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20년이 갓 지날 무렵에 만난 남자의 친절을 사랑으로 오판했고, 그 오판이 그 사람에게는 욕심 많은 년으로 뇌리에 꽂혀 있을 게 분명한데, 세상에 나오고 사라지고가 자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태어난 후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의 평균 수명은 있다.
어찌 보면 남은 수명이 그때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삶을 썼던 기간과 남은 기간이 거의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부끄러운 과거를 잊는데도 거의 20년이 걸렸는데 또 남은 20년을 부끄럽게 사는 건 너무 잔인했다. 이번에는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남편도 헤어지면 남이니까 타의에 의해서 부끄럽게 살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남편의 삶은 정당한 삶이 아니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분명히 정상적이지 않는 불법이다. 하물며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마치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동시에 나타났다.
김경일, 정수리, 윤연어.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을 정상적인 후배로 동기로 봐 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뇌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방금 전 경미와 같은 이미지로 자신이 심어져 있을 게 분명하다. 절대로 변하지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섰다.
그런 그들에게 신랑이 강성호 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또 숨어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고 지긋지긋한 악연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들과 아주 멀리 벗어나 살고 싶어 비슷한 연령도 아닌 열 살이나 더 많은 신랑에게 시집을 왔는데 어떻게 연어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다시 과거로 회귀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당시 그 인물들이 그때처럼 똑같이 나타났다. 수리라는 사람이 지금 갑자기 나타나듯이 그때도 갑자기 나타나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원인 제공은 그가 했다.
오지랖 넓게, 줏대 없이 한창 감성이 여린 나이의 이 년 저 년들에게 과잉 친절을 베풀었다.
그가 행한 짓은 개울에 던진 투망과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맑은 개울물에 투망을 던져놓고 여러 마리의 걸려던 물고기중에 몇 마리를 골라 맛을 보고는 입맛에 맞지 않으면 던져 버리는 그런 악랄한 놈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짓을 하다가 진짜 입맛에 맞는 물고기를 놓친 거나 다름없는데 그 탓을 다른 사람에 책임을 전가시킨 것만 같았다. 마치 책임을 전가 받은 자들을 복수의 타깃으로 삼아 향해 달려 오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최대의 피해자는 경미와 자신이었고 복수의 칼날을 집어 들 자도 경미와 자신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경미도 모두가 자신을 향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디 한적한 절에라도 들어가서 과거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단 몇 시간의 한바탕 난리가 있은 후로 정말로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시간들이 흘려갔다.
너무 조용한 정적이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그 소란이 지난 후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도 그 난리는 둘째치고 임운영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걸핏하면 이영재와 작당해서 제품을 빼돌려 와 양아영이 공장에 화물을 내려 놓고 돈을 요구했다.
마음은 불안했지만 알아서 가져다 주니 고맙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때 작은 영세 공장들이 원료가 부족하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고 공수를 해줘야만 했다. 신용은 지켜야 했다. 그 사건은 단지 어느 누군가와 김경일의 앙금으로 시작됐고 거기에 운 나쁘게 고동우가 끼어들어 흉측한 얼굴을 가지게 됐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묻혀져 버렸다. 모두들 잊고 있었다.
빵빵! 빵빵!
“고장 났나?”
울산과 경주 사이인 여기는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몇 명 작은 공장을 제외하고는 온통 야산이었다.
야산에 작은 공장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지금은 야산 뒤편까지 모두 중소 공장들로 가득 찼다.
임운영이 탱크로리에 실은 석유화학제품도 지금 작은 공장에 납품할 제품이었다.
야산을 개간해 공장은 많이 들어섰지만 길은 아직 처음 공장이 들어설 때 그대로였다.
빨갛게 색칠된 아주 작은 차 하나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저런 차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모는 차고 이 산골짜기에 온 이유는 분명히 자기가 납품하는 공장에 업무 차 온 차라는 생각이 들어 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만 더 가면 오르막을 지나 내리막으로 가는데 지금 자기 차도 앞차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해도 중턱에 걸려 있었다.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산 아래로 작은 공장들이 하나 둘 불을 켜기 시작했다.
‘똑똑’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뚝 화부터 났다. 빨리 하차하고 집으로 가던, 한잔하러 가던, 가야 하는데 길을 막은 운전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앞 유리에 연락처도 붙어있지 않았다. 뒤 범퍼를 발로 한대 세게 걷어차버린다.
‘바지락’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후진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길이 너무 좁았다.
직진을 해야만 차를 돌리고 모른척하고 도망을 칠 수 있는데 이 놈의 차가 앞을 가로 막고 있다. 낮은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할 수없이 차에 올라 후진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조심스럽게 후진을 하고 있는데 ‘빵빵’ 소리가 들렸다.
오도 가도 못할 난감한 길에 설 수 밖에 없어 다시 차를 세우고 훌쩍 뛰어 내렸다.
“아저씨! 죄송해요. 제 차가 고장이 나서 지금 신랑이 오고 있어요. 바로 차 뺄게요”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차만큼 키가 작은 아가씨처럼 보이는 여자가 연신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화도 낼 수가 없었다. 그 뒤를 따라 내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남자를 보고 임운영은 화 낼 생각은 아예 없었지만 그마저도 숨겨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 집사람이 외근 나왔다가 차가 고장 났다고 해서… 바로 빼겠습니다”
이 여자 키와 덩치의 세 배는 돼 보였다.
“아! 예!
그러고는 차에 자기 몸을 꾸역꾸역 집어넣고는 바로 나와서 고함을 질렀다.
“야! 이거도 못 고치면서 무슨 운전을 해. 빨리 차 빼”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좁은 길에 차를 뺄 장소는 임운영이 제품을 내려야 할 공장밖에 없어 샌드위치가 돼 공장에 도착했다.
“누구?”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못마땅한 얼굴로 임운영을 쳐다보고는 묻는다.
“예! 중간에 차가 퍼져서 신랑이 데리러 온 모양입니다. 저 여자 거래처 직원 아닌가요?”
“아닌데”
그 사이에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여자가 얼른 쫓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