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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언틸던
작가 : Indignation
작품등록일 : 2018.11.4

동이 트기 전까지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미스터리 sf)

 
5. 발견
작성일 : 18-12-21 23:58     조회 : 286     추천 : 0     분량 : 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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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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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처럼 책방에 들른 케인은 한 권의 책을 뽑아 소파에 풀썩 뛰듯이 앉았다. 가볍게 그의 몸을 받아든 소파는 먼지를 날렸으나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 아래에서 싸라기눈처럼 흩날렸다. ‘우주의 발견’이라는 책을 펼쳐 본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책을 덮었다. 페르미의 역설이라는 이론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 사실일까. 역시 말도 안 되는 걸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수년간 품었음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미수로 끝났으며 본인도 시설을 도망친다고 해도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페리의 말대로 사막을 떠돌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계획에 대해 케인은 몇 번이고 고심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진짜라면 그리고 그를 포함한 시설의 모두가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도망치는 것이 옳았다.

  두 달 전인 8월 중순 무렵, 그 날 그는 밤에 몰래 시설을 빠져나가 옥상에 올라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그즈음의 별은 유난히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 그밖에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남자 숙소에 가까이 가자 그제야 토트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까지 들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크게 골고 있는 것 같았다.

  문고리를 돌리고 들어가려던 순간 그는 복도 끝에 있는 원장실의 불이 아직도 켜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가 이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애들보다도 일찍 잤다. 그러나 귀가 밝아서 그런지 근처에 다가가거나 큰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나타나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이 시간에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때 잠자코 방에 들어갔다면 그는 아무것도 모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른 채 이곳에서 벗어나기만을 희망하다가 2년이 지나 16살이 되는 해에 그를 데리러 오는 헬리콥터에 몸을 실고 어딘가로 떠났을 것이다.

  그 ‘어딘가’에 대해 케인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막연하게 더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들이 아는 사람은 대부분 기쁜 얼굴로 이곳을 떠났다. 절대로 불행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서의 삶이 행복해지기 바로 전단계라고 생각해왔다. 이 단계만 지나면 모두 더 나은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고 여겨왔다.

  그리고 케인은 그걸 이제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에 큰 충격을 느껴야 했다. 원장실 근처까지 다가간 그는 그녀가 잠이 들어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만치 가까이 왔음에도 전혀 소리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 귀신같이 알아채고 방을 나서던 원장이 웬일인지 케인이 문고리를 돌릴 때까지도 잠잠했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원장이 그 거대한 소파에 뒤로 누워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입이 하도 커서 그의 주먹도 들어갈 것 같았다. 책상 주변에는 서류가 흩뿌려져 있었고 거의 난장판에 가까웠다. 뭔가 중요한 연락을 했던지 전화기도 꺼내져 있었다. 케인은 그 전화기를 이번이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원장은 전화기를 항상 서랍 속에 넣어놓았다. 옛날에 미처 넣어놓지 못한 것을 우연히 한 번 본 것이 전부였었다.

  ‘그때는 뭣 때문에 불려갔었지? 원장의 쿠키를 훔쳐 먹어서였나?’

  케인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그 꼴이 영락없는 좀도둑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전화기를 손을 대봤다. 플라스틱의 감촉이 손에 느껴졌다. 별거 아니었지만 이런 장난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멀리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신기했다.

  수화기를 들고 입모양으로 여보세요를 해보며 장난을 쳤다. 바보같은 짓을 끝내고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는데 갑자기 아침의 기상벨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전화기에서 나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결국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소리는 멈췄고 원장은 다행히 깨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의 귀에 딱딱하고 저음의 남자목소리가 들렸다.

  ‘샤크라. 샤크라? 뭐하고 있나? 정리가 끝나면 당장 전화하라고 하지 않았나? 왜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거지?’

  목소리는 낮고 근엄했으며 권위가 실려 있었다. 샤크라 라면 원장의 이름이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에게 뭔가를 명령할 수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그녀는 시설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케인이나 다른 아이들에게 있어 원장은 절대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건가? 또 벌벌 떨면서 전화기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거라면 그만두게. 어차피 난 보이지도 않으니. 그보다 빨리 실험체들의 상태나 보고하게. 또 늦는다면 그때는 직접 내 앞에서 무릎 꿇게 해줄 테니 그렇게 알도록.’

  뚝... 뚜...뚜...뚜...

  상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케인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샤크라가 아니니 뭐라고 대답할 길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원장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보였다. 그는 전화기 옆에 있는 종이들을 뭉텅이로 들었다.

 

  ‘첫 번째 시도. 신호가 끊김. 생사를 알 수 없음. 실패.’

  ‘두 번째 시도. 궤도를 이탈. 소행성과 충돌한 것으로 보임. 실패.’

  ‘세 번째 시도. 식별명 C.5. 연이라는 실험체가 다른 실험체를 선동. 반란. 사살. 실패.’

