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눈만 마주치고 있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의문이 하나 둘 쌓이다가 엉망투성이로 엉키기 시작했다.
학창시절에 이 사람을 좋아했던 건 산적 같은 외모에 어울리게 항상 앞장서서 리드를 했지만 마음은 굉장히 여렸다.
그의 부모님도 본인 연어의 부모님도 살뜰히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변해 있었다. 가장 먼저 변했다는 걸 느끼게 하는 건 강단이 확실히 나타나는 단 답씩 말투였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냉혈 동물로 탈바꿈 시켜 놨을까?
연어는 자리서 일어서 다가가 허리춤을 감싸고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물었다.
“오빠 맞아?”
눈치는 빨랐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학창시절에 내가 잠시 내 자신을 착각했어. 내가 준 데이터를 회장님께 드리기 전에 네가 이해를 다 해야 해. 지금 나가는 순간에 나란 존재 자체를 머리서 삭제하고 이 일에 정신을 집중해. 알았어?”
무서웠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했던 상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말은 드라마에서 본 군대나 깡패들이나 하는 말이었다. 인간의 의견이나 사상을 깡그리 무시한 명령이었다.
명령을 하달 받은 연어는 다음 날 회사로 복귀해 수리가 작성해 준 데이터에서 오타 난 부분을 약간 수정해서 회장실로 들어갔다.
“자네 고생 많았지? 내가 얘기 들었어”
왜 그런 미소를 머금었는지 연어는 안다.
약간 수줍은 미소로 회장님과 눈을 마주치고는 웃었고 회장님도 인자한 미소로 화답을 해주었다.
연어는 아직도 그와 회장님의 울타리 속에 보호받고 있는 고대리에게는 질투와 시기의 상징으로 오래도록 남을 거란 판단이 섰고 승자는 본인이고 패자는 고대리임이 분명한 것도 알고 있었다.
이번 기회로 이 사실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우습기도 했다.
신출내기 대리와 결전에서 이겼다는 성취감이 자신을 더 초라하게 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약한 놈은 센 놈의 힘이 필요하니까.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연어는 고대리처럼 간사한 놈이 아닌, 년이 아니었다.
만약에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런 경험을 절대로 없을 것이다.
부장으로 진급하고 난 뒤에 연어는 자신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부담으로 의기소침해 있었다.
이번에 출장을 다니면서 내면에 감춰져 있던 약점이 아주 사라진 것 같았다.
자신감도 많이 생긴 것도 또 하나의 변화였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든든한 우군이 언제던 다시 나타나 힘이 돼 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또 어떤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질 지 기대도 됐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도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끝까지 지금처럼 지키고 싶어하는 소망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어느 누구나 갈망하는 가정의 안정이었다.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까지 작전대로 착착 맞아 떨어져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형님! 임운영이가 강성호에게 가지 않고 김경일이 회사 방향으로 차를 돌렸답니다. 그리고 계속 뒤따라가는 승용차도 있습니다”
“승용차 차량 번호가 몇 번이래?”
“예! 4244랍니다”
“그래? 잘 됐네. 그 놈이 고동우야. 그 놈은 혼자 움직이는 놈이니까 그 공장에 몸짓 제일 빠른 애를 보내. 참! 정장 입혀 보낸 건 아니지?”
김동원이 수리에게 시시각각으로 보고를 하고 있고 수리는 사사건건 경계를 늦추지 마라고 마치 작전지휘 본부에서 인공위성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지시를 내리고 있다.
“정말 계속 저를 어린애로 보실 겁니까? 기분 나쁘게. 염려 마십시오. 지금부터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보고를 한 음성이 다르게 전달되진 것 같았다. 마주보지 않아서 동원이 어떤 얼굴로 있는지는 모르지만 화를 내는 걸로 들린 수리가 구시렁거리며 명령조로 하달한다.
“자식! 화는 왜 내! 그럼 질질 끌지 말고 오늘 하루에 끝내. 알았어?”
“예! 애들에게 잘 얘기해두었습니다. 저도 이런 일은 귀찮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가 국도에 진입한 임운영이 능숙하게 가는 걸 보면 한두 번 가 본 동네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뒤를 따라가는 4244 승용차도 마찬가지였다. 고속도로에서 국도에서 간혹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입하는 톨게이트는 동일했고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 여러 갈래의 국도에 진입해서도 방향은 같았다.
“야! 둘 중에 하나만 따라가도 되겠다”
김동원이 보낸 대원들이 고동우 차인 4244와 임운영이 차인 탱크로리를 줄곧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고동우가 임운영에게 전화를 한다.
“사장님! 강사장에게 전화 안 왔어요?”
틀어놓은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을 하고 있다.
“어! 고부장! 잘 따라오고 있지? 당연히 왔지. 영감태기도 그 마누라라도 전화가 안 오면 문자가 바로 왔겠지. 허허허”
휴대폰을 통해 들리는 말에 히죽거리며 고동우도 같이 흥을 돋우고 있다.
“조문오라는 문자오면 안 되죠. 최고의 사업 파트너인데 일찍 가면 우리도 타격이 커요. 허허”
“마누라 있잖아”
“어이고! 그런 말 마세요. 완전히 암 양아치입니다”
“허허! 양아치가 아니고 양아영이잖아. 허허. 젊은 년이 대단해! 걔들 스무 살 차이 난다더라”
“그러니까 양아치죠. 돈보고 결혼한 모양이던데요”
운전 중에 가장 위험한 짓이 전화 통화이기도 하지만 가장 지루하지 않는 짓은 이런 식의 남의 가정에 대한 깨끗하지 못한 가정 사를 헐뜯는 통화다. 고동우와 임우영은 거의 황홀경에 빠져 신나게 험담내기에 열을 올리며 고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더라. 그런데 별 볼품도 없던데.. 그 참 신기하지. 그 영감이 젊어서부터 돈을 엄청 많이 벌었어. 지금은 저렇게 도둑질을 하지만 젊었을 때는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더라. 자수성가한 거지”
“그 참! 도둑질을 부지런히 했겠죠. 허허허. 잠깐만요. 다른 기사들은 오고 있어요?”
“그래! 한대 실어면 40분 걸리니까 지금쯤 다 출발했겠다. 나오는 라인이 10개잖아. 두 대는 강사장 공장으로 보냈어”
고동우가 임우영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일일이 확인하면서 재촉도 하고 있다.
“오늘 안에 모조리 해치워야 합니다”
임우영이 의기양양하게 대답을 한다.
“부장님! 우리가 하루 이틀 했어요. 우리도 오늘 안에 다 해치우려고 해요. 강사장 공장까지”
고동우가 신이 나서 떠들다가 가벼운 입을 가지고 태어난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촐싹거리다가 기어이 핀잔 들을 헛소리를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