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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Pay first.
작가 : 바울
작품등록일 : 2018.12.1

인기 없는 작가와 찌질한 팬의 아슬아슬한 관계 유지.

 
#13
작성일 : 18-12-18 23:37     조회 : 290     추천 : 1     분량 : 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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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13.

 

 

  - 강승아 (18)

 

  "승아야. 승아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놀라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 짧은 시간에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린 게 느껴졌다. 승아를 부른 매니저 역시도 이상하다는 눈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다양한 음식 냄새가 섞여 코를 찌른다. 전방엔 몇 칸이나 되는 선반에 놓인 과일로 가득하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그녀가 입은 새카만 앞치마가 눈에 들어와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나 일하는 중이었지 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오렌지를 놓다 말고 멍하니 서 있었나 보다. 손에 묵직한 접시가 들렸단 걸 느끼자마자 힘이 쭉 빠졌다. 애처로운 허우적거림 뒤에야 간신히 접시를 잡아낸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승아야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무슨 약속을 다녀온다고 늦게 출근한다더니, 출근한 이후로 쭉 이런 상태다. 알바를 관리하는 매니저로선 곤란하기 짝이 없다. 이 순둥이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일하러 와서는 시종일관 멍이나 때리고 있을까.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귀에 간질거렸다. 손님들의 관심이 직원에게 쏠리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승아야, 나 좀 보자."

 

  까칠한 말은 오늘 몇 번이고 들어서인지 평소 같은 위압감을 받지 못했다. 저 엄한 표정을 보니 좋은 소리 듣기는 그른 것 같지만, 멍함이 가시지 않은 승아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다. 타이밍 좋게 지나가는 동료에게 남은 오렌지를 부탁하고 매니저를 따라갔다.

 

  으레 직원들을 혼낼 때 데려가는 사무실로 갈 줄 알았더니 전혀 다른 방향이다. 건물 밖으로 나와 흡연장으로 향했다. 앞치마도 벗지 않고 펴도 될까 싶지만, 정작 매니저는 신경 쓰지 않고 불을 붙였다. 승아에게도 한 개비 넘겨주고는, 깊게 들이마신다. 두 남녀는 잠시 말이 없다. 매니저는 관찰이라도 하듯 승아를 응시하고, 승아는 어딜 보는지 모르게 초점이 흐릿하다. 왜 저런진 대충 예상이 된다. 웬일로 머리 올리고 허옇게 분칠까지 하고 오더니.

 

  "차였니?"

 

  두서 없는 저 한마디가 매니저가 내린 결론이다. 승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미동도 없는 걸 보면 정확히는 제대로 듣지도 못한 것 같다. 매니저는 노골적인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글렀다. 오늘은 도저히 손님 앞에 내보낼 상태가 아니지 싶다. 사람 없는 주방으로 돌릴 수밖에.

 

  "예?"

 

  물어본지 몇 초나 지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하셨냐는 듯 올려다보는 눈에 생기라곤 없다. 썩은 생선 같은 눈깔에 매니저는 굳이 다시 물어보진 않는다. 딱한 눈으로 승아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어깨를 팡 소리나게 쳐 준다. 딴에는 격려의 의미였지만 큼직한 손에 맞은 승아는 조금 휘청 거리기까지 했다.

 

  "세상에 여자는 많아. 네 나이 때야 사귀고 차이고 그런 일이야 밥 먹듯이 하는거지. 바로 극복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막상 하려고 마음먹으면 하게 돼. "

 

  "뭘.. 요?"

 

  무슨 말을 하시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저 질문. 평소에도 얼빵한 아이가 오늘은 아예 정신을 놓았나 보다. 지금이 퇴근 시간이면 모를까, 지금처럼 바쁜 시간대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다. 적당히 정신 차리게 갈무리하고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성인이라면 연애사업이 직장에서까지 영향을 주면 안 되겠지? 그런 뜻이야."

 

  승아는 전혀 대화를 못 따라가는 중이다. 이런 경우 상대방이 얘기하는 말에 눈치껏 받아치기도 하건만, 그런 센스를 발휘하기엔 승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전.. 연애를 안 하는데요."

