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의 마을 : 스타티니티의 어느 어두운 골목길 ]
뚜벅.... 뚜벅....
집을 나선 반-아스트라스는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서 발걸음을 멈춰섰다.
"이제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 "
막다른 골목에 등을 기댄 반-아스트라스가 상처난 눈을 부릅 뜨며 말했다.
"역시 티안의 유일한 기사라 그런지 감이 좋구나. 반"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어둠속에 잠겨 들리지 않던 발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악신의 기운을 느끼고 온 것입니까?"
"악신이라는 그 칭호 듣기 좀 거북한걸~ 반. 내가 섬기는 여신님인데 말이야~"
"악신은 악신일 뿐입니다."
"후훗, 그래` 반 너는 옛날부터 앞뒤 꽉 막힌 그런 남자였으니까~
뭐~ 그런점이 마음에 들지만 말이야"
어둠속에 몸을 숨겼던 반의 대화 상대가 어둠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웨이브 펌의 긴 머리와 고딕풍의 검은 드레스
등에 달린 커다란 두개의 용의 날개
반의 앞에 선 여성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뭐~ 좋아~ 근데~? 왜 그녀를 죽이지 않은거야? "
어둠속에서 나타난 여인이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악신에게 먹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어머~ 그래? 그거 유감인걸?"
"그럼 당신이야 말로 왜 그녀의 뒤를 밟은 것입니까? 멜리아"
"후훗, 내 손등에 키스 한다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반"
여인이 손등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반은 소리 없이 날카로운 두 눈으로 여인을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하핫~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말라고~
음~ 좋아 내가 그녀를 쫒은건 두 가지 이유에서야."
"두 가지?"
반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래~ 이건 내가 사랑하는 반에게만 해주는 1급 비밀이라고~♡"
멜리아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웃음을 머금은 입가에 가져갔다.
"하나는 네 말대로 여신님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쫒아서야. 나는 어미 품을 그리워하는 연약한 작은 용이거든~ "
멜리아의 등에 난 커다란 날개가 마치 자식은 품에 안는 부모의 손처럼 멜리아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내가 타락시킨 장난감을 망가뜨렸기 때문이지"
멜리아가 반에게 한쪽 눈을 감으며 윙크를 보내며 말했다.
"파랑의 마법사 세루리안을 말씀 하시는 겁니까? "
"빙고~ 역시 반이야. 눈치가 빠르다니까? "
"그녀가 하지 않았다면 제가 했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한걸로 치고 그녀의 뒤를 밟는건 그만 두시지요."
반이 상처난 한쪽 눈을 약간 찡그리며 멜리아를 노려보았다.
"어머~ 자상도 하셔라. 근데 이거 어쩌지? 방금 네 말을 듣고 한가지 이유가 더 떠올랐지 모야?"
"그게 대체.... 뭐죠?"
"여신님이 저 아이의 몸을 차지할 수 있도록 내가 돕는거지. "
스릉
눈 깜짝할 새에 검을 뽑아 든 반-아스트라스가가 그 날카로운 칼 끝을 멜리아에게 겨누고 있었다.
"어머~ 지금 이래도 되는거야? 반?
우리 둘이 제대로 붙으면 이 마을... 아마 지도상에서 사라질껄?"
칼 끝이 눈 앞에 드리워져 있는데도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멜리아가 말했다.
"저 아이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어머~ 무서워라. 그 눈빛 아직 살아있었구나?"
"손 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후후훗, 옛날 생각 나네~ 반. 기사가 춤추고 용이 노래부를 때 왕국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었는데~"
"마지막 경고 입니다. 멜리아. 그녀에게 손 대지 마십시오."
사냥감의 목을 눈 앞에둔 사자처럼 반에게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정도의 살기
하지만 멜리아는 여전히 미소일관의 표정이었다.
"후훗, 뭐~ 좋아. 사랑하는 널 봐서라도 당분간은 이대로 있어 주겠어.
하지만 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나도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야. 반. 잘 생각하라고
여신의 날개가 움직인 곳엔 죽음 뿐..... 이 말 알지?♡"
멜리아가 반-아스트라스를 향해 손키스를 날리고는 두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반은 날아가는 멜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검을 도로 집어 넣었다.
