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왜 이래? 여기서 멈춰! 나는 오빠 복수의 대용품이 아니냐! 언제까지 그렇게 과거의 얽매어 있을래? 솔직히 난 오빠 이름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번에 만나서 다시 알게 되었어. 내 인생에 오빠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투명인간이었어. 부탁이야! 나를 핑계로 그런 복수하지마. 그럼 나는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어릴 때 그때의 오빠를 영원히 잊을 거야. 여기서 멈춰”
연어의 말 중에는 진실보다 거짓이 더 많았다. 이런 거짓말을 왜 줄줄 새내야 하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진실을 얘기하자면 같이 의기투합해 양아영의 나머지 삶을 산산이 부수고 싶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우리가 헤어지고 다시 만난 건 거의 23년만이야. 너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어. 내 삶의 23년은 공허했어. 앞으로 살아봐야 몇 년을 더 살겠어. 아마 23년 일거야. 나는 앞으로 23년을 너를 완전히 잊고 살 수 있어. 나에게도 23년 동안 사랑했고 사랑할 사람이 있어. 그러나 양아영은 아니라고 봐. 용서하려고 했지만 이번에 만나보니까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아주 이기적인 애였어. 내 가슴 한 켠에 공허했던 기분을 그 년에게도 꼭 선물하려고 해. 이번에 보니까 그 년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고 살았더라. 물론 부! 돈이지! 사랑이 아닌 돈 많은 신랑을 택했더군. 이 참에 나는 그년에게서 하나는 가지지 못하게 할거야. 돈! 자기 욕심대로 다 되지 않는 세상이란 걸 분명히 각인시켜 줄 거다. 너는 나를 비웃겠지만 나는 사랑을 훔치려는 놈은 돈을 훔치는 강도보다 더 중한 형벌을 받을 범죄자라고 봐! 더 이상 나를 막지마”
그의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단호했다. 밀려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몰려왔다.
“지금에 와서 어쩌려고? 오빠가 그런다고 해서 내가 오빠에게 갈 것 같아? 언니는 어쩌려고?”
갑자기 ‘언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에게 애가 몇인지 노총각인지 아닌지 물어 본적이 없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유도 같았을 것이다.
결혼을 했고 가정이 있고 애가 있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연어는 사실 이 사람에게 아내가 있고 애들이 있고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심장에는 오로지 윤연어란 이름만 간직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도 그래서였는지 단 한번도 신랑은 고사하고 애가 몇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과 벗어나기 싫어하는 미련 사이에 멈춰 있는 듯한 혼란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윤부장님! 지금 무슨 상상하고 계십니까?”
이건 또 무슨 말? 장난끼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화가 벌컥 났다.
“나! 농담할 기분 아니랬지. 뭐야? 지금!”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를 하고 풀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에게로 전해졌는지 그때서야 진지한 대답이 들렸다.
“허허! 농담이야! 사실은 나도 이번 일로 놀랐어. 이 일에 개입된 놈들이 하필이면 모두 너도 나도 아는 사람들이라는데 믿을 수가 없었어. 김경일이야 원래 그런 놈이니 한번은 대형 사고를 터트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얽히고 설켜있을 줄이야 나도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나! 깡패 맞아! 그러니 이제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궁금해하지마. 그리고 지금부터 추진하는 일에 신경 서 줘! 네가 아닌 윤부장이 회사를 위해서 할 일이야”
입술을 잠시 굳게 다물고 한숨부터 내쉬고 물었다.
“뭔데?”
“코딱지만한 소규모 회사들을 인수합병할거야. 내가 보낸 매일들 꼼꼼히 검토하고 숙지해! 그 고동우 같은 놈에게 계속 무시만 당하고 직장 생활 끝낼 수는 없잖아! 그러고 싶어? 그러면 신경 끊고. 여자라고 군림하지 못하는 시대는 끝났잖아”
이 말만 하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하필이면 이때 고동우는 왜 나와? 심장이 심하게 격하게 요동쳤다. 악이 바쳤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지금은 내 혼자 힘으로 불가능해. 옆에 있을 거지?”
“그건 회장님이 알려 주실 거다. 내가 할 일이 거의 끝나가. 주사위는 너한테 던져졌어. 나는 네가 부장이나 하고 직장 생활을 끝내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아. 회사에서는 아까운 인재를 잃는다고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로 인재를 잃는 거고. 섭섭하거나 나를 이기적인 놈이라고 보지 말아줘. 지금부터는 나는 네 힘이 필요해. 나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 조만 간에 서울에 가면 상세히 얘기해 줄 테니까 회장님이 시키는 대로 해줘! 그게 나를 위한 길고 또한 너를 위한 윈, 윈 의 길이야. 부탁한다. 우린 아직 젊잖아.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던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오던 한번만이라도 같이 손잡고 세상과 한판 붙어보자. 그게 돈이던 사랑이던 화끈하게 한판 붙어보고 나이 들어 뒤 구석에 쪼그려 앉아 미련이나 후회 같은 거 가질 짓은 하지 말자”
연어는 무슨 말인지에 대해 ‘인수합병’을 듣고 그의 밑그림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놈 고동우의 여자라는 이유에서 무시도 떠올랐다.
요란했던 이번 도둑질로 당했다고 생각하는 회사들이야 결론만 보고 억울하겠지만 과정을 보면 전혀 억울함을 호소할 수는 없다.
그들이 먼저 불법으로 제품을 갈취했고, 부를 누리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들켜서 그렇지 이전에는 더 많은 도둑질을 했다.
양아영도 김경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사랑을 갈취하려다 우리의 사랑을 도산으로 몰아넣었다.
이 모든 일들이 연어가 수리와 손을 잡는 데 합리화를 시켜 줄 핑계며 변명거리로는 충분했다.
연어는 비록 정신과 육체가 하나라는 사랑은 다시 붙일 수는 없지만 젊었을 때 패기 하나로 과와 친구들을 이끄는 그의 곁에서 같이 이끌던 그런 패기 있는 삶을 되찾고 싶었다.
“좋아! 같이 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은 대부분 깔아놓은 돗자리 위에 올려진 밥상에 수저만 들고 포식을 한 건 사실이었다.
업무 중 대부분은 영업부 남자 직원들이 발 품을 팔아 가져온 거래처에 대해 검토와 결제만 한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직접 찾아간 거래처들도 대부분 남자 직원이나 선배들이 뚫어 둔 회사들이었다.
입사 후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전쟁터에서 총을 겨눈 적군 앞에서 총을 겨누고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갓 입대한 신병 같은 경험을 단 한번도 한적이 없었다.
정말로 차려놓은 밥상 근처서만 얼쩡거리다가 몇 숟갈 얻어먹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고대리가 무시한 건 당연한 사실이란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고대리가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윤부장은 고대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양아영과 김경일도 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