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저희 공장에 원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공장 전체에 불을 끌 사태가 벌어져요. 아시겠지만 잠시라도 불을 끄고 다시 가동하려면 피해야 막심한 걸 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재고가 아예 없는가요? 저희들 급합니다. 탱크로리 한 대만 이라도 안될까요? 18톤 정도만이라도 보내주시면 불을 끄지 않아도 되는데…. 부탁합니다”
며칠 사이에 이런 욕처럼 들리는 18이 포함된 전화를 받은 건 한 두통이 아니었다. 지금 이들이 독촉을 하고 있는 원료인 석유화학제품을 수입해 저장하고 있는 보세장치장에는 원료가 거의 동이 나 있다.
부장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빨리 납품하겠다는 부장 본인도 전혀 알지 못하는, 기약도 없이 희망만 담은, 본인의 기대로 인한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날짜로 조바심만 더 불러 일으켜주는 막역한 대답뿐이었다.
그럴수록 부장 가슴도 부장 회사에서 수입한 원료를 구입해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의 대표나 담당자들만큼이나 갑갑하게 조여졌다.
이런 식의 압박이 내포된 간곡한 읍소의 전화를 끊은 윤부장 표정이 창 밖의 먹구름처럼 어둡기만 하다. 불안, 초조, 긴장 등등, 그런데 그 속에는 간절한 바램이 생산한 ‘설마’라는 말을 집어넣은 기약을 알 수 없는 희망도 함께 포함돼 있다.
이런 배짱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건 아마 20년이 넘게 몸담아 온 이 직장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버릇이 언변의 실력으로 승화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히 입 꼬리가 치켜져 올라 갔다.
말 그대로 곧 죽을 것 같이 호들갑을 떨어도 납품 기일에 맞춰 납품을 못해 죽은 직원은 아직까지는 단 한 명도 없어서였기 때문에 이런 식의 자신감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긴장이 되고 조급증 증세가 일어나는 건 20년 넘게 이 직장이 요구한대로 복종하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생겨난 책임감에서 비롯돼 자연스레 빨려 들어 가는 게 아닐까 한다.
계약된 납품 기일에 맞춰야 할 텐데… 직업병 아니 직장 병, 회사에 녹을 먹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굳이 병명을 새로 짓자면 당연 병이다. 초조하게 창 위도, 아래도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이것 말고 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것이 뭔지에 대한 정체를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이런 마음이 시작된 건 지명을 떠올리면서부터 생겨났고 당연 병 속에 따라 다니는 불안 등에서 전혀 별게의 설렘 같은 게 추가된 것 같기도 했다.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고 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귀여운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진다.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아직까지 단 한번도, 벽에 대고도 조차도 발설하지 않은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낮 11시 45분. 18층 아래 세상에 인적도, 가로수도, 매연을 품어내던 운송수단들도,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던 사물은 짙은 구름과 빗방울에 가려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간혹 바지직 소리에 장단 맞추는 가늘고 긴 섬광들뿐.
그건 강렬한 태양이 자기 영역을 침범한 검은 먹구름에 분노해 날리는 강력한 펀치였고 먹구름은 아주 세차게 얻어터져 잘게 갈기갈기 부셔진 채 파편으로 하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깨지지 않은 구름은 벌겋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불구경과 남의 부부의 불붙는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듯이 태양과 구름 싸움을 구경하려고 윤부장이 창가로 바짝 다가가 서 있는 건 절대로 아니다.
윤부장은 그런 류의 저급한 인간은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 하늘 꼭대기를 멀뚱히 근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벼락 소리 뒤로 몰려오는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 소리에 놀랄 기분은 아예 없었다.
거의 읍소하듯이 원료를 빨리 달라던 거래처 담당자와 그 회사들의 대표의 돌변한 목소리가 벌써 귀청으로 파고 들어 온 것처럼 앵앵거리며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아니! 부장님! 원료 수입하는 데도 부장님 회사밖에 없는 줄 알아요? 미리미리 수입해둬야지’
그때는 존칭어가 전혀 필요가 없다. 잠시 미간을 누르고는 고대리를 불렀다.
“저기! 고대리님! 배가 언제 들어 온데요?”
창 밖으로 가 있던 고개를 백팔십도 뒤로 돌려 고대리에게 물었다.
분명히 눈을 마주쳤는데도 아무런 반응도 대답이 없이 못 들은 척 한다.
벌써 심장이 지금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저 놈이 행했던 소행까지 들춰내고 있다. 임원이나 남자 상사가 같이 있는 자리 외에는 단 한번도 저 놈에게서 나긋나긋한 보고를 받은 적이 없던 윤부장의 속에 저 놈은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가슴도 부정으로 지금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저 놈은 윤부장뿐만 아니라 사내의 모두가 내시 같은 놈이라 부르는 이유는 자기와 다른 성별을 가진 동료들뿐만 아니라 상사에게 조차 이런 질문, 선박과 관련한 질문에 응대하는 행태는 한마디로 가관이라 모두를 진절머리가 나 있는 상태인데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는 정말로 바지를 벗기고 싶을 정도의 간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동료들을 무시할 수 있는 업무는 단 하나다.
방금 질문을 한 배! 선박에 대해서만 유독 혼자만 잘 났다고 거만스럽게 동료들을 무시하고 있다. 하물며 여자에게는 어떻겠는가? 물어 볼 가치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양대학이나 선박과 관련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다. 전공이 뭔지에 대해 이 회사에서 아는 사람은 회장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고대리님!”
똥이 나올 정도로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도 들은 척 만 척 하더니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열심히 떠들고 있다. 분명한 건 고대리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전에 먼저 물었다. 한쪽으로 치켜 올려진 입술에서 분명히, 무시의 의미인 ‘피씩’도 감지되었다.
입술을 악물었다. 무슨 이유로 고대리를 불렀는지 망각할 정도의 이상 야릇한, 흔히 말하는 개 무시당한 기분에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며 이글거렸다. 그 뒤를 따르던 음흉과 비아냥의 미소는 저 놈 대갈통과 가슴 속 깊은 밑바닥 어딘가에 잠재된 성차별이 바탕이 된 무시와 학대가 분명히 내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저 놈이 했던 행사머리와 태도에 대해 추리해 본다면 ‘제까짓 여편네가…..’ 수 만 가지의 개 무시의 어휘들이 떠올랐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누구나 그렇듯이 윤부장도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자신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내면에만 존재했던, 익히 알았지만 세상에는 없는 말로 치부했던 말이 나올 까 말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를 바드득 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