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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왕비님의 알바일지
작가 : 박티티
작품등록일 : 2018.12.7

만년 배우 지망생 희우는 오늘도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낙담한다. 그러던 와중 왕비역을 구한다는 알바 공고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하는데, 뭐? 진짜 마왕이 왕비를 구하는 거였다고? 1년의 계약기간동안 마왕성에서 벌어지는 왕비님의 흔한 알바일지

 
#6-파티가 망했어요.
작성일 : 18-12-16 15:19     조회 : 219     추천 : 0     분량 : 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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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멋진 연설이라도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내가 바보멍게해삼말미잘이지.

 ​

 희우는 진지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어진 마왕성을 보며 속으로 넋두리를 삼킨다. 무슨 조화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한 낮이었던 주위는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고, 어디선가 나타난 조명과 어마어마한 장식들이 순식간에 성을 파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꽃가루가 휘날리면서 화려한 분장을 하고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자들이 수십명이 튀어나오더니, 악사들이 연주하는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 격렬하고 화려한 춤을 선보인다. 공중에서는 요정처럼 작고 날개달린 무언가가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며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마족들이 모여있던 널찍한 마당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커다란 분수가 난데없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그 안에서는 하반신이 물고기의 꼬리를 닮은 인어들이 미모를 뽐내고 있다. 광란의 무대 한켠에는 성 안의 하녀와 하인들이 열심히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쭉한 테이블이 이미 꽉꽉 들어찰정도로 먹을 것이 가득하다.

 ​

 마족들이 신나서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숙할정도로 조용했던 즉위식의 분위기는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희우는 이 극단적인 반전이 놀라웠는지 음악이 몇곡이나 지나가는동안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 앞에 갑자기 길쭉한 유리잔이 불쑥 나타난다.

 ​

 "한잔 할래요?"

 ​

 고개를 들어보니 디노가 샴페인 잔을 내밀고 있다. 술잔을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갈증이 확 치솟아온다. 희우는 혀에 와닿는 시원하고 달콤한 맛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더니 신기한 듯 중얼거린다.

 ​

 "다들 엄청 재밌어 보이네요..."

 ​

 마치 온 나라가 들썩일듯이 떠들썩한 분위기는 신기하기도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디노가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

 "다들 즉위식보다는 이걸 기다렸을걸요. 몇백년만에 있는 왕성 파티니까."

 ​

 희우는 왜 아로닌이 댄스파티가 즉위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 마족들의 모습을 보니 만약 파티가 없었다면 아마 폭동이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뭐, 아무렴 어때. 처음에는 뭐 이런게 다 있나 싶었지만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지켜보다보니 희우 역시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들뜬다. 그 때 마침 음악이 바뀌어 밝고 웅장한 왈츠가 시작된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곡이었지만 그것 역시 또 기다렸던 이들이 있었던지 금새 파티장은 우아하게 자세를 잡은 커플들이 차지했다. 디노는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희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자, 왕비님. 제게 한 곡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희우는 디노기 내민 손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레 춤 신청을 받아들인다. 아로닌에게 단단히 교육받은 덕에 춤 예절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희우는 디노와 함께 단상에서 내려가면서 들릴듯 말듯 속삭였다.

 ​

 "저 진짜 춤 못추는데요..."

 "내가 잘 추니까 괜찮아요."

 ​

 연회장 가운데에 멈춰서서 자세를 고쳐 잡았지만 희우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디노는 그런 희우를 달래듯이 속삭였다.

 ​

 "즉위식 파티에서 왕이랑 왕비가 춤을 안 추면 이상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발만 밟지 말아요."

 ​

 새로 시작되는 연주는 잔잔한 왈츠다. 희우는 작게 심호흡을 한 후 발을 옮긴다. 다행히 긴 드레스자락이 어설픈 발을 가려주어 생각만큼 못나보이진 않는 것 같고, 무엇보다 호언장담한대로 디노가 적절히 리드해주어 둘의 춤은 나름 꽤 볼만하다. 희우가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디노가 말을 꺼냈다.

 ​

 "한국에선 이런거 안하죠?"

 "잘이 아니라 아예 안할거 같은데요. 클럽에서 하는 파티라면 모를까..."

 

 그러고보니 디노는 대체 왜 인간계에, 그것도 서울에 있었던걸까.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 의문 속에서 희우는 팔을 들어올리는 디노의 동작에 맞춰 조심스레 한바퀴 돌았다. 엄마야. 순간 비틀거릴뻔 했지만 얼른 허리를 잡아주는 커다란 손 덕분에 다행히 꼴사나운 모습은 면한다. 희우는 창피했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막상 디노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간다.

 ​

 "그런데?"

 "그런데 현실... 아니, 인간계에는 왜 있었어요?"

 "어릴 땐 마왕성이 너무 재미없어서 여기저기 잘 떠돌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인간계까지 가게 된 거죠."

 ​

 아무리 마족이라고 해도 역시 사춘기는 무서운가보다. 희우는 왠지 흥미롭게 느껴져서 디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인간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아프리카였나... 거기서 어떤 한국인을 만났어요."

 "한국인?"

 "좋은 사람이었어요. 착하고, 예쁘고. 그 사람 따라서 한국까지 간 거에요."

 ​

 누군지 모를 그녀를 떠올리는 디노의 표정을 보자 희우의 기분이 묘해진다. 아련함과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오는 그 표정은 누가봐도 단순히 친구를 떠올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애인이 있었나?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을 왕비로 삼지 않고 나를 뽑은거지? 자연스레 질문이 떠오르지만 쉽사리 물어볼수가 없다. 아주 잠깐이지만 디노의 얼굴에 심상찮은 빛이 도는 것을, 희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리며 몸이 크게 비틀거린다.

