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잠깐! 내 말 좀 들어와. 방금 한 말은 그 말이 아니고 다른 말이야”
“무슨 말?”
“아! 창훈이가 골프를 치려 가는데 짧은 거리서 어떻게 치는 지 요즘 헷갈린다고 해서, 우리가 프로도 아닌데 굳이 거리에 맞게 만들어 놓은 구색에 맞는 채로 칠 필요가 없는 말을 하고 있었어. 피칭이나 9번 아이언으로 굴리라는 말이었는데 당신이 오해를 했네. 허허허! 겨울과 요즘 같은 봄에는 골프 장 이용 요금도 많이 차이 난다는 얘기도 했고…. 허허허. 당신은 그 말이 무슨 말인 줄 알고 그렇게 화가 났어?”
어이없는 헛웃음이 두 사람 코에서 동시에 나왔다.
“그런데 해숙이 남편 일로 당신 오빠가 절대로 영식이나 창훈에게 도와주자는 얘기는 않을 게 확실해. 전량인지 아니면 일부인지 모르지만 창훈이가 그 제품을 필요해서 매입한다고 했는데 해숙이 신랑이 그러면 본전밖에 안 된다고 안 판다고 했다 더라. 그때 창훈이도 제품이 급하게 필요해서 영식이 회사에서 그때 시세보다 조금 더 비싸게 사서 팔았더라. 다른데도 마찬가지지만 그 동네도 신뢰가 최 우선일 수밖에 없는 게 그 제품이 자재로 치자면 원자재라서 그 제품이 없으면 공장 불을 꺼야 한데. 그때 이런 얘기도 나돌았어. 물론 그 사람이 화가 나서 그랬겠지만, 자기는 그 제품을 십 년 넘게 거기 가만히 저장해 둬도 괜찮다고 했다 더라. 당신도 알다시피 창훈이는 그 동네서 신입사원부터 시작해서 대표가 되었잖아. 그때 해숙이 신랑한테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에게 어떤 괴리를 느꼈다고 했어. 창훈이는 그때, 그때 매입해서 팔아야 하는데 그 사람은 느긋하게 가격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배짱 같은걸 느끼고는 전화 번호를 아예 차단해버렸다 더라. 그런 사람들은 바로 다음날이라도 마음이 바뀔 수도 있고, 또 바뀐다더라. 계속 그렇게 그런 사람에게 끌려가면 납품 시기도 놓치고 신임도 잃는다더라. 그 제품이 주식의 주가하고 비슷해서 조금 비싸더라도 신뢰를 위해 판다고 하더라. 창훈이나 영식이 말로는 그 제품을 그렇게 오래 놔두면 변질될 가능성이 많고 또 기체로 날아간다더라. 벌써 많이 날아가서 수입할 때보다 수량이 줄어 들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도 그 사람은 그 쪽에 정보가 없으니 마냥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 가만히 놔둬라. 그 집안은 우리 둘이 뿐만 아니라 손자들까지 돈 벌어도 그만큼 못 벌만큼 재벌이잖아”
“무슨 그런 잔인한 말씀을… 우리는 이렇지만 애들까지 이럴 순 없잖아요”
“당신 오빠를 보세요. 아버님에 저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을 건데 저렇게 돼 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닌데 듣기 좀 그렇네. 나도 정말 갑갑해요, 오빠가 왜 저렇게 돼 버렸는지. 참 패기도 있었고 저 정도가 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는데…. 갑갑하네요”
영철이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을 하다니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며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더듬어 냈다.
“그때 있지!”
“언제?”
“아! 내 정신 좀 봐! 내가 잊고 있었네. 그날! 왜! 작년에 해숙이가 도와달라고 전화하던 날 당신 오빠와 골프를 치러 갔었잖아. 기억나지?”
“응! 그날 전부 모여서 해숙이 집 얘기했지”
“그날 골프를 같이 친 여자가 안면이 있는 것 같아 물었는데 재수 없다며 말도 못 꺼내게 했었어. 당신도 알지만 당신 오빠가 그런 의심이나 의문의 말을 들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꼬치꼬치 켜내는 성격이잖아. 그런데 그날을 매몰차게 재수없는 년들로 취급하고 두 번 다시 입밖에 안 내놓더라. 가끔씩 조인한 여자들하고 공을 치면서 말 한마디 안 해도 다음 날이나 며칠 지나면 그 여자들 말을 하는데 그날 그 여자들에 대해서는 일체 입 밖에도 안 꺼내는 게 이상하지 않아? 내 생각에 그 선생이라는 여자가 해숙이 맞는 것 같아”
선생이란 말에 은희가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묻는다.
“그 날이 몇 일인지 기억나?”
“잠깐만! 휴대폰에 통화 기록에 나오겠지”
“너무 오래돼서 나올까?”
“아! 당신 오빠한테 전화해봐. 아니 내가 전화할게”
“왜?”
“그날 그 놈이 사진을 많이 찍어서 분명히 저장해뒀을 거야. 그날이 몇 일 인지만 알면 되잖아”
“그 놈이 뭐야! 정말 듣기 싫게. 그리고 왜 물어보냐며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래?”
“그것도 그렇네. 꼬투리 한번 잡히면 놔 줄 생각을 않는 위인인데.. 어이! 징그려! 어쩌지?”
아주 잠시 궁리를 하는가 싶더니 영철이가 손바닥을 탁 부딪히게 하고는 컴퓨터에 앉았다. 은희가 그 뒤에 서서 쳐다보고 있다. 영철이 예상이 맞았다. 그건 은희의 예상이기도 했다. 단지 영철이가 먼저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날 해숙이가 내뱉은 소갈머리라는 말에 불쾌한 감정이 중학교 카페의 자유게시판에 아주 리얼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사진에는 해숙이뿐만 아니라 신랑이나 오빠 얼굴도 없었다. 단지 풍경뿐이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처럼 거액을 들여 골프 치러갔다. 돈이 아까웠다. 매너 없는 박서방과 어떤 18년 휴대폰 때문에 가을 하늘과 숲과 잔디 속에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게시판을 보는 친구가 있으면 이 말을 꼭 참고해 주길 바란다.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과 길게 통화하는 사람이나 문자를 주고 받는 사람.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 인격모독 당한다’
“뭐야! 이거! 내보고 하는 소리 아냐?”
“아니! 저도 포함인데요”
“야! 이 게시판에 중학교 동기들 다 보는 데 나를 아예 공개적으로 씹었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뭐야? 내보고는 18년이래. 우와! 우리 오빠 맞아? 이 사람이? 어떻게 동생한테 18년!”
두 사람 표정에서 동시에 쓴웃음이 나온 후에야 카페에 들어 온 이유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수리가 그때 불쾌하게 내뱉은 그 18년이 해숙이라는 걸 알고 있으리란 짐작도 같다. 더 곤란한 사태는 골프장에서 만났던 사람이 해숙이란 걸 알고 있으면 절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훼방을 놓을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상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영철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분명한 건 해숙이가 또 ‘잘못 건드렸다’ 였다.
“당신 혹시 일기장 사건 알아?”
“무슨 일기장?”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 역력했고 이럴 때 마다 신랑에게 짜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