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이 말을 숙이가 들으면 평생 은인으로 보필 받을 말이었다.
“그런 일은 마른 하늘에 번개 맞을 만큼 희박해. 내가 골프장에 아예 가지 않는데 어떻게 만나겠어?’
“스크린이라도 칠 거 아니에요”
“너만 오면 되지”
“혼자서 누님들과 같이 치라고요? 저는 방우가 아닙니다. 자신 없습니다”
“그 봐! 걔 완전히 바람둥이 맞네. 어떻게 여자들 사이에 혼자 껴서 골프를 쳐? 웬만한 바람둥이 아니면 그러 짓 못해”
“그럼 저는 요? 누님들 틈에 혼자 끼라면서요”
“너는 내가 있잖아”
근식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맹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같이 산에 한번 가자. 너 언제 시간 나?”
“둘이서요?”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근식이가 물었다. 근식이가 당연한 말을 묻는 바람에 심기가 뒤틀려 퉁명스럽게 대답을 한다.
“거긴 둘이 가도 되잖아. 싫으면 내 친구들 너도 알잖아. 같이 가면 되지 뭐!”
근식이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처음으로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한참을 그런 눈으로 복희를 멀뚱히 보고는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기겁하고 있었다. 손사래를 쳤다.
“어~~ 저는 여자 세 명은 자신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제가 방우하고 자리 한번 만들 테니까 오해를 풀고 같이 갑시다. 제가 마음 편하게 골프 칠 친구는 그 놈밖에 없습니다. 조만 간에 자리 한번 만들 테니까 친하게 지내봐요”
눈치라고는 개똥도 없는 놈이란 생각이 불쑥 던 복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복희 머리가 띵하게 아파왔다. 방우가 기억상실에 걸리지 않은 이상 숙이 이모라는 사실을 아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제가 자리 한번 만들게요. 맨날 누님과 둘이서만 다닐 수는 없잖아요. 조만 간에 같이 한잔 하시죠. 지금 전화해 볼까요”
“아니! 아니! 알았다. 시간 한번 맞춰보자.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네”
“누님! 방우한테 죄 지은 거 있죠?”
“죄는 무슨 죄! 어디 가서 호프 한잔하고 들어가자”
술기운인지 근식이 말대로 지은 죄 때문인지 갑자기 몸살 증세까지 느껴져 호프로 입을 간단히 헹구다시피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후로 머지않아 무서운 염라대왕을 만날 것 같은 두려움도 같이 몰려 오면서 심한 몸살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누워 근식이와 문자만 주고 받으며 주책이나 떨었다.
근식이가 방우와 마주치는 걸 싫어하는 복희의 마음을 알아차려 인지 방우란 이름이 서서히 근식이 입에서 사라지다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늘 붙어 다녔던 방우 자리가 복희에게로 가 있었다. 가끔씩 근식이와 단 둘이서 마치 둘만의 은둔생활이나 즐기듯이 스크린 골프를 치고 한잔 하는 게 복희 낙이 되어 있었다.
조카인 영호는 여전히 정치 바람이 들어있었지만 숙이가 다녀간 뒤로 조용해져 복희에게 그 집 일은 예전처럼 남의 집안 일이나 다름없었다. 근식이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전화나 문자를 기다려지기도 했다.
오늘은 근식이가 복희가 아닌 방우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친구야! 요즘 사업이 잘 되는 모양이지? 너무 조용하네”
근식이 귀에 웃음소리와 노래 소리가 먼저 들렸다.
“너무 오래 만이라 너는 날을 잊었구나. 잊었니? ‘너는 나를 벌써 잊었니~~ 요즘 뭐 좋은 일 있는 모양이지?’”
복희와의 사이를 들킨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흥얼거리는 노래가 그 의미가 아니란 걸 눈치를 채고는 껄껄거리며 변명을 한다.
“허허허! 죄송합니다. 사장님!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살고 있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허허! 용서는 내가 받아야지. 온탕 냉탕을 평생 동안 오가는 내 같은 놈이 네 친구라 미안할 뿐이다. 한편으로는 네 잘못도 있다. 나이가 들면 친구도 가려서 만나야 하는데 나를 만나는 너의 안목에도 문제가 있지. 허허! 요즘 일감이 많이 줄어서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인 것 같아서 숨 죽이고 쪼그려 앉아만 했다. 움직이면 먼저 차 기름값부터 나가잖아. 요즘 사무실에 불도 켜지 않고 있다. 허허”
“그래도 위기가 기회라고 그럴수록 영업을 하러 다녀야 할 것 아니냐? 세상은 어차피 뺏고 뺏기는 전쟁터 아니냐?”
“당연하지만 잘못 나부대다가는 곧 파멸이고 죽음이잖아. 이 업종에서는 내 회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차렸고 제일 작잖아. 까불다가 핵폭탄을 맞아. 지금 내 같은 다른 회사들도 경기가 나빠서 직원들 월급도 못 주고 있어. 예전에는 이럴 때 내보고 자기들 직원 데려가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이 일체 없다. 임금체불만 아니고 4대 보험과 세금만 눈덩이처럼 부풀려지고 있다고 지금 난리다. 예전 같았으면 내같이 작은 회사 일을 뺏어가 어떻게 해서던 살아남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 같은 놈을 걱정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안하무인으로 나서겠나? 가늘고 길게 살고 있는 중이다. 허허”
“그래도 한번쯤 코에 바람을 넣어야지. 쪼그려 앉아만 있으면 다리에 힘 빠져서 자칫 잘못하면 움직일 수도 없다. 노후를 위해 쌈짓돈을 모으듯이 다리 힘도 좀 모아야지. 지금은 내가 쳇바퀴 속에 있어서 여유가 있으니 너한테 투자할게. 내가 잘리면 그때 네가 갚아라”
“허허! 친구야! 그러다가 못 갚으면 노인정에 앉아 내 씹으려고 그러지. 그렇잖아도 벌써 걱정이다. 거래처들이 이름있는 회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서 네가 정년퇴직하기 전에 내가 먼저 실업자 될 것 같다. 그럼 너는 내한테 투자한 보답도 받지 못하고 그때는 투자가 아니고 저 놈 저거 알아서 사라졌으면 할걸”
“그때는 그때 생각해보고 오늘 시간 한번 내라. 오랜만에 스크린에나 한번 가자”
“그날 후로 채를 잡지 않았으니 벌써 다섯 달이니 지났네. 우리가 얼굴 못 본지 그렇게 오래 됐냐?”
“그러게. 세월 참 빨리 간다. 그날 후로 한번도 골프 친 적이 없단 말이야? 믿어지지 않네. 너처럼 골프 중독자가”
“얘기했잖아. 주머니 돈 없으면 안 쓰는 게 버는 거라고. 좋아. 퇴근하고 전부 치지 말고 9홀만 치고 한잔하러 가자.
“너 몸 풀기도 전에 마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얘기했잖아. 꼼짝 않고 쪼그려 있어서 오늘 밤에 너한테 한잔 살 돈은 있다. 마음 놓고 휘둘러라”
“야! 야! 벼룩이 간을 빼먹었으면 빼먹었지 내 주머니 털 생각 없다. 한 시간이면 마치겠지?”
“그래! 있다가 보자”
전화를 끊고 부두 앞 경비실에 도착한 방우는 잠시 경비 눈치를 봐야만 했다.
“이 여편네가 전화할 때마다 통화 중이야”
인상을 쓰고 구시렁거리는 입에서 여편네 소리를 들어 방우는 더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