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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왕비님의 알바일지
작가 : 박티티
작품등록일 : 2018.12.7

만년 배우 지망생 희우는 오늘도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낙담한다. 그러던 와중 왕비역을 구한다는 알바 공고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하는데, 뭐? 진짜 마왕이 왕비를 구하는 거였다고? 1년의 계약기간동안 마왕성에서 벌어지는 왕비님의 흔한 알바일지

 
#5-무슨 즉위식이 5분이면 끝나요?
작성일 : 18-12-16 15:18     조회 : 216     추천 : 0     분량 : 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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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춤춰본적 없는데요, 라는 희우의 대답은 지옥문을 여는 주문이었다. 저녁 내내 이루어진 춤 연습은 혹독하고 엄격했고, 겨우 아로닌에게 합격 판정을 받았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그 합격도 어쩔수없이 준 것 같았지만-.

 

 "왔어요?"

 

 파김치가 되어 방으로 돌아왔더니 디노가 기다리고 있다. 한가하게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꼰 모습을 보니 뭔가 분하다. 희우가 영혼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춤연습하러 갔다면서요?"

 "예에..."

 "왕몸치라면서요?"

 "...봤어요?"

 "아뇨. 그냥 찍은건데."

 

 이 인간을 그냥. 아, 혹시 또 무슨 생각하는지 들킬지도 모른다. 참자, 참아야해. 희우는 왠지 이 알바가 끝날때쯤이면 자신이 보살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 스텝만 알면 됐어요. 내가 리드하면 되니까."

 "그나저나 무슨 즉위식이 이래요?"

 "왜요?"

 

 희우가 억울한 듯 묻자 디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한다.

 

 "즉위식이면 엄숙하고 뭐 그래야되는거 아니에요? 무슨 즉위식은 달랑 5분만에 끝내고 댄스파티를 아침부터 밤새도록 하는데요?"

 "재밌잖아요."

 

 아, 그러셔요. 너무 단순명료한 대답이라 차마 희우가 대꾸조차 못한다. 디노는 킥킥거리더니 설명을 덧붙인다.

 

 "원래 마족들은 단순해요. 강함과 약함 중엔 강한게 좋고, 재미있는 것과 지루한 것 중에선 재밌는게 좋고. 늙음과 젊음 중엔 젊음이 좋으니 다들 몇백살씩 먹고도 주름하나 없고, 못난 것보단 잘난게 좋으니 죄다 미모도 빼어나죠. 그래도 즉위식은 희우씨말대로 엄청 진지할거에요."

 

 나름 친절한 설명이지만 그닥 이해되는 답은 아니다. 하지만 희우는 더이상 질문하기를 포기했다. 더 물어본다고 해봤자 그닥 신통한 대화는 없을것같고, 무엇보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얼른 눕고만 싶다. 디노는 그런 희우를 보더니 돌아가려는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피곤해보이니까 이만 가볼게요. 오늘 별 문제 없었죠?"

 "다리 끊어질것 같아요."

 "안 끊어졌잖아요."

 

 이런 미친노, 아, 아니지. 참아야지.

 

 "그럼 갈게요, 바이바이."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며 나가는 디노에게 같이 손인사를 해줄 힘도 없었는지 희우가 그대로 침대위로 쓰러진다. 근데 뭔가 물어볼게 있었던거 같은데. 아아, 모르겠다. 희우는 결국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잠깐 눈만 붙인것 같은데 벌써 일어날 시간이다. 새벽부터 시녀들이 그녀를 깨우러 들어왔고, 비몽사몽간에 이것저것 입혀지고 얼굴에 뭔가를 찰떡찰떡 발리고 온 몸 여기저기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려서 즉위식 준비를 마쳤다.

 

 겨우 제정신이란 것이 들때쯤 창 밖을 보니 말갛게 뜬 해가 안녕하고 아침인사를 건넨다. 안녕은 개뿔. 오늘이 드디어 댄스지옥의 날이구나. 희우는 차마 입밖으로 불만을 표출하지 못해 엉뚱한 해한테 눈만 부라렸다.

 ​

 "꺄아, 왕비님.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우세요!"

 ​

 이제 이쯤되면 이 아이는 우리 엄마보다 나를 더 예쁘게 봐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격에 겨워하는 로나의 모습이 신기하다. 할수만 있다면 웃어줬겠지만 지금은 기분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렇고 뭐 어떻게 웃을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런 희우의 모습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이 나 있던 로나가 금새 시무룩해져서 물었다.

 ​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면 마음에 안 드시는거라도..."

 "...아니. 아니야. 그냥 좀..."

 "긴장하셨나봐요, 왕비님."