 ​

 "꺄악!"

 ​"뭐, 뭐야?"

 

 놀란 마족들이 비명과 고함을 토해내고, 디노와 희우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음악이 멈추고 밤하늘 대신 본래의 환한 하늘이 나타나 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즐거움이 꽃피어있던 마족들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함과 불안함만 남아있었다. 맑은 하늘을 보고 불길한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희우는 이유 모를 기분 나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그 이유를 알게된다. 동쪽 하늘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허공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뿔과 날개를 단 낯선 자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만약 악마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희우는 그들의 새빨간 피부와 새의 발톱같이 생긴 손발을 보면서 생각한다.

 ​

 "히로칸이다!"

 ​

 히로칸? 그게 저 새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이상한 괴물들의 이름인가?

 

 "전하!"

 

 비상사태를 알아챈 아로닌이 평소답지 않게 헐레벌떡 달려온다. 그의 얼굴은 이미 곤란함이 점령한 상태였다.

 ​

 "성의 결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문제라고? 무슨 문제?"

 "동쪽 결계석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결계석이...?"

 ​

 디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하더니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허공의 틈에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괴물들의 모습은 아로닌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디노는 이를 바득하고 갈더니 목깃에 달린 노란 브로치를 떼어내 희우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즉위식때 시험의 증표로 내보였던 물건이었다.

 

 "놈들은 내가 맡을테니 우선 결계부터 복구시켜. 희우씨, 이거 갖고 있어요. 이것만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할테니 안심해도 될거에요."

 "전하, 설마 방패도 없이 싸우실 생각입니까?"

 "내가 설마 저 새대가리들한테 당할까봐? 성 안에 있는 마족들도 대피시켜! 빨리!"

 ​

 디노는 가볍게 아로닌의 말을 받아친 뒤 그대로 달려나가 테라스 난간을 밟고 훌쩍 몸을 던진다. 그가 중력을 거스르고 높이 뛰어오르는 순간, 동시에 비어있던 디노의 손에서 커다란 장검이 나타났다. 드래곤의 검. 즉위식에서 사라졌던 그 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마왕은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키아아악!"

 

 하늘을 가를듯이 시원시원한 공격에 히로칸 너덧마리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나가 떨어진다. 하지만 숨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히로칸들이 마력 화살을 쏘아댔고, 디노는 제 키만한 검을 날렵하게 휘둘러 화살을 막아내며 땅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

 "이 비둘기 놈들이..."

 

 닥치는대로 놈들을 베어댔지만 하늘에 뚫고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히로칸 무리는 끝이 없다. 이대로는 안되겠군. 디노는 쳇하고 혀를 차고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하늘을 뒤덮은 붉은 깃털을 노려보던 그가 작은 마력탄을 몇 개 쏘아보내 몇몇을 명중시켰지만, 그것은 오히려 놈들의 화만 돋구었지 별 효과가 없었다.

 

 "끼에에엑!"

 

 귀청이 떨어질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결국 놈들이 디노를 향해 돌진한다. 희우는 히로칸 수십마리가 한데 모여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저러다 죽겠어! 그렇지만 디노는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히로칸들을 보며 차분히 손을 뻗었다. 활짝 편 손바닥 앞에서 새카만 마력 덩어리가 나타나 불쑥 커지더니, 곧 굵직한 레이저빔처럼 앞으로 뻗어나가 공중에 있던 히로칸들을 청소기로 훑듯이 싸그리 없애버렸다. 순식간에 전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우가 한숨같은 감탄을 내뱉는다.

 

 "세상에..."

 

 마계라더니 정말이었어. 자신은 마왕이며 이곳이 마계라는 디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직접 체감하니 오히려 믿기지가 않는다. 모순적이지만 너무 사실적이라서 실감이 안 난다고나 할까. 희우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마족들도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금새 환호성이 터져나오며 마치 축제의 현장처럼 활기를 띤다.

 ​

 "해치웠다!"

 "만세!"

 "마왕님 만세!"

 

 승리를 기뻐하는 마족들을 보니 그제서야 조금 안심이 된다. 하지만 그 때, 희우는 군중들에게서 눈을 돌려 디노를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그의 뒤에서 시커먼 가루같은 것이 날리고 있었는데, 자세히보니 그것은 그냥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희우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고 디노에게 알리려 목소리를 끌어낸다.

 ​

 "디노, 뒤에...!"

 ​

 그러나 경고가 너무 늦었다. 분명 방금 전만해도 잿가루 같았던 그것은 갑자기 한데 모여 불쑥 커지더니 눈 깜짝할 새에 거대한 히로칸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 순간, 희우는 갑자기 손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움찔거렸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지금 그녀의 모든 신경은 오직 디노에게만 쏠려있었다.

 

 디노가 뒤늦게 녀석의 존재를 알아채고 다시 검을 소환했지만 히로칸의 날갯짓이 좀 더 빨랐다. 대문짝만한 날개가 힘껏 움직이자 태풍같은 바람과 함께 시뻘건 화살 수백개가 쏟아진다. 핏빛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마력의 화살은 받아치기에는 너무 거대했고, 피하자니 뒤에 남은 마족들이 위험하다. 디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던 희우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

 "아... 안 돼!"

 

 노란 섬광이 터져나오며 눈앞이 하얗게 변했고, 뒤늦게 따라온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마왕성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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