 

  그렇겠지, 차였으니까. 매니저는 굳이 그 말을 꺼내진 않았다. 대충 담배를 비벼 끄고 이만 가자는 손짓을 보낸다. 혹시나 싶어 데려왔지만 당장 해결하기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절절한 이별 이야기는 나중에 듣더라도, 당장은 오늘 몰려드는 손님들부터 맞이해야 한다. 승아는 매니저가 보낸 신호에도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이상 시간 끄는 걸 원하지 않는 매니저는 아예 승아를 지나쳐 앞장선다. 어쩐지 익숙한 뒷모습에, 승아는 뭔가 떠올린 듯 움찔한다. 그 바람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담배가 툭 떨어졌다. 먼저 흡연장을 나서던 매니저를 따라가 급하게 불러 본다. 되돌아보는 눈빛엔 신경질적인 짜증과 이번엔 뭔가 하는 의아함이 섞여 있다.

 

  "죄송해요 매니저님, 그.. 저번에 말씀드린 다음 주 스케쥴이요.."

 

 

 - 고아 씨 (19)

 

  영업 시작 전이라기엔 과할 정도의 차림이다. 규리는 자기가 가게 주인인 양 대단히 화려한 칵테일을 만들어 놓고는, 다른 두 사람 몫으로 고작 맥주 한 병과 주스만 가져왔다. 진짜 주인은 규리가 실력발휘를 했다며 넉살 좋게 웃을 뿐이다. 열 몇 개나 되는 다양한 치즈 조각에 고아 씨는 벌써부터 체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미 받기로 한 이상 감사히 받아들일 뿐이다. 빵으로 가득 찬 위장에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본다.

 

  고아 씨가 잔을 채 들기도 전에, 자신이 그 칵테일을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지에 대한 쉴새없는 어필을 들어야 했다. 참을성 있게 모든 자랑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고아 씨는 그제야 맛을 본다. 화려한 색에 어울리는 달콤한 첫맛이다. 게다가 이 칵테일, 도수가 꽤 높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술맛이 강하지 않다. 의도적으로 도수를 조정한 게 명백하다.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이전부터 약한 칵테일만 찾던 고아 씨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규리가 그 동안 고아 씨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그 어떤 말보다 크게 와닿는다.

 

  "고마워. 기억하고 있었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칵테일을 만든 장본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규리는 행복감에 온몸을 부르르 떤다. 박 사장의 제지가 없었다면 그대로 바 테이블을 밟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 격한 몸짓 뒤엔 다시 재잘거림을 시작한다. 꼭 뱁새가 노래하는 것처럼 쫑알거리는 게 시끄럽다기보단 그저 귀엽기만 하다. 이전에 바에 다닐 때도 저 말 많은 아이를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세심한 배려를 실감하고 나니 심지어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저런 동생 하나만 있었으면.

 

  "고아 양은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누구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던데."

 

  벌써 맥주를 한 병 비우고 새로운 병을 꺼낸 박 사장의 질문이다. 거진 맥주가 아니라 물을 마시는 것 같다. 규리는 고아 씨를 향한 질문에 바로 입을 닫고 눈을 반짝거린다. 그 모습에 귀여운 동물을 보듯 히죽 웃을 뻔했다.

 

  팬을 만났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왠지 모르게 턱 막혔다. 딱히 찔릴만한 일도 이유도 없는데 이상하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굳이 고아 씨가 저지른 실수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승아를 만난 것 자체는 대단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뭔가 꺼려진다.

 

  ".. 약속 있었어요. 끝났지만."

 

  다행히도, 박 사장은 남자친구냐며 캐물어 보는 인간은 아니다. 순간 뜸을 들인 걸 눈치챘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예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가려는 것 같다.

 

  "덕분에 고아 양도 만나고 그분한테 감사해야겠네. 그쵸 규리 양?"

 

  "그럼요! 남자친구에요 언니?"

 

  안타깝게도, 침착한 판단을 하기엔 규리가 너무 들떠있었다. 나지막이 어이쿠 하는 박 사장에게 괜찮다는 몸짓을 보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규리가 물어보는 거라면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굳이 남자를 만날 때만 화려하게 꾸밀 필요는 없지만, 오늘의 고아 씨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전만해도 이렇게까지 신경 쓴 복장으로 온 적은 없었다.

 

  "남자친구는 아니고.."

