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회장님께서 들어 오시랍니다”
윤부장이 하던 일을 멈추고 회장실로 들어갔다.
“윤부장! 보험처리가 왜 이렇게 더뎌? 이러다가 일 년 넘기는 거 아냐?”
윤부장은 영업뿐만 아니라 보험 처리 업무에서도 이 회사에서는 최고의 프로가 돼 있었다.
프로가 되기까지 울산에 몇 번 더 내려가야 했고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써 그러지 말아야 된다는 반성을 수도 없이 하면서도, 이러면 안 된다 하면서도, 옛날 그때보다 더 뜨거운 밤낮을 보내고 왔다.
마치 졸업 후 만나지 못한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을 듯이 회사 보험 일은 제쳐 두고 수 십 년 동안 가슴에 지닌 그리움이란 보험료를 뜨거운 사랑이란 보험금으로 거의 대부분 돌려 받았다. 나머지는 또 부딪힐 수 있는 만약의 만남을 위해 남겨 두었다. .
“예! 보험회사에서 이 달 내에 마무리한다고 했습니다”
“이 달 해 봤자 모레네”
“예! 오늘 중에 처리될 것 같습니다”
그때 총무부 부장에 들어와도 되냐고 비서가 물었다.
“들어오라고 해”
“회장님! 보험처리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윤부장! 이번에 아주 잘 했어. 역시 윤부장이야. 허허”
그 일은 오늘로써 종결이 되었지만 연어는 왠지 개운하지 않았다.
본인이 한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이 처리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번 일로 보험처리에 관해서는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이 알고 처리할 직원이 되었다.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 가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오빠! 뭐해?”
“참!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회장님에게 내가 일한 대가를 달라고 해 줘. 이게 뭐야! 계산서까지 발행해버리고. 현금으로 달라고 해”
“오빠! 난 거기까진 모르는데”
“야! 너 부장이잖아. 부장이 모르면 누가 알아?”
또 고대리가 떠올랐다. 자존심이 또 상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해줄 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 알았지? 오늘 완료된 사실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어떻게 알았어?”
“날아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 허허허”
“그럼 나도?”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받아 드리는 게 달라서 잠시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나온 대답이 왠지 이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간절한 절규 같은 게 가슴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내 가정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 후배야!”
‘후배?’
그럼 나는 이 사람의 후배 밖에 되지 않는가? 그럼 다시 왜 가슴에 불을 붙였지?
“오빠! 후배라니? 섭섭해”
“그럼 동생이랄까? 만약에 네가 자네 신랑과 같이 길가다가 우연찮게 나를 만났을 때 입버릇으로 갑자기 오빠가 나오면 어쩔 거야. 이번에 보험처리 하듯이 말도 보험 처리처럼 조심해야지. 나는 너하고 오래도록 만나고 싶다”
앞 뒤의 모든 말들이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후배가 아닌 사랑하는 연인으로, 동생으로 오래도록 남고 싶다는 마음과 이제 부담에서 떨어지고 싶다는 소망 사이에서 연어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말에서 오락가락하는 걸 봐서는 지금 그도 같은 마음 같았다. 오히려 그런 마음을 읽고 나서 연어는 정신이 번쩍 들었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두고 싶었다.
“어이! 정형!”
“예! 회장님”
오랜만에 회장이 수리를 찾았다. 길게 통화를 하고는 보스에게 전화를 걸어 길게 통화를 하고는 동원을 불러달라고 한다.
“형님! 우리도 한철 간 것 같습니다. 허허. 회장님께서 저보고 이제 뒤로 물러나랍니다. 섭섭하네요. 저 아직 힘있는데”
“너! 힘없어. 임마! 올라오는 걸 보니까 다리가 많이 후들거리던데”
“형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허허. 회장님께서 애 하나 키우라는데요”
“그럴 때도 됐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이제 좀 편하게 살자. 나는 애들이 많이 있어 괜찮지만 너는 물려 줄 놈이 없잖아. 진작에 하나 키워두지”
“왜 없어요? 동원이 있잖아요”
“안돼! 그 놈은 여기를 책임질 놈이야”
“형님! 무식한 사람들이 회사를 운영하는 시대는 끝났어요”
“뭐? 내보고 무식?”
