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약간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나는 짙은 샴푸 냄새가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머리카락을 탐하듯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파고 들었다.
“음~~" 이번에는 그가 더 짙은 욕망의 신음소리를 냈다.
시후는 그녀를 다시 꽉 안았다. 그의 거친 숨결이 수지를 흔들리게 했다. 수지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 순간의 짜릿함을 그녀는 깨고 싶지 않았다.
꼭 꼭 숨겨 놓았던 그녀의 모든 촉이 하나씩 하나씩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순간의 쾌락이라도 기꺼이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영원한건 없잖아. 지금 그가 나를 원하고 내가 그를 원한다면...'
그와 사랑에 빠지는 상상에 짜릿함으로 젖어들었다.
“태이야."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
??????
수지는 잠시 자신의 귀를 위심한 듯 눈을 껌벅 껌벅 거렸다.
‘태이????’
정신을 차린 듯 수지의 얼굴이 순간 모욕감으로 일그러졌다. 분노가 폭발했다.
잠시지만 그 남자 앞에서 자신의 모든 방어벽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수지는 세차게 그를 밀었다. “저리가요."
그가 흠칫 놀랐다.
“수지야..."
시후도 이제야 상황을 판단한 듯 했다.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저리가.” 그녀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안을 수 있고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그런 쉬운 여자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칼바람처럼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이 남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착각했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다.
‘그래.. 신데렐라는 동화책 속에서나 가능한 거라고, 뭘 기대한 거야. 차수지.'
그녀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빠 생각이 난 것이다.
7년전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느꼈던 그 쓸쓸함이 가슴에 물 밀 듯 밀려왔다.
이 세상에 내편이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오는 그 지독한 외로움.
눈물이 그녀의 볼 위로 타고 내렸다.
“미안..미안, 수지야." 시후도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이 시후를 너무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 이야기 좀 들어봐.. 금방 태이 이름이 나온 거는 너가 생각하는 그런."
“듣기 싫어요. 그냥 가세요. 그런 구질구질한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혼자서 맛있는거 많이 사 드세요. 이제 연락 안했으면 하네요. 연락할 일도 없겠지만."
수지는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모욕감과 슬픔과 외로움과 분노가 서로 싸움이라도 하듯 팽팽하게 올라왔다.
그녀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자존심 하나로 살았던 자신이 무너지는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기 싫었다.
시후는 돌아서는 수지를 잡지 못 했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느꼈을 모욕감이 짐작이 갔다.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시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지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마음이 시려왔다.
왜 눈물이 나는지 수지는 알고있다.
‘짐작했었잖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태이라는 것을.. 결심했었잖아. 절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왜 우는 건데, 왜 바보같이 우는 건데...'
수지는 자신을 향해 외쳤다.
아무에게도 열지 않았던 마음을 쉽게 연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울고 싶었다. 오늘은 울고 싶었다. 오랜 세월 참았던 외로움이 물 밀 듯 밀려왔다.
몸에서 열이 나는 듯 했다.
'아프면 안 되는데.. 원고 마감해야 하는데...‘
“차 작가.. 이번 원고 내용이 정말 좋은데.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어?”
“마음에 드세요?” 수지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잘 하면 다음 드라마 작품으로 괜찮을 것 같아. 히트 칠 것 같은데. 내 사랑 어디에? 제목부터 마음에 들어... 그래.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할 건가? 이 여 주인공이 진짜 살아 돌아 온걸로 할 건가? 아님 주인공을 닮은 여자로 할 건가?”
금색 테 안경을 쓴 박대오 대표는 원고 마지막을 펼치며 수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생긴 것처럼 평상시 깐깐하기로 소문난 박 대표에게서 칭찬을 들으니 수지는 며칠간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아직 그 부분을 결정하지 못했어요. 11년 후 살아 돌아온다는 게 너무 불가능한 스토리이지 않을까요?”
“그래, 그래, 그 부분은 차 작가를 믿어보겠네. 이번 달 말까지 원고 다 완성해서 다시 가져오게.”
박 대표는 수지를 격려하며 원고를 건넸다.
원고를 받아들고 복도를 걸어 나왔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아침에 화장할 때 보니 진한 다크서클이 광대뼈가지 내려와 있었다.
저승사자와 친구라고 해도 믿을만큼~.
"휴~~", 그녀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며칠 미친듯이 일만했다. 마음이 복잡할때는 오직 목표만 바라보고 몸을 혹사시키는게 최고의 방법.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다.
아픈 감정을 어루 만지는건 있는자들만이 부리는 사치였다.
“툭 툭” 누군가 그녀의 축 처진 어깨를 쳤다.
“칭찬 들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왜 이리 어깨가 축 처진 거야?”
민재 선배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선배?” 그녀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 해졌다.
“왜 그래?” 그의 눈이 놀래서 동그래졌다. "무슨 일 있었어?” 민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 너무 외로웠는데, 자신을 보고 걱정해주고 웃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위안이 되어 눈물이 난것이다.
“아니에요.” 그녀는 슬쩍 눈물을 훔치며 민재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녀의 눈이 좀비처럼 휑했다.
“며칠 제대로 잠을 못 잤구나? 오늘은 불금이라도 집에 빨리 들어가야겠는데."
“선배?” 그녀가 할 말이 있는 듯 민재를 빤히 쳐다봤다.
“저 오늘 술 좀 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