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희의 거친 콧바람이 불호령이 떨어질 카운터다운인지도 모르고 ‘아무데서나 그래요’란 한마디를 두고 주제 넘지만 아무에게 구속 받지 않는 연모의 세상에서 나오기 싫어했던 수리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한치의 거짓도 없이 무조건이라는 부사까지 넣어 늘 떠벌렸던 말. 여자는 무조건 예쁘면 된다. 남자는 무조건 돈만 많으면 된다. 일단 자신은 뒤로 내팽개치고, 안주임! 얼굴에 반했으니 미모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몸매는 팔등신이다. 무조건에 부합된다. 다음은 본인! 돈! 없다. 빚도 자산이라 했으니 안주임 몇 년 치 연봉에 속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다.
이 사람은 그 동안 만났던 여자들과는 전혀 별개의 사람은 맞지만 그 사람들이 안주임보다 못 한 건 절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단지 지금 첫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뿐이라며 현실을 거부하면서 수리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전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싶은 마음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완력으로 하고 싶어했어 하기도 했고, 완강한 거부로 하지 않은 적도 있었고, 자신도 원했지만 상대가 먼저 원하면 지저분한 사람이란 판단을 내려 거부하고 이별 통보도 없이 멀리 한 적도 숱하게 많았다. 여자들과 발가벗고 쾌락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비록 돈으로 해갈을 했지만 한 건 한 것이다.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들을 돌이켜 보면 사귀는 동안은 애정도 없는 밋밋한 사이는 아니었다. 헤어지고 난 뒤, 단지 무 자르듯이 미련을 깔끔히 털어버리고 지나치다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과 같이 똑같이 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도 지금 수리 마음에 걸리고 있다. 만약에 안주임과 연인이 되거나 부부가 돼 혹시라도 그 사람들과 안주임이 친구나 아니면 그저 아는 사이라면, 분명히 과거의 이야기들이 안주임 귀에 들어 갈 것이다. 좋던 나쁘던 다른 여자의 입을 통해 듣게 되면 안주임은 분명히 불쾌해할 것이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떡 줄 사람은 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내가 왜 이러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수리 표정이 아주 쓴 음식을 씹은 듯이 죽을 상을 쓰고 목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흔들어댄다. 그때였다.
“아니! 이 봐요! 사람이 묻는데 왜 대답을 안 해요? 그까짓 한마디가 그렇게 기분 나빠요? 남자가 무슨! 이런 밴댕이….”
수리가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내가 굼벵이라 했다고 바로 복수하네. 왜? 소갈머리까지 넣어 마무리 하지. 그런데 뭘 물어봤지? 아! 굼벵이! 게발 선인장!’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대답을 했다.
“아! 예! 아무데서나 키웁니다.”
‘이 놈도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나?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왜 엉뚱한 소리만 하지? 그렇게 내가 만만한가? 그래도 갑인데. 그런데 내가 뭘 물어봤지? 내가 잠시 흥분했나?’
긴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안주임은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 끝내 이부장과 박대리의 하는 짓까지 연계시켜 자격지심에 빠져 수리를 보게 돼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끝낼 순희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데서나 키운다니?”
“아! 선인장 얘기입니다. 굼벵이 나왔던 그 선인장 얘기였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때였다. 수리 휴대폰에 벨이 울린다.
“응! 응! 그래! 지금 가고 있어. 그래! 엄마!”
자칫 잘못했으면 순희 입에서 침이 튀어나올뻔했다. 푸 소리가 나올 뻔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 수리를 쳐다보고 웃고 말았다. 전화를 끊은 수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얹잖게 물었다.
“왜 웃어요?”
“아니! 나이가 몇 인데 아직도 엄마라고 해요?”
전혀 아무렇지 않게, 어떤 표정도 없이,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정면의 차선만 보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그럼 엄마보고 엄마라 하지. 아빠라고 하나요? 아빠가 전화했으면 당연히 아빠라고 불러야죠. 아빠라도 아빠라고 부를 아빠라도 계시면 좋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순희 입이 닫혀 버렸다. 아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무슨 잔소리던 꽤나 했을 것이다. 아빠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숙연해졌다. 가슴도 울컥해지면서 입술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순희에겐 오늘 같은 날이 아버지가 꼭 필요한 날이었다. 고개를 차장 밖으로 돌려 멀뚱히 지나치는 차만 보고 있다. 수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찔끔 나온 눈물을 닦는다.
눈물을 닦을수록 아버지 생각에,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눈물 샘이 터지지 않게 눈도 감고 입술도 힘차게 누르고 있었다.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 내린다.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순희 시선은 차창 밖으로만 향해 있었고 수리는 앞만 보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총알처럼 차에서 내린 수리가 문을 열어준다.
“고맙습니다.”
그냥 목례 정도만 하고 빨리 갔으면 하는 게 순희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과잉 친절이 상대를 더 불편하게 하는 사회적 해악이란 사실을 수리가 곧 알아차린다. 오지랖 넓게 눈물까지 닦아주는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죠. 이렇게 도와주시는 데 식사도 대접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조만 간에 제가 식사자리 한번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장한 청년들처럼 허리를 구십도 내려 인사를 하고 돌아서다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다시 돌아서 사과를 한다.
‘빨리 가라! 이 새끼야!’