 ​

 응, 그래. 그런걸로 하자. 그런데 사실 긴장을 아예 안했다면 거짓말이다. 즉위식이라 이름붙인 대국민사기극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어찌 마음이 평온할수가 있을까. 거기다 춤에 자신도 없고 취미도 없는 희우로서는 춤판을 벌일 생각을 하니 정말 고역이다. 과연 제대로 해낼수 있을까?

 

 그 때 문이 열리며 시종과 호위병을 거느린 디노가 걸어들어온다. 검은색 차이나카라 상의 위에 화려하게 수놓인 금색 장식과 술, 다리를 딱맞게 감싼 흰색 바지와 부츠는 늘씬한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어깨에 달린 긴 망토는 위엄있게 펄럭인다. 쳇, 멋있잖아. 희우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본심을 후다닥 지우려 애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만은 제발 안 읽었어야 할텐데. 그런 희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노가 상냥하게 손을 내밀었다.

 ​

 "가시죠."

 ​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젠틀한 신사가 따로 없을 디노의 모습에 희우는 자연스레 손을 얹고 말았다. 디노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을 건넨다.

 ​

 "잘 어울리네요."

 ​

 뭐가 두근거리는것 같은건 긴장한 탓이겠지. 암 그렇고말고.

 

 희우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는동안, 둘은 어느새 연회장에 이르렀다. 디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붉은 카펫 위를 사뿐사뿐 걷다보니 점점 더 기분이 묘해진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러다 내가 진짜 왕비가 되는게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 것 같아, 희우는 조심스레 속입술을 깨물며 표정관리를 하려 애쓴다. 희우야, 정신차려. 이건 그냥 연기야. 그렇지만 긴장 탓인지 가슴은 쉬지 않고 콩닥거리고, 목은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

 천장까지 닿은 긴 창문이 열리며 넓은 테라스로 나가는 순간, 희우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왕성의 넓은 앞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전부 하나같이 기대에 부푼 시선으로 자신과 디노를 바라보고 있다. 아, 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는건가?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을 덥썩 하겠다고 한거지. 들뜬 마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희우는 마음 한구석이 슬쩍 불편해진다.

 

 어찌됐든간에 쇼는 계속된다. 미리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로닌이 허리를 공손히 숙이며 두 사람에게 예를 표한뒤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아로닌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앞을 향해 엄숙히 소리친다.

 ​

 "친애하는 마족들이여!"

 

 아로닌의 외침에 작은 수군거림 하나없이 장내가 고요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누구하나 진지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희우 역시 그 엄중함에 압도되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목젖이 꿀꺽하는 소리와 함께 위아래로 춤을 추고, 손 안에 식은땀이 맺힌다.

 

 "나 페일라의 후손 아로닌은 어둠의 조력자이자 마계의 재상으로서 그대들에게 마계를 수호할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심을 알리려 하거늘. 여기 디노리스 마를로 드 엔스카르트는 그간의 전통에 따라 세가지 시험을 통해 마왕이 될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으니, 그 증표는 드래곤의 뿔로 만든 검과 알로시네의 그물로 만든 방패, 그리고 그의 운명의 상대이자 영원의 반려인 채희우가 될 것이라."

 ​

 아로닌의 옆에 서 있던 시종들이 두 가지 물건을 고급스러운 실크에 받추어 정성스레 들어보였다. 하나는 어지간한 사람 키에 달할 것 같은 기다란 장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원형으로 생긴 노란빛의 작은 브로치였다. 저게 아마 세가지 중 두개의 시험을 통과한 증거라는건가. 희우는 마족들이 보이는 선망의 눈빛들을 놓치지 않았다. 저 물건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왕의 증표라고 하니 대단한 것이긴 한가보다. 아로닌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설이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이제 디노리스 마를로 드 엔스카르트는 마계를 수호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 그는 우리의 새로운 주군이 될 것이며 마계의 어둠은 더욱 깊어지리라!"

 

 그 말을 끝으로 마왕성 안에 모인 마족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그들의 열정적인 박수와 함성을 보고있자니 희우마저 괜히 가슴이 벅차오르고 뭉클해졌다. 하긴 내가 살면서 이런 구경을 언제 또 해보겠어. 그 때 디노가 한발짝 앞으로 나서서 군중들을 향해 다가가자 다시 장내가 고요해졌다. 들뜬 고요함 속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그의 입술을 보며 희우는 자연스레 디노가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게 된다. 마왕은 당차게 말문을 열었다.

 

 "어둠의 후손들이여!"

 

 새로운 마왕의 첫 연설이 이뤄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나 디노리스 마를로 드 엔스카르트는 어둠의 군주이자 마계의 수호자로서..."

 

 남자는 일에 집중할때가 가장 멋있다고 했던가. 희우는 어느 순간 디노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만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댄스 파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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