 

  팬. 강승아. 팬더 같은 남자. 말하는 게 뭐 어렵다고.

 

  "내 팬이야."

 

  눈에서 빛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다.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팬과 만났다고 얘기하는 고아 씨가 규리의 눈엔 굉장히 멋있게 보인 모양이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 외모는 어떤지, 또 뭘 했는지 등등 빠르게 질문이 뒤따른다. 규리는 점차 자신을 주체 못 할 정도로 신 나고 있다. 고아 씨 역시 오늘따라 유난히 많이 받는 존경심이 싫지 않았다. 약하지만 계속 들어가는 술에 고아 씨도 한 두 마디씩 말을 늘리기 시작한다.

 

  칵테일이 비워지면 새로운 잔으로 채워진다. 주스가 떨어졌다고 해서 술로 대체되는 것도 아닌데, 고아 씨보다 더 취해가는 건 규리 같다. 그 난리 통에 박 사장은 슬그머니 움직인다. 고아 씨 본인이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니 굳이 말릴 필요도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저 대화가 끝날 때까진 혼자서 오픈준비를 마칠 생각이다. 어느새 챙긴 조각 치즈 몇 개를 입에 물고 노련하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두 여자는 어느새 둘만 남은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즐겁기 그지없다. 시간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

 

  "그래서 내가 '전 너무 써서 못 먹겠던데.' 라고 했지. 그랬더니 걔 표정이.."

 

  고아 씨의 표정이 과장되게 일그러진다. 당시 승아의 표정과 그리 닮진 않았다.

 

  "대박이다. 진짜 언니 최고에요. 진짜 웃겨요."

 

  규리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격하게 깔깔댄다. 그 모습에 덩달아 들뜬 고아 씨도 이제는 굳이 미소를 숨기려 들지 않는다. 꽉 닫힌 입술이 휘어지면 부들거림이 격해진다. 얼굴이 조금씩 붉어질 때마다 자제력도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간다. 술은 벌써 네 잔을 넘었다. 자연스럽게도 규리가 채워준 다섯 번째 잔을 든다. 잔을 거듭할 때마다 도수가 점점 올라가더니, 이제는 평소의 고아 씨라면 손도 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술을 거리낌 없이 마시고 있다. 분위기를 탄 규리는 이제 자기가 무슨 술을 따라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취기가 힘껏 분 풍선껌 마냥 최고조로 부풀어 올랐을 때,

 

 "흐하하하하하하하.."

 

 고아 씨가 입을 크게 벌리고 정신없이 웃는다. 참다 참다 터진 폭소는 한참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사람 없는 가게 전체에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광대가 쑤시고 배가 땡겨올 때쯤에야, 속에서 뭔가 덜컹하며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이 느낌을 알고 있다. 최근에 느껴본 적 있는 불안감이다. 설마 아니겠지 하며 천천히 눈을 뜬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규리와 마주 본다. 그제야 머릿속에서 벼락이 치듯 실감한다. 취기가 단박에 가시고,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때리듯 입을 막는다.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한다.

 

  규리가 봤다. 봐 버렸다. 결국, 이 꼴을, 친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야 말았다. 그렇게나 주의하고 자제했는데. 멍청하게도 스스로 드러냈다. 눈물이 핑 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규리의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다. 저 작은 입술이 우물쭈물 움직인다.

 

  아니야. 말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언니.."

 

  어떻게든 돌릴 화제를 찾아 머리를 굴려봐도, 이미 터져버린 분위기는 다시 부풀릴 수 없다. 구멍 난 곳으로 쉴새 없이 공기가 오가며 처량하게 흐느적거릴 뿐이다.

 

  끝이다. 고작 단골손님 중 하나인 나를 길에서 알아봐 준 사람이, 몇 달이나 나를 기억하고 진심으로 환영해준 사람이 있는 이곳에,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심지어 날 좋아해주는 사람 앞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저 입술도 천천히 움직인다. 이제 다음 말이 나오려 한다.

 

  고아 씨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작가의 말
 

  커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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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객 18-12-19 03:41
 
갈수록 귀엽게 보이는 한쌍이네요.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이미 점짝혔어요. 두 사람 모두...절로 미소가 나와요. 잘 돼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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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18-12-19 23:59
 
늘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힘이 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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