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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아이어른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18.11.10

8년 전 입사했던 제약회사가 불법실험 때문에 무너진 이후 신창준은 그저 그런 어른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앞에 나타난 한 남학생이 9년 전 보았던 아이란 걸 안 창준은 그에게 도와달라는 제안을 듣는다. 8년전 무너진 회사 때문에 그의 직장동료였던 수진은 자살했다. 처음 봤을 때 열 살이었던 아이는 이제 열아홉이 되어 복수를 하겠다고 창준 앞에서 선언한 것이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창준의 일상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31. DM클럽 11호점_2
작성일 : 18-12-15 12:34     조회 : 277     추천 : 0     분량 : 8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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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를 잡은 그는 말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마이크를 잡고 서있는 모습이 매우 낯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저 미친놈이 저기서 뭐하는 거냐는 강한 분노도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드릴 말씀이 여러분에게 아마 큰 도움이 될 거라서 이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늙은이의 말을 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준비된 듯한 대사를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러 번 혀를 낼름거려 입술을 적셨고,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라 동공이 여기서 저기로 튀고 있었다. 그의 말은 진부했고 그 스스로도 말했듯이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았다. 그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이유였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가릴 의도 없이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선명하게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금색 눈동자였다.

 한차례 꺼내서 윤택을 내고 다시 넣어놨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반지르르한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전보다 유달리 커보였고 사람들은 시력 없는 그 눈동자에 못박혀 쳐다보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유명한 신자와 신도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얼핏 이런 풍경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우선, 저는 날다람쥐2호입니다. 날다람쥐3호!"

 으잉? 하는 반응이 퍼져나가기 전에 그가 크게 호명했다. 인파 중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후로 시작된 호명은 번쩍번쩍 솟아나는 팔과 함께 이어졌다. 11호가 지날즈음 무대 위로 나온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것이 긴 열차처럼 대열을 만들고 이어졌다. 12호입니다. 13호입니다. 14호입니다... 단조로운 이 행사를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호기심과, 나와서 날다람쥐몇호를 운운하는 사람들 모두가 어디 하나쯤은 일반인과 다른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날다람쥐128호라는 말한 남자가 자신이 끝이라고 말했다. 128명이면 현재 DM클럽 내부에 수용 가능한 총 인원 수의 4분의 1정도였다. 그들은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이곳에 어울릴법한 사람 아닐 사람. 또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다 있었다. 자신의 이름-물론 다 가명이지만-을 말하는 걸로 그 사람들은 뭉퉁그려있던 그늘에서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 후로는 2층에서도 속속들이 개성을 가진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2호영감이 말했다.

 "저희는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공통점은 여러분이 들고 있거나 마셨거나 앞으로 마실 예정인 와인에 있습니다."

 의아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본인이 들고 있는 와인을 쳐다보거나 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뭔들 보일리 없었다.

 "엔씨(N.C)라고 하는 이 물질은 일종의 마약이지만 반응하는 개체수가 많지 않습니다. 효능도 제각각이고 발현시기도 다양합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삼사년 뒤에 나타나기도 하지요. 마약과 비슷한 효과를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합니다. 제 말이 너무 뜬구름같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저처럼 눈이 노랗게 되어 시력을 잃기도 하거니와, 어떤 사람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도 웃는 겁니다."

 몇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은 숨을 삼켰다. 나는 어느새 2층 난간을 꽉 붙잡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도명제약의 산물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나와야하지 말아야할 물질을 연구하고, 약품으로 만든 건 도명제약 뒤를 이은 DM클럽입니다. 반응군이 다양한 엔씨를 상용화하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하겠죠. 여러분처럼 건강하거나 혹은 건강하지 않더라도요. 나이대도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수년전 도명제약이 실험군으로 삼은 건 중년층이었습니다. 이번엔 젊은이들이 좋겠죠. 아시다시피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제가 대체 뭘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짐작할 뿐입니다. 이 눈을 잃고 나서 생긴 본능적인 감각으로요."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 도명제약이 뭐냐고 묻는 이들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나뉘었다. 이거 이벤트예요? 새된 목소리도 섞여들었다.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막아."

 김도욱이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려와 소름이 돋았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최훈이 일어섰다. 그는 재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음악이 켜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음악소리에 묻혔다. 웨이터와 직원들이 나와 날다람쥐2호 영감의 마이크를 빼앗았다. DJ로 보이는 사람이 그걸 쥐고서 말했다.

 "여러분 문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으로.."

 해명하라는 웅성거림이 섞여들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DJ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난감해했다. 그가 쩔쩔매는 사이 내 뒤로 김도욱이 지나갔다. 나는 그때서야 고개를 돌렸다. 김도욱의 잔향이 내 등 뒤에 남아있었다. 나는 더 멀어지기 전에 그를 따라나섰다.

