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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다시 돌아온 생명의 계절. 날이 풀리고 봄이 오면서 학교에 나가기 시작한 윌리엄은 오전부터 이른 오후까지 집을 비웠고, 그 덕에 주체하지 못하는 시간을 오롯이 그림에 쏟아 부은 레슬리는 어느새 자신의 길고 곧은 손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물감 자국과 붓을 잡은 방향대로 쌓여간 옅은 굳은살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을 가려낸 레슬리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벼운 발소리에 몸을 돌리며 환한 미소를 그려냈다. 온 몸의 체중을 실으며 내딛는 발걸음은 마치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켜, 레슬리는 기꺼이 계단을 내려오는 이의 몸을 받아 안고는 코끝을 가볍게 찡그렸다.
“아가.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빠가 있잖아!”
굳건한 신뢰가 담긴 눈동자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해맑게 웃는 이의 코를 가볍게 잡았다 놓은 레슬리는 아가사가 그러던 것처럼 눈을 가늘게 흘기다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조금만 더 조심하자?”
“음-, 봐서!”
어휴. 누굴 닮아서 이리 말썽일까. 개구지게 웃은 윌리엄은 이내 팔다리를 바동거려 원하는 대로 땅에 무사히 안착했다. 빨리 가자! 지각할지도 몰라!
찬란하게 쏟아지는 볕은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며 너울거리고 있었다. 기꺼이 빛 속으로 걸어 나간 레슬리는 나뭇잎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반짝거림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꼭 붙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한 줄기 바람이 장난스럽게 머리칼을 헤집고 흐트러지는 것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하며 오솔길을 걸어 나간 두 사람은 윌리엄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속속 모여 드는 건물 앞에서 손을 놓았다.
“아빠! 그럼 좀 있다가 봐!”
짙은 감색의 교복을 입은 채 해맑게 뛰어가는 윌리엄에게 손을 흔들어준 레슬리는 아이들이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숨을 고르며 한참을 햇볕을 받고 있었다. 자신의 시야가 조금 더 안정될 때까지.
“아가사?”
아이 하나가 없는 집 안은 생각보다도 더 고요해서 레슬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가사를 찾았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안경을 쓰고 서류를 넘기던 이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반듯하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잠은 좀 자면서 해야지. 어느새 자신의 행동은 싹 잊어버린 레슬리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여보, 자기야?”
그리고 찾은 아가사는 서류를 읽다가 잠시만 눈을 붙여야지, 한 것처럼 보였다. 책상에 엎드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에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포갠 손아래에 끼어있는 흰 종이를 들여다보던 레슬리는 아가사를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혀주었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살살 걷어내 조금 피로해 보이는 이를 한동안 바라보던 레슬리는 커튼이 쳐진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점수 좀 따볼까.”
평소에는 제 부인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전부 하고 있으니 이럴 때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지극히 자연스럽게 아가사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안경을 쓴 레슬리는 펜을 들고 찬찬히 흰 종이 위의 글자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짙은 오후의 석양이 눈꺼풀을 간질이고 있었다.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은 공평하게도 작은 집의 작은 안방에도 고루 쏟아져 눈길 닿는 곳곳을 그의 색으로 물들여내고 있어, 아가사는 말없이 눈을 깜빡거리며 그 풍경을 멍하니 감상했다. 적어도 그 풍경 사이의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뭐해요?”
“응? 깼어요?”
부드러이 웃는 얼굴의 레슬리는 자신이 바라보던 것에서 시선을 때며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잔잔하게 묻는 말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아가사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길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깼어요.
“몇 시에요?”
“7시. 해 질 때 되긴 했죠.”
“7시?”
“쉬이. 아가사.”
“윌리엄은요? 데려왔어요?”
“당신 옆에서 자고 있어요, 자기.”
그러니까 조금만 조용히. 제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고 싱긋 웃는 레슬리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아가사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정리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끈한 체온을 향해 시선을 내리자 색색 숨을 고르며 품에 파고들어 자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입을 다문 그는 눈을 끔뻑이며 자신과 아이를 바라보는 남편을 슬쩍 올려다보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속삭였다.
“뭐하는 중이었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졸리면 더 자도 괜찮아요. 밥은 늦게 먹어도 되니까.”
“나 해야 할 일 있어요.”
“그거 내가 했어요, 여보. 다 했으니까, 쉬려면 쉬어도 된답니다.”
졸리죠, 자기. 눈이 반쯤 졸음에 물들어 있어요.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고개를 묻은 아가사는 한참동안 그를 올려다보며 그 아늑한 시간을 한껏 음미했다. 왜 더 안자고. 귓가에 속닥이는 말에 가물거리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아가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 얼굴이 너무 좋아서?”
“아가사, 너무 달콤한 말만 하는 거 아닌가요? 내 얼굴이 좀 잘생기긴 했어요.”
“몇 번 말하지 않았어요? 자기 얼굴은 내 취향 아니라니까. 그냥, 행복해 보여서.”