“그럼! 형님이 유식해요? 허긴 주먹은 유식하죠. 그건 제가 인정”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동원이 키울 자신이 있어? 걔도 너처럼 고지식한 놈인데”
“아무리 못해도 형님보다는 낫겠죠. 너한테 맡겨주십시오. 동원이는 여기 있을 애가 아닙니다. 앞으로 크게 될 놈입니다. 형님도 정년 퇴직 후에 막걸리라도 사 줄 놈은 있어야죠. 아직 주먹이 살아있어 굽실거리는 놈들이 있지만 형님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다리에 힘 빠지면 서럽습니다”
권태가 갑자기 측은한 얼굴로 변장을 하고는 애처롭게 칭얼댄다.
“야 임마! 이제 나도 너한테 인정받고 싶어. 딱 한번만 인정해 주면 안 되겠니?”
수리가 빙긋이 웃으며 테이블 옆에 펴지도 않은 신문을 툭 던져준다.
“크게 읽어 보세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눈꼬리를 비틀어 완전히 무시하는 말투를 던졌다.
“내가 왜 읽어. 비서도 있는데. 너 임마! 한 입으로 두 말 하지마. 네가 국회나 갈 자격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그건 정치꾼들이나 하는 짓이야. 자식이 입만 열면 일 자리 창출, 실업자 구제가 정치 꾼들 개 소리라 떠들면서 네가 일자리를 뺏으라고 해? 내가 글을 읽을 줄 알면 비서는 어디 가서 돈을 벌어. 그러니 앞으로 내보고 글을 더 이상 배우라고 하지마. 이 정도면 됐어. 메일 보내는 것도 괜히 배워서 귀찮아 죽겠구먼. 어이 싫어! 싫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비서에게 동원이를 부르라고 한다. 잠시 뒤 동원이가 들어왔다.
수리가 들고 온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면서 동원에게 묻는다.
“동원아! 이제 주먹질 그만하고 내가 하는 일 배워. 주먹질도 한 철 가서 이제 사양산업이야. 조금 있으면 줄줄이 부도나. 형님도 곧 실업자 되고. 그래도 의리 하나로 뭉쳤는데 형님을 길바닥에 버려둘 순 없잖아. 힘 빠진 형님에게 적선하는 셈치고 내가 하는 일 배워”
잠시 관심을 보이고는 서류로 고개를 숙이던 동원이가 뒤로 물러나 앉아 입술을 불퉁히 내민다.
“싫습니다. 간병인들 실업자 만들기 싫습니다”
테이블에 내놓은 서류를 얼른 집어 든 권태가 수리 얼굴로 던져 버리고 서류가 허공으로 날개 짓을 하고 있다.
“에라 이놈아! 가지고 놀아라. 가지고 놀아”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주섬주섬 집어 들던 동원이가 한참 동안 시선을 서류에 고정시키고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어? 꼬부랑 글씨도 있네. 안 합니다. 정신건강에 해롭습니다”
수리가 동원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차분하게 다독이고 있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 보다는 덜 위험해. 이 생활도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서서히 정리해야지. 형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죠?”
권태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며 의지할 때 없는 사람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울먹이듯이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 요양병원에만 안 보내면 언제 던 오케이. 이 한 몸 잘 부탁한다”
“그건 조카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 회사에 까지 누를 끼칠 생각은 마세요. 공금 횡령에 갑 질에 해당되는 범죄입니다. 우리하고는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괜히 바쁜 직원들 경찰서나 검찰에 조사 받으러 가게 않게 해야죠”
수리가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려 눈살까지 흘기며 또 능청을 떨고 있었다.
권태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수리를 쳐다보고 있다.
‘얄미운 놈! 건방진 놈! 자근자근 씹어 버리고 싶은 놈! 미워도 밉지 않은 놈’
약간은 화가 난 얼굴로 번쩍 떠오른 뭔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