아서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정신 차리지 못할까!”
청룡은 나에게 훈계라도 하듯 소리치며 잠시 뒤로 물러나 다시 돌격준비를 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청룡과 부딪히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방망이를 움켜쥔 양손도 덜덜 떨렸다.
청룡은 다시 돌진해왔다.
처음과 달리 내 손은 방망이를 놓쳤다.
청룡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바다위에 떠 있던 나는 무인도 해변에 떨어졌다.
무인도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때였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흰색호랑이 한 마리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땅이라면 안전할 줄 알았나?”
‘이건 뭐야, 청룡 다음엔 백호야?’
다행인지 저 멀리 바다의 청룡은 잠시 숨고르기를 하듯 그대로 있었다.
다음 순간 내 몸은 저만치 날아가 고꾸라졌다.
“한눈 팔지 마라! 너에겐 그럴 여유는 없다!”
으르렁거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백호가 말했다.
고주망태 할아범이 수련을 해준 덕에, 내 몸은 확실히 전보단 가벼워지고 빨라진 게 느껴졌다.
‘아무리그래도 그렇지, 저런 존재들을 내가 어떻게 이겨?’
막막했다.
모래사장과 바다 사이를 하염없이 달려 도망칠 뿐이었...
꽈광!
어느 순간 내 눈에 번쩍하고 별이 보이는 듯 했다.
“으, 머리야...”
분명 끝없이 펼쳐진 해변인데 지금 난 무언가에 부딪힌 것이었다.
“영원히 도망만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청룡과 백호는 땅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나를 응시하며 합창을 하듯 동시에 말했다.
서라운드 입체음향마냥 바람과 진동을 일으키며 울려왔다.
“풋, 그래도 계속 도망가는 체력과 끈기하나는 일품이군!”
백호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딴 것도 능력이라고 가지고 있는가? 한심한 놈!”
청룡도 혀를 차댔다.
“더 볼 것도 없다! 일찍 끝을 보자!”
청룡과 백호는 갑자기 빠르게 서로의 몸에 돌진해갔다.
둘이 부딪힌 순간, 요란한 번개가 굵직하고 선명한 형광색 선 하나를 그으며 내리쳤다.
잠시 뿌연 연기가 일어났다가 다시 걷혔다.
걷혀지는 연기 속 사이로 공중에 떠있는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 사내는 푸른 갑옷을 입고 검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있었다.
푸른 갑옷은 청룡비늘로, 하얀색의 검 한 자루는 백호의 이빨로 만들어진 듯 했다.
신기한 건 그 자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바로 거울 속에서 본 내 얼굴이었다.
“난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너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대여! 무얼 망설이고 있는가? 무엇이 두려워 그리도 잔뜩 주눅이 들었는가? 도망은 쳐도 되지만, 그리 도망만 쳐서야 되겠는가? 남이 규정한 자신에게서 이제 벗어나와! 그게 힘들면 이제 그만 전승의 운명에서 널, 처단하겠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널 대신에 몸을 차지할 것이다!”
내 얼굴을 한 그자는 검 끝을 나에게 향하게 한 채 청룡과 백호가 그랬던 것처럼 돌진해왔다.
내 눈은 돌진하는 그를 지켜보기만 할뿐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내 손과 팔, 다리, 내 몸 어느 곳 하나에도...
단지, 내 손과 다리는 덜덜덜 작은 떨림을 계속 이어갈 뿐이었다.
그가 뻗은 검 끝은 내 심장을 관통해갔다.
‘아, 이제 죽는 거구나.’
뭔가 어째 허망한 인생이라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내 눈 앞에 수많은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런 게 주마등, 이란 건가?’
어째, 좋은 기억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폭행으로 인하여 형이 나와 동생을 감싸려 새우등을 해가며 대신 맞는 장면 같은 우울한 장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각자 다른 곳으로 흩어져서 소식이 끊겼다.
내 인생에의 폭행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대학까지 보내주는 대외적으론 친절한 양부모였지만 실상은 화풀이대상이었다.
나란 존재는 열 받으면 밟고 짜증나서 때리고 화난다고 집어던지는 집안의 화분만도 못한 존재였다.
인간에게 저항조차 않는 화분 속 식물처럼 난 화내는 법조차 몰랐다.
난 짐승처럼 맞고 또 맞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죽어서 사라져도 상관없는 거겠지. 날 사랑해줬던 소연마저도, 날 조금씩이나마 양지로 이끌던 그녀마저도 떠났으니. 이젠 누구하나 슬퍼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주마등조차 떠나버리고 내 주위엔 어둠만 짙어져갔다.
내 몸이 점점 더, 밑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일어나렴, ...준상아, ...준상아,.. 일어나야지?...”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낯설지 않은,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눈을 떴다. 엄마였다.
기억속의 모습은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앞에 있는 사람은 확실히 엄마였다.
반가움과 그동안의 서러움, 버림받아 생긴 증오감, 여러 감정들이 올라와 날 울보로 바꿔버렸다.
“엄마, 엄마, 어엄마~”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어댔다.
엄마는 나를 꼬오옥 품에 안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아가, 우리 이쁜 아기, 힘들었지? 그동안...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기들 고생시키고...엄마가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엄마는 나와 같이 울어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 둘은 그렇게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한결 후련해졌다.
어느새 짙은 어둠은 푸른색 공간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충분히 사랑받은 존재란 걸 알려주셨으니까, 울지 마세요 이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에겐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절 많이 사랑해주던 사람을 찾으러 가야 되거든요! 고맙습니다. 사랑해주셔서...”
나의 말에 엄마는 날 한번 안아주었다.
그리곤 나지막하게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한마디 남기고서 희미해져갔다.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