 발걸음을 죽이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몸을 돌려가며 인파를 피해갔는데 그럴 때마다 행여 김도욱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볼까 조마조마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최대한 타인의 접촉을 피하는 것 같았다. 부지기수로 누군가 그의 몸을 묵직하게 누를 때면 얼굴이 구겨졌다. 양복을 털어내는 손놀림에는 불쾌감이 한껏 베어 있었다. 나는 그런 김도욱을 보느라 볼이 눌리고 사람들의 체취에 잔뜩 휩싸였다. 복도 사각지대를 지나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은 음영이 한층 낮았고, 무엇보다 방음이 되어있는 듯 바깥 소리가 웅웅하는 진동으로 바뀌었다.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돌리며 달칵거리는 소리를 냈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향하는 곳은 지하3층이었다. 3층 문은 잠금장치가 달려있었고 김도욱은 재빠르게 버튼을 누르려했지만 두어 번 정도 실패했다. 덕분에 번호를 보는 건 쉬웠다. 삐비빅 소리가 나고 그가 사라졌다. 머릿속으로 30초를 세었다. 세상이 끝날 듯 느린 숫자를 고르고 골랐다. 김도욱과 같은 소리를 내며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와인창고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아닌게아니라 정말 지하 3층을 모두 술로 뒤덮은 모양이었다. 입구부터 맞은편 벽 끝까지, 바닥부터 천장에 조금 못미치는 높이까지 빼곡히 늘어선 나무선반에 성인남자 팔뚝만한 와인병이 차곡차곡 꽂혀 있었다. 그 규모와 수에 왠지모를 화려함까지 느껴졌다.

 "이 쥐새끼같은..."

 김도욱이 이를 갈았다. 나는 숨을 헉 삼켰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기왕이면 날다람쥐라고 해주면 좋을텐데요."

 통로를 제외한 벽 양쪽에 자리매김한 거울 언저리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비켜서 있다가 나온 것이겠지만 거울로 늘어난 공간 특성 때문인지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치호는 특유의 여유로움을 담고 김도욱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내 눈엔 김도욱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날다람쥐?"

 "네."

 "네가 날다람쥐1호구나..?"

 "네. 제가 1호네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글쎄요. 문 열고?"

 한참이나 어린 녀석이 신경을 긁으니 김도욱도 어지간히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는 굵진한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한번만 봐준다는 듯 서글서글한 말투로 대적한다.

 "여긴 관계자 외 출입금지야."

 "사장님은 여기 왜 오신 거죠?"

 "사장님이라니? 내가 왜 사장이지?"

 "그러면 대표님?" 치호가 받아쳤다.

 "말장난할 생각 없어."

 "그러면..아버지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실제 DM클럽의 대표."

 치호가 입을 다물자 지독한 적막이 흘렀다.

 "제가 언제부터 여기 와있었을 것 같나요 대표님."

 "시끄러.."

 "증명할만한 와인은 이미 밖으로 옮겼습니다. 대표님."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너, 더 이상 그 이름 입에 담지마."

 김도욱이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한쪽 손으로 머리와 귀를 꽉 감싼 자세였다. 으으, 낮은 신음이 터져 나오고 김도욱은 한 번 더 시끄럽다고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고요했던 와인창고가 쩌렁쩌렁 울렸다.

 치호는 조금 놀란 얼굴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착한 모습에 되려 내가 놀라고 있었다. 저건 연기인가? 아니면 본모습인가.

 이내 그는 아하, 라며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주먹을 콩 하고 올렸다. 작위적인 몸짓이었지만 김도욱은 치호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요할 정도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거슬리는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

 "그 소리 들리세요?"

 이번에 눈에 뜨게 움찔한 건 김도욱이었다.

 "너도..들려?"

 치호는 그저 웃었다. 김도욱의 시선이 불안으로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날 속이지 마.. 난 안 속아. '이 녀석'도 말하고 있어. 네 말은 다 거짓이야. 내가 속을 것 같아?"

 "아버지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뒤에 서서 조종하는 게 재밌지 않냐고 말하던가요?"

 "하, 하참 잘못 짚었군. 이 녀석은 아버지를 죽이라고 했어. 나보고 친부살해를 하라고 하더군. 내가 그런 미친소리를 들을 것 같나? 다 이 녀석을 위한 만찬일 뿐이야. 아버지는 껍데기일 뿐이야. 내가 말하는 건 옳지만 너는 아니야!"

 "그 와중에도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군요."

 "뭐?"

 치호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잘못 짚었죠. 저는 그런 소리 안들리니까. 당신의 행동. 전형적인 편집증(조현병) 환자잖아."

 김도욱의 숨이 거칠어졌다. 치호가 눈썹을 그러모았다.

 "이제 꿈에서 깨실 시간입니다. 김도욱씨."