그거 상처인데. 자신을 어르던 손길이 늦춰진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아가사는 제 품의 윌리엄을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했고, 그 모습을 레슬리는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나 행복해요. 조용히 잠겨드는 시간 속에 언뜻 그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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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쌓여가는 시간을 음미하듯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부드럽게 스쳐가는 바람결이 올올이 속삭이는 것만 같아, 자연스럽게 표정이 편안해지는 것을 귀신같이 잡아내는 사람이 있었다.
“아가사. 눈 좀 떠볼래요?”
“여기 햇빛이 너무 세요.”
눈을 못 뜰 것 같은데. 결국 손을 들어 손차양을 만들고 나서야 한결 시야가 개운하게 개었다. 조금 불만족스런 표정이 스쳐지나간 것도 같았으나 아가사는 꽤 뻔뻔하게 그저 활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차피 남편은 자신의 웃음을 이기지도 못할 테니까.
“엄마, 나 졸려….”
햇볕이 약한 아침나절부터 밖에 나와 놀고 있으려니 해가 중천쯤 뜰 시각에는 졸리기도 하겠지. 치맛자락에 매달려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를 익숙하게 안아 도닥이며 아가사는 미간을 좁힌 채 두 사람을 바라보는 레슬리를 건너다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시작은 모두 그림 때문이었을 텐데. 어느 날부터 그림도구는 손에 잡지도 않던 사람이 문득 꺼낸 말은 그렇게 의외는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꺼내고, 또 잊을 만하면 꺼내고. 막상 실행은 못하고. 갈팡질팡 하던 이를 돌려 세운 것은 결국 아가사 자신이었다.
‘이러다가 불후의 명작을 볼 것 같으니까 그냥 아마추어답게 그려요.’
‘네, 부인.’
그 결과 햇빛 찬란한 어느 주말, 온 가족이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단순히 스케치만 먼저 그리겠다며 잠시간 아가사와 윌리엄을 세워둔 레슬리는 가지고 나온 수첩에 모습을 담아냈다. 굳이 거창하게 바깥에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자리했으나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퉁을 놓을 수는 없어 아가사는 허물어지듯 레슬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좋아요. 다 됐어요.”
“나 정말 믿어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걱정 말아요, 부인.”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시선에도 꿋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가사의 품에 있던 아이를 안아든 레슬리는 한쪽 손을 내밀어 아가사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가실까요?
“수채화로 그린다고 했던가요?”
“음, 고민 중이에요. 하루 종일 바깥에 세워두는 것도 성미에 안 맞고.”
“이젤은 가지고 나올 줄 알았는데.”
“짐이 많아지잖아요.”
무거운 걸 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 쾌활하게 덧붙인 레슬리는 맞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준 채, 시선을 빗겨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가사를 향해 눈웃음을 그렸다. 길고 곧게 뻗은 손과 대비되는,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나한테 손을 보여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더라. 과거를 헤매는 짧은 상념은 눈꺼풀 위로 드리우는 햇살에 가려 자취를 감추었다.
“나중에, 좀 더 괜찮아지면 그 땐 나와서 그려볼까요? 그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또 언제부터였을까? 당연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을 당연하다 여기게 된 것은? 푸른 하늘이 담긴 눈동자가 자신을 정확히 꿰뚫어볼 때마다 레슬리는 늘 숨을 멈추고 빛이 만들어내는 작은 기적을 바라보곤 하였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그 눈동자에 채 비치기 무섭게 가벼이 흘기는 눈초리가 자신을 향했다.
“그리고 또 짐은 다른 사람이 들고요? 당신 손을 보면 누가 일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래요?”
“여보, 내가 얼마나 더 힘자랑을 해야 그대가 날 믿어줄까?”
“어머. 여기서 힘자랑을 하려고요?”
이이가? 공기 중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아가사 자신의 이상형을 알고 나서부터 묘하게 그에 집착하는 남편의 모습이 귀여워 몇 번 놀려먹었더니 이제는 질 새라 덤벼드는 폼이 하루 이틀 새에 완성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허리춤에 손을 두르고 끌어안아 시선을 맞춘 레슬리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눈썹을 까딱였다.
“이만하면?”
“레슬리, 그걸 알아야 해요. 당신은 얼굴부터 내 이상형은 아니랍니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원망해야겠어요.”
“내가 이상형이 아니라고는 안 해요?”
보통 그렇게 놀리면 똑같이 응수하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자신을 내려달라며 어깨를 톡톡 두드린 아가사는 조심조심 내려주는 손길에 손등으로 입매를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뭐어, 고민하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얼굴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레슬리는 허전한 손에 온기를 더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만족할만한 준비를 하는 중이죠. 조용히 내쉬는 숨결이 잠시간 엉겨 붙었다. 새소리마저 잠겨든 오후의 한낮은 눈이 부시도록 내려앉는 햇빛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