잠시 스친 순희 영혼의 말이었다. 눈치라고는 개똥만치도 없는 놈이 자기 합리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고 순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안주임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 한 농담이 많이 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솔직한 안주임 마음은 정강이를 한대 걷어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알면서도 왜 그랬어? 내가 그렇게 우스워? 조금만 빨리 만나고 아는 사이였으면 너 오늘이 제삿날이었다. 이놈아! 너!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낮에는 고마웠다. 그러나 너 그 한마디에 모든 건 물거품이 되었다. 내가 반드시 방금 전에 한 말에만 복수한다. 나! 은혜도 모르는 그런 년은 아니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는지 최대한 밝게 화답을 하려고 했지만 순희가 표정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물론 화답도 나오지 않자 수리가 눈치껏 알아서 정리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늦게 퇴근하게 됐네요. 죄송하고 고마웠습니다.”
한번 더 허리를 깍듯이 숙여 인사를 하고 차에 오른 수리 차가 출발하고 멀리 떨어질 때 떨떠름한 뒤끝이 어느새 안주임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기적어기적 경비실로 갔다. 경비실에서 경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전부 퇴근했는데 안주임은 어디 갔다가 지금 와?”
순희가 입사하기 훨씬 전부터 정문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분이라 순희와 편안하게 말을 터놓는 사이였다.
“외근이 조금 길어져서요. 전부 퇴근했어요? ”
“시간이 몇 신데 벌써 퇴근했지. 박대리는 오자마자 서둘러 이부장 차 타고 가던데.”
“예?”
잘못들은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라는 기대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차 키를 맡기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게 불 끄진 사무실만 쳐다보고 있었다. 부장이나 박대리에게 인간적인 배려 같은 건 오래 전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정도는 있는 줄 알았지만 이마저도 예상한대로였다. 어이가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을 대변하는 하늘이었다. 캄캄하기만 했다. 도시의 불빛과 석유화학단지의 불빛에 별빛도 사라지고 없었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차에 기대 서서 잠시 인간의 심리에 대해 해부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다가 세상에는 닮은 사람은 많아도 똑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듯이 마음도 같으리라, 위안에 집어 넣어 경비실로 다시 갔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차 키를 거래처에 두고 왔네요. 제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이렇게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끔씩 경비실이 노인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두 사람 중에 한 사람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면 입이 가볍다는 말만 부메랑으로 돌아와 최종적으로는 경비와도 불편할 사이가 될 것 같아서였다. 혹시라도 퇴근하지 않은 타 부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이유로 부탁한다는 것 또한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라 114에 전화해 콜택시회사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할 때 경비가 귀를 쫑긋하게 했다.
“방금 태워줬던 사람에게 얼른 전화해봐. 멀리 가지 않았을걸.”
이런 사단이 나게 한 박대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다음으로 이부장이 떠올랐다. 그들이 나눈 뒷담화도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총알처럼 달려온다는 김성태도 떠올랐다. 갑 질!
“얼른 전화해. 멀리 가버리면 그 사람도 짜증낼 거야.”
그 시각에 수리는 벌써 집에 도착해 밥상 앞에 앉을 때였다. 순희는 차에 타자마자 갑 질이 아니라는 말부터 먼저 하기로 굳은 맹세를 하고 전화를 했다.
“예?”
이때를 위해 반사신경을 키운 사람처럼 수리가 밥 먹다 말고 벌떡 일어서는 찰나였다.
“어디가? 한술이라도 뜨고 가지.”
수리 집은 석유화학단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 전화는 삼십 년 동안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만 하게 한 사람에게서 언젠가는 오리라는 기대 속에 기다렸던 전화와 같은, 삼십 년 동안 줄기차게 글을 쓰고 공모전에 도전했지만 단 한번도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순위를 떠나 선택 받았다는, 그 소식보다 더 기쁜, 표현이 불가능한 전화였다.
달리기 선수가 출발선에 쪼그려 앉아 출발 신호 총성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신호탄을 듣고 뛰어나가는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꾹 누르며 디딤 손 역할을 하게 하고 벌떡 일어나는 순간, 밥상에 내려놓은 젓가락이 무릎에 살짝 부딪혀 천장으로 공중부양 했다가 방바닥에 때구루루 굴러 밥상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쭉 펴진 무릎을 다시 접어 방바닥에 내려놓은 시늉이 끝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일 새벽 첫차를 타야 하는 불상사를 초래할 사람처럼, 출발하고 있는 막차를 향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차로 뛰어갔다.
똥차에 순희를 태워가다가 차가 퍼지기를 학수고대한 엉큼한 놈처럼 똥차를 예열도 하지 않고 페달이 바닥에 붙을 정도로 밟는다.
이 시급한 와중에도 하루를 돌이켜 보며 반성을 한다.
안주임이 오늘 얼마나 힘들었을까? 실제 깡패들이었으니. 그러면서 피씩 웃기도 한다. 언제 봤다고 이런 반성을 하냐며 뇌까리기도 한다. 만약에 안주임이 이런 마음에 무관심 일변도로 나오면 그때 받을 상처로 앙갚음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한다. 너무 앞서나갔다. 어쨌던 오늘 하루가 안주임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하루였다. 안주임은 영문도 모르고 정신적인 충격만 받은 하루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이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