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식이와 영철이 부부가 다 같이 모이는 모임에서 만나면 서로간에 오가는 억지 웃음이 감지되기도 했다. 옆에 자기 마누라가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으론 그런 짓이 옹졸하기보다 동생인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보호하려는 의미로 전해져 안심이 되기도 했다.
지금 수리를 귀찮게 하며 도와주라는 사람은 그 애의 친구 남편이다. 그 애는 수리 여동생이고 영철이 아내다. 그 애 친구 이름은 해숙이다. 수리는 최근에 해숙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가지고 시간을 허비했다. 기억상실이라는 병 탓도 많았지만 그 이름 자체를 뇌 속에서 강제로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계기가 되게 해준 사람도 마찬가지로 삭제했다. 반 평생을 살면서 머리에 담아 놓은 수 많은 이름 중에 삭제된 그 이름을 복구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렇게 어렵사리 그 이름을 떠올렸지만 그 이름은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먼저 떠오르지는 않았다. 동생 친구이고 후배이기 때문에 해숙을 잠시 그 애라고 부른다. 사람의 뇌 속에 저장된 어떤 사람의 성격이나 특성은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저장돼 있지는 않는다. 수리 머리 속에서 저장되어 있다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그 애는 그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오해가 빚어낸 편견 속에서 그녀는 수리 머리 속에서 상상으로 인해 더욱더 악하게 승화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하나의 슬픈 추억에 불과하지만 그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그런 비참한 기분을 맛봤다. 그날이 대학입시를 위한 학력고사 전날이었다. 그 날 그 애는 수리에게 그 당시도 지금도 한방에 딱 붙으라고 의례적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엿을 사 들고 와 엿을 먹였는데 그 엿은 말 그대로 한쪽 손바닥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주먹을 날리는 ‘애라! 엿먹어라!’였다.
“오빠! 앞 동네 오빠가 오빠 친구와 키스하던데 둘이 사귀고 있었어? 대 박!”
그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름을 물었고 그 애는 아주 상세히 두 사람의 이름과 그 장면을 아주 리얼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애가 들려 준 여자 애는 수리가 어릴 적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짝사랑하는 친구였다.
그날 수리는 엿먹은 기분으로 엿 대신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시험을 쳤다. 그 말로 인해 수리는 그 후로 오래도록 짝사랑한 친구에게, 그 친구가 들으면 어이없고 억울하다고 할, 느낄 필요도 없는, 배신감을 안고 살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 친구는 짝사랑했던 친구가 아닌, 사랑한다고 고백도 못한, 손도 한번 잡이보지 못한, 그런 상상 속의 첫사랑 여인으로 가슴속에 파고 들어가 수리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후로 해숙이가 꼴도 보기 싫게 싫었다.
왜? 무슨 이유로?
하필이면 그 말을 평생에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인 학력고사 앞 날에, 그것도 집까지 찾아와서, 엿까지 들고, 그 의도를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때와 그 후로 몇 년 동안 실제로 해숙을 원망했다.
왜? 하필이면 그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영악한 년! 간교한 년! 그날 시험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절반의 인생이 판가름 나는 날인데 하필이면 그날 찾아와서 내 인생에 찬물을 끼얹어… 고약한 년!
수리는 그 후로 일년 동안 재수를 하면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자신이 정신과 의사로 착각할 정도로 환자를 분석했다. 그 환자는 자신이었다. 처음엔 해숙을 원망했다. 그 뒤로는 그 여자 친구를 원망했다. 그리다가 모든 원망이 본인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공부를 잘하고 그 여자 친구와 어울리는 대학에 갔다면 그 친구 마음을 잡을 수 있었을 텐 데’
해숙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그 뒤로 그 여자 친구를 해숙과 똑같이 적용시키고 나중에는 자기에게 적용시키면서 자기를 합리화 시키기에 이르자, 본인을 관용으로 받아드리고 그들에게도 마음 속으로만 관용을 베풀게 되는 걸 경험했다. 그런데 그 관용은 잔인했다. 재수를 마치는 그날 학력고사를 치르는 그날 또다시 관용은 사라졌다. 또 해숙을 증오하게 되었다. 시험치는 그날 뇌 속에서는 그 동안 공부한 내용들보다 일년 동안 이 고생을 한 원인들이 먼저 떠올랐다. 시험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그 원망과 증오는 더 가중되었다. 그리고 그 증오에 대한 관용은 지금도 베풀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해숙이가 이해는 갔다. 피만 섞이지 않을 뿐이지 태어날 때부터 은희와 똑같이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부터 시작해 단 한번도 친동생과 동생 친구로 차별을 두지 않고 똑같이 대해 주었다. 시험 잘 치라고 엿을 사 들고 찾아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날 오지 않았다면 평생 동안 괘씸한 놈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길가다가 우연찮게 남녀가 키스를 하는 광경은 그 나이엔 호기심이 생기기에 충분할 예민하고 민감할 때였다. 그래서 자세히 봤고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 남녀가 동네 언니라는 사실을 목격했고 얼른 전하고 싶은 나이였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 게다가 해숙은 그때 수리가 그 언니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오히려 해숙의 가슴에는 수리가 오빠가 아닌 남자로 싹트고 있을 때였다.
그 후로 수리가 그 애를 머리 속에서 깨끗이 삭제하려고 애를 썼고 그러면서 해숙이란 이름도 같이 삭제됐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 애, 해숙이란 이름을 듣고부터 또 다시 그 짝사랑하던 여자 애가 떠올랐고 좋아한다는 말 한번 해보지 못한 그 애에게서 배신감이 몰려 왔다.
그 배신감 속에는 해숙도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남자애, 짝사랑한 그 여자 애와 키스했다던 그 남자 애! 그 놈도 잘 알고 있다. 평생 동안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그 놈은 무슨 좋은 인연이라고 취직까지 시켜줬다. 그 놈은 잊을 만 하면 나타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도와줬다. 짝사랑하던 그 애를 잊을 만 하면 그 놈이 가뭄에 콩 나듯이 나타나 그 애 이름을 들먹거리며 염장을 파헤쳤고 이젠 완전히 잊고 살만하니 지금은 또 이 애가 나타나 염장을 파헤친다.
도대체 그 여자 애가 뭐길래 그 애는 절대 나타나지 않고 아무 관련도 없는 이런 애들이 얼쩡거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어느 상가에 갔다가 그 놈을 만났다. 그 놈이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여자 애 이름을 꺼내 또 한번 염장이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