 치호가 옆에 있던 선반에 팔을 넣고 있는 힘껏 밀었다. 힘에 못이긴 와인병이 구르고 깨지며 돌바닥에 산산조각났다. 김도욱이 포효하며 그에게 달려든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등장해야할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그때까지 구석에서 숨이나 죽이고 있던 나는, 사실상 폼 잡을 여유도 없이 뛰쳐나갔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김도욱의 얼굴색이나 근육 같은 사소한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치호에게 달려드는 순간 거의 엇비슷하게 반응한 것도 나였다. 얼추 두 사람이 한 남자애에게 달려드는 듯한 양상으로 지하내부에 세 사람이 등장했다. 그 와중에도 치호의 동공이 눈사태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감이 좋은 녀석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치호에게 집중하느라 나를 보지 못한 김도욱을 내 온몸으로 깔고 뭉개며 어디서 본듯한 자세로 뒷 팔을 꺾어 제압했다. 아, 이게 되는 거구나. 김도욱이 소리를 질러서 보니 깨진 와인병에 허벅지가 쓸려 피가 나고 있었다.

 "뭐야?!"

 황당한 치호의 말에 내가 답했다.

 "왕자님 등장..?"

 내 밑에서 김도욱이 꿈틀대는 와중에 위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위험을 감지한 그가 나가자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어..?"

 다리에 힘을 실어 일어서는데 무릎이 휘청거렸다. 내가 잡고 있던 김도욱과 함께 바닥에 주저 앉았지만 이내 바닥과 함께 머리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으아아. 초점을 맞출 수 없는 시선에 치호로 보이는 뭔가가 휙휙 지나갔다. 그가 나를 부르는 듯 했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김도욱이 비릿하게 웃었다. 치호가 나를 부르다,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했다. 그가 입술새를 씹으며 다시 나를 불렀다. 대답을 하려 했으나 어지러워 도무지 정신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상이 돌다가 딱 멈췄다.

 눈을 감은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지하실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이치호도 없고 김도욱도 없었다. 기울어진 선반과 깨진 와인병은 그대로였다. 뭐지? 바닥에서 형광등을 반사시키는 유리조각을 보다가 인기척이 나 고개를 들었다. 역광으로 얼굴이 잠시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중단발. 굽이치는 머리를 풀고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이는 수진이었다.

 "왜..."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물으려던 질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잘 지내?"

 미쳤구나 신창준. 물어보고 싶었고 떠오르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는데도 막상 말하고 나니 적절치 못했다. 잘지내냐니. 나참..잘지내냐니.

 "...잘 지내요."

 수진이 웃었다. 스물아홉의 수진과 서른여덟의 나. 이 와중에도 잘 지낸다며, 너는 친절했다. 그대로 멈춰있는 그 시간 속에 잘 지낸다는 그녀의 말은 대체 어디서 온걸까. 그녀가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이거 꿈이야?"

 "네. 꿈이에요. 그러니까 여기 있으면 안 돼."

 "꿈이면 당신도 내가 만든 거야?"

 "..."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말 없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이건 나의 환상이야. 대답하지 않는 건 내가 그 대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고.

 "시간이 됐어."

 댕.댕.댕. 어디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옛날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음산하고 커다란 괘종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이 소리는 그런 괘종시계에서 나는 소리일거야. 나는 확신하면서, 왜 그런 소리가 났는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늦기 전에 말해야 했다. 나는 뒤돌아서는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머리칼이 굽이쳤다. 그녀는 내 앞에서 머리를 푼 적이 한번도 없었다.

 "미안해!"

 "...."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서.. 네가 중간에 이상하다는 그 말을 대충넘겨서. 그리고 일이 위험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발을 빼서. 당신이랑 최훈이 고생하는걸 보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그저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알 수 있던걸 넘겨버려서. 내가 너무 비겁해서..!"

 그때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언젠가 마주잡았던 보드라운 손이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보아서 다행이었다. 이게 내 꿈이라면, 겪지 못한 환상이 나와 무엇을 하던 그 느낌은 실재와 다를 테니.

 나는 그녀의 갸날픈 몸을 확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역시. 푸스스 부서지는, 공기처럼 허한 감각 뒤에 그녀는 없었다. 동시에 사위가 깜깜해졌다.

 아득했던 소리는 점점 커졌다. 댕.댕.댕.댕.댕..!

 달깍.

 뚜껑을 돌리는 손이 보였고 모든게 갑자기 생생했다. 파하, 라며 숨을 크게 내뱉었는데 아마도 느낌뿐이었던 것 같다. 순간이동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순식간에 내 주위가 온통 그려지고 색채를 입고, 그 위에 소리가 덧씌워졌다.

 놀란 눈으로 처음 보인 손을 따라가니 손의 주인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치호는 고개를 돌리려다 다시 나를 보고 말했다.

 "정신 들어..?"

 "어..아우, 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그가 뚜껑을 딴