"이거 한방 먹었군요"
혼잣말을 내뱉은 반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달빛 아래 한 마리의 용 그림자가 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
[ 스타티니티 동쪽 - 조용한 골목의 한 2층 집 ]
"초록정원 리베라에 가라고 했던가?"
식사를 마친 그레이스가 안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다 씻은 그릇은 선반 위에 놓으며 말했다.
서쪽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조금 더 사냥을 하고 싶은 욕심도 들었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악신에게 먹히지 말라....랬지? 분명?"
작은 방 구석에 놓인 작은 냉장고 문을 열어 작은 캔음료 하나를 꺼낸 그레이스가 혼잣말을 했다.
반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대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거짓말을 했단거 혹시 다 알고 계셨던걸까?"
반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어떤 의미를 품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날카로운 눈빛이 그냥 해 본 소리라고는 생각 되지 않았다.
거실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음료를 한모금 마시며 낡은 문의 문을 잠궜다.
밤 길거리의 치안상태를 보아하니 동쪽 구역은 썩 안전한 동네는 아닌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폰틴까지 무력화 상태인 지금 또다시 큰 사건에 휘말린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몰랐다.
테이블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가면을 벗어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아카네 여신님의 가면
이 가면에 끌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이로든 앞으로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날거란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자볼까?"
걱정도 잠시 옆쪽에 있던 작은 붙박이장에서 침구류를 꺼낸 그레이스가 자리에 누웠다.
멀뚱 멀뚱..
하지만 눈만 감으면 잠들 것만 같았던 아까와 달리 지금 그레이스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반 할아버지와의 만남으로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는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찾아온 고요의 시간
그레이스의 머릿속엔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 말고 다른 플레이어는 보이지 않는거지?'
이곳은 그레이스가 처음 시작 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게임에 접속했다면 분명 대부분 이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플레이어라면 분명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벤토리를 열거나 퀘스트 창을 읽는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어리버리를 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 하루동안 그런 행동을 보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플레이어처럼 보였던 사람들 또한 NPC였다.
역시 아빠가 보냈던 메시지는 이 세계에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레이스는 무심결에 이마에 손을 올렸다.
툭...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잠시 잊어버렸던 VR게임기가 그레이스의 손에 부딪쳤다.
"이건..."
이곳으로 오기 전 그레이스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아빠한테 받은 소중한 선물이기도 했다.
"여기선 안되겠지?"
'Overmind'
그레이스가 가장 좋아했던 게임
같이 게임을 즐겼던 '천애의 날개' 길드원들이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타스 아저씨 잘 살고 계시려나?"
짤막한 몸뚱이와 우람한 근육 그리고 털털하면서도 호탕한 드워프 아저씨
"레이비한테는 목숨 여러개 빚졌는데, 하나도 못 돌려주고 왔네"
아기자기한 정령들을 대리고 파티의 유동적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줬던 수인족 정령사
"핀은... 아~ 뭐 됐어. 좋을대로 하고 있겠지"
항상 의욕 제로에 도전 하면서도 자기 할일은 완벽하게 해냈던 와이어를 사용하는 일명 망캐 궁수
그 밖에도 보이는 공대원들의 모습
그레이스는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 -
쏴아아아~ 쏴아아아~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잠든 그레이스의 귀를 간지렀다.
"음...? 여기는..."
뿌연 안개가 감싼 장소에서 눈을 뜬 그레이스가 사방을 둘러 보았다.
"여긴 어디지? 나 분명 할아버지네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그레이스의 귀에 사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누구지?"
몸을 일으킨 그레이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방향을 틀자 마치 공간을 이동한 것처럼 완전히 다른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노을이 지난 어느 절벽가
그곳에 검은 갑옷을 몸에 두른 흑기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폰틴...?"
뒷모습만 봐도 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노을을 등지고 절벽 끝에 서 있는 또 한사람
눈부신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형상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레이스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웅성...웅성...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듯 그레이스의 귀에 알아 듣기 힘든 웅성거림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 거야?"
그레이스는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해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눈 앞에 있던 그 모든 풍경이 마치 연기처럼 사르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