 

  한 장에는 그 실험들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었다. 케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넘겼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식별명 D.2. 케인. 위험. 상기한 사태 재발 가능. 유의필요...’

 

  밑에는 그에 대한 정보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나이, 키, 몸무게, 말투, 성격 등등...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끼며 케인은 끝부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분필요.’

 

  그때 원장이 몸을 뒤척였다. 케인은 화들짝 놀라며 종이를 던져버리고 밖으로 도망쳤다. 급하게 나와 소리를 낮출 생각도 못했지만 다행히 원장은 깨지 않았다. 책방까지 달려간 케인은 그 문 앞에서 숨을 골랐다. 문에 기대자 겨우 몸을 지탱해주던 다리가 공기가 빠진 풍선처럼 미끄러졌다. 자리에 주저앉으며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컴컴한 복도에서 그는 혼자였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심장의 고동이 거칠어지자 숨이 가빠왔다. 숨을 고르면서도 케인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의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속이 메스꺼웠다. 욕지기가 났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고 나자 메스꺼움은 멈췄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왔다. 죽는다고?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곳은 멀쩡한 곳이 아니었다. 그 자료만 보고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게 이곳은 위험한 곳이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이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복도를 돌다가 그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그러나 그의 다리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자꾸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재촉하며 어찌어찌 방에 돌아갈 수 있었다. 끈 풀어진 마리오네트마냥 침대 위로 엎어졌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고 위장이 멋대로 뱃속을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여기서 구역질을 해댈 수는 없다. 금방 아이들이 일어날 테고 그를 걱정해주진 않겠지만 소란스러워질 것은 분명했다. 그중 코비한테는 절대 들켜서는 안됐다.

  코비는 원장의 하수인이자 정보원이었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원장의 예쁨을 받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코비가 원장에게 받은 초콜릿을 들고 토트 패거리 앞에서 헤헤거리며 엉덩이를 흔들거려도 그들은 코비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분명 원장에게 어떤 식으로든 주의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코비는 머리를 잘 썼다. 토트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원장에게 의탁하는 것은 꽤 재치 있는 발상이었다. 언제까지 유지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이 케인에게 피해만 가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케인이 무슨 짓이라도 할라치면 코비가 어느새 원장을 데리고 그 장소에 들이닥쳤다. 원장에게 핀잔과 꾸지람을 듣는 빈도가 코비가 그렇게 된 이후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만은 이 일이 들켜서는 안 되었다. 지금 케인에게 샤크라는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격하되었다. 원래도 그렇게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그를 키워줬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싫어할지언정 믿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녀는 완전히 신뢰를 잃게 되었다.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방법으로 죽는 모습들이 브리핑되었기 때문에 보고서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못했다. ‘처분필요’라는 단어가 각막에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버렸다. 그는 실험이라는 것과 실험체라는 것, 그리고 시도와 실패에 대해서, 그다지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아예 떠올리지 못하게 된 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고 페리에게 몇 번 얻어맞은 뒤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에게 이 일은 이야기하진 않았다. 케인은 그가 본 것이 환상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 마지막 글자가 선명하게 영상으로 반복 재생되었다. ‘처분필요.’ 다른 것들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수 개월간 계속 의문을 갖고 있었다. 여러 번의 시도, 실패. 그리고 연... 결국 답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때 본 보고서의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았고 떠오르는 것들도 알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지금까지 페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데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연... 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

  ‘연’이라는 사람이 뭔가에 반항을 했다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건 명백했다. 그러나 그게 그와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도무지 그 보고서에 있던 내용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케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는 자신이 위험에 처할 거라는 것까지 밖에 추리해내지 못했다. 그건 그의 능력 부족이라기 보단 좁은 세계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케인은 치명적일 수도 있는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벽을 조사하면서 약한 부분을 찾기도 하고 음식이 얼마나 남았는지 뭐가 남았는지 조사해보기도 하고 원장 몰래 다시 보고서를 보기 위해 원장실에 잠입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보았던 그 보고서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중에는 조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계획도 세웠다. 그래도 페리의 말처럼 그가 어리석고 우발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케인은 오히려 이곳을 떠날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호기심과 치기는 있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길만한 능력이 부족함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는 계획을 빨리 실행에 옮겨야 함을 깨달았다. 샤크라가 그들을 불러들여 뭐라고 이야기 할 때 도발을 한 이유는 페리를 욕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가 손찌검을 하리라는 것은 예측하고 있었다. 그걸로 사태를 빨리 종결하려고 도발한 것이었다. 그 정도나 방식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목숨에 위협이 갈 수준은 아닐 것으로 짐작했다.

  그렇다 해도 재떨이를 던져 이마를 깨부순 것은 그 예상범위를 넘어간 것이었다. 케인은 순간 시야가 번쩍하더니 새하얘졌다. 이어서 짧은, 그리고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페리 말로는 처음에는 피가 꽤 많이 났다고 했다. 지금은 흉터도 남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나았지만 그 사건으로 진짜 목숨에 위협을 느꼈다.

