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빌미도 아닌 그 놈과의 정사를 무기로 내밀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거나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이루지도 못할 사랑에 매달려 저지른 사욕이 빌미가 돼 깨깨 묵은 짓거리에 벌을 내리 것처럼 점점 더 배배 꼬여가는 문제들만 생기는 것 같았다.
기댈 때가 한곳도 없었다.
친구인 경미도 돌아서 멀어졌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외로운 철새가 된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발단은 최근에 남편이 벌린 사욕을 해결하기 위해 왔는데 무슨 이유로 과거 자신의 사욕을 해결하러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건 분명히 사욕이 아니었다.
그의 오지랖 넓은 친절이 빚어낸 친절을 사랑으로 착각한 자신의 실수였다.
정말로 장난 삼아 던진 돌멩이에 죽음을 맞이한 모판 속의 갓난 개구리였다.
그때 지금처럼 모질게, 냉혹하게 벌을 내렸다면 이렇게 비참한 정신적 몰락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정신만 황폐해지고 있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는 경제적 몰락도 휩쓸고 온다는 불길한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건 자명한 사실이 될 것이라는 상상이 자꾸만 가슴도 머리도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몰락에 출연한 배우들이 우연찮게도 그때 그 인물들이고 어쩌다가 자신이 주역을 맡은 것만 같았다.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그 당시에 그 놈과 윤연어 사이의 사랑을 지켜 보면서 그때 당장이라도 세상을 다 가질 연인이며 부부로 보여 부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걸 가지질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측은하다는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건 가슴 속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 놈 때문에 자신만 초라해진 것 같아 분하기만 했다.
오래 전 학창 시절에 동창들에게 박혀버린 양아치란 이미지가 다시 회귀한 것만 같았다.
너무 잔혹했다.
냉정하게 잘 잘못을 가리자면 책임은 그 놈에게 더 많았다.
최근에 벌어진 모든 이야기는 배경만 다를 뿐이지 인물은 똑 같았다.
그때는 그 놈이 알아서 멀리 떠났지만 이번은 아닌 것 같았다.
깊이 개입돼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자신의 곁이 아닌 윤연어의 곁에만 있었다. 도대체 그 놈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지 묻고 싶기보다 멀리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두 번 다시 볼일이 없는 깊숙한 곳으로 숨고 싶기도 했다.
고향을 잘못 찾아와 두리번거리며 방황하는 윤연어가 아닌 물고기 연어가 된 기분이었다.
김경일이야 경쟁 회사이기 때문에 나설 이유가 없다지만 고동우는 그 동안 받아 간 돈이 많았는데도 가장 치졸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남편 주위에서 얼쩡거리던 형님, 동생들은 모두 떠나 버렸다.
양아영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 자포자기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부장은 다시 양아영의 공장과 김경일의 공장을 방문했고 두 공장을 강탈하다시피 합병을 시켰다.
그러나 그걸 강탈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양아영과 김경일과 같은 몇몇 공장들뿐이었고 그나마 고발 당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된다는 소문으로 가득했다.
“윤부장! 자네 말이야! 그 김경일하고 강성호 공장을 관리해야겠어. 공장장으로는 울산에 있는 젊은 친구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예! 김동원입니다”
“그래! 그 친구를 잘 가르치면 회사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 내가 사람 보는 눈이 각별하잖아”
순간적으로 윤부장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왜 웃어?”
회장 눈이 황소 눈알만하게 휘둥그렇게 크진 채 윤부장을 뚫어지게 쳐다 보며 묻는다.
윤부장도 입을 막고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듯이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물어본다.
“아닙니다. 혹시 이번에도 정군이 추천했습니까?”
“그럼! 자네도 그렇고 그 도둑놈 있잖아. 고 머시기도 그렇고. 허허허”
윤부장은 잠시 생각이 필요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사명을 수리 그룹으로 바꾸자고 건의하고 싶지도 했다.
“그럼! 그 정군 자리에 제가 입사했고 그 정형 자리를 제가 또 차지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냐! 내가 도둑놈을 그 자리에 앉힐 수는 없지. 그 놈을 내가 장학금까지 줘가며 키웠는데…. 쓸만한 줄 알았는데 아냐! 아냐! 믿을 수가 없어. 순 도둑놈이야. 아주 무서운 도둑놈”
윤부장은 너무 어이가 없어 실성할 것만 같았다.
수리와 회장님의 인연이 된 발단을 되돌려 보면 윤부장! 윤 연어였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 나를 여기에 입사시켜 준 것 같은 뉘앙스를 던져 자괴감을 들게 하고 또 무슨 이유로 그 내시 같은 고동우를 입사시켜 나를 괴롭히게 했는지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따져 보면 그 사람 주위의 사람들치고 나를 편하게 해 준 사람은 한 놈도 없었다.
김경일이부터 시작해 양아영이 고동우. 한 년 놈도 아군이 없었다. 그럼 이 놈도 적군으로 돌아서는 게 아닌가? 또 이 햇병아리와 신입사원처럼 티격태격 싸워야 하나?
머리 속에서 먹구름이 쫙 몰려 오고 있었다. 정말 괴이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윤부장은 무의식 중에 고개가 고층 건물 창문너머로 갔다.
처음 그 사람과 재회가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날 천둥 번개를 동반한 벼락이 내리치고 있었다.
다행이 오늘은 화창했다.
분명히 못을 박고 싶었다.
“회장님!”
회장님이라 부르기만 하고 얼른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윤사장! 왜? 궁금한 거 있어?”
“왜? 사장?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허! 이 친구! 정신을 어디 두고 있어? 이번에 인수한 회사들을 자네가 관리해야지. 이 친구는 공장장으로 하기로 했잖아”
“아! 예! 그런데 동원이 너 할 수 있겠어?”
회장님 미간을 좁혀 윤사장을 책망하듯이 쳐다보며 말을 한다.
“어허! 동원이가 뭐야! 공장장이라고 해야지. 아무 걱정 마. 강성호하고 김경일이는 조만 간에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 테니까 아무 염려 마! 아 참! 강성호 마누라가 똑똑하던데 그 회사에 관리 부장 자리를 맡길 계획이야. 그렇게 알고 있어”
윤부장! 아니 윤사장은 그 자리에 앉아 있어서 주저 앉지는 못하고 벌렁 누울 뻔 했다. 그때 동원이가 천만다행이 우군으로 나서 힘을 보태 주었다. 출신 성분이 같으면서도 수리와는 확실히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 순간에 동원이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수리는 두 가지로 단지 우겼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안 됩니다 와 그렇게 하겠습니다.
확실한 주관은 동원이가 훨씬 앞섰다. 그건 아마 수리는 그 세계를 일찍 떠났고 동원이는 계속 지키면서 잘잘못에 대해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있어 싹을 자른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고 연어는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