  조용히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페리에게 계획을 노출시킨 건 그의 실수였다. 하지만 돌이켜보자면 실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케인이 그녀의 도움을 은연중에 원하고 있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본인도 그런 심리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케인은 항상 페리가 그를 챙겨주는 것을 어색하게 여겨왔다. 처음 본 사람이고 같이 자랐다고 해도 이런 삭막하고 재미도 없고 말썽만 피우는 친구를 언제까지고 뒷감당해줄 호인은 그다지 없다. 하지만 페리는 그럼에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러면 그럴수록 가까이 다가와 감싸주고 때로는 독려해주었다. 이를테면 그에게 그녀는 어머니와 같았다.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고 괴롭혀도 언제 건 어느 때건 곁에서 어깨를 잡아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 중대한 결심을 무심코 말해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평소에는 무엇을 결정할 때 이야기도 하지 않다가 불안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결정에는 조언을 구하는 자식처럼 말이다.

  그녀는 다행히 반대해왔지만 케인이 뜻을 굽히지 않자 함께 해주기를 약속했다. 그 약속을 먼저 깨고 혼자 도망가려 한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 미안한 감정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케인은 왜 자신이 그토록 참을성 없이 행동했던 걸까 의문을 가졌지만 단순히 두려움에 의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 외에는 없었다. 그의 모든 신체요소요소들이 그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그래도 뒤늦게 페리가 와 사태가 수습되었다. 코비에게 들킨 건 진정으로 뼈아픈 실책이지만 어떻게든 덮었다. 문제는 코비가 언제까지 입을 다물어줄지도 알 수 없었고 두 번째로 케인이 언제 ‘처분’을 당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적었다.

  최대한 서두르려 하는 그에게 페리는 여유를 가지라는 충고를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수긍했다. 조금 기쁘기도 했다. 그녀의 걱정하는 마음이 눈에 보일정도로 확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친구를 데리고 가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조금 실망했다. 마치 그녀가 그보다 친구들을 우선순위로 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페리의 말은 옳았다. 언제나. 항상. 그녀의 친구들 덕분에 계획은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음식물을 담당하는 건 여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샐러드나 빵조각들을 몰래 빼돌리는 게 가능했다.

  식량이 준비되자 필요한 건 나갈 날짜를 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이곳이 탈출하는 게 주요 계획이었기에 그 외엔 필요치 않았다. 계획을 진행하고 케인은 페리의 친구들을 보면서 왜 그들이 이렇게까지 그를 돕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안하고 막연한 기분이 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걸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빈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나가 책방으로 가는데 여자숙소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무시하고 넘어가도 괜찮았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되어 귀를 붙이고 엿들었다.

  “솔직히... 난 아직도 무서워. 우리 진짜 나가는 거야? 그땐 페리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은 후회돼. 그냥 더 뜯어말렸으면 페리도 말을 듣지 않았을까?”

  조그맣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말했다.

  “타이니... 사실 나도 그래. 무서운 건 누구나 똑같을 거야. 케인 자식은 몰라도. 페리도, 마찬가지일걸? 그 애가 말했잖아. 너무 무서워서 우리에게 이야기한 거라고. 우리와 함께 있으면 그 두려움이 삼분의 일로 남아 줄어들 것 같다고 말이야.”

  높고 발랄한 소녀다운 목소리가 잠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한 말이었지. 하... 아무튼 페리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확신했어. 그 애는 위험한 짓인 걸 알면서도 뛰어들려고 하고 있어. 소꿉친구를 위해. 그 녀석은 알다시피 그... 순교자 같은 애잖아? 아마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도우려할 거야.”

  우리도 소꿉친군데 말이야. 하고 짧게, 투덜거렸다.

  “맞아.”

  애처롭게 들렸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페리는 우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도 똑같이 행동할거야. 분명히.”

  “응. 그럴 거야. 그 애라면.”

  케인은 귀를 뗐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문에서 멀어졌다. 반대편 벽에 등이 닿자 그는 멈췄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은 꼭 다물고 있었다. 저편에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오는 것을 느끼자 그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페리였다. 그녀는 분홍색 가디건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식당에서 밥 먹고 돌아가고 있었어. 좀 쉬고 싶어서.”

  “그래. 잘 생각했어. 요즘 무리하더라. 책도 적당히 읽고 해야 도움이 되는 거야. 아! 날짜는 곧 애들하고 이야기해서 정할게. 늦진 않을 테니 안심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몸을 돌리다가 뭐가 떠올랐는지 다시 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타이니랑 사라는 둘 다 착한 애야. 그러니까 음... 친하게 지네. 알았지?”

  페리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케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동의한 걸로 알게. 그럼 나 들어간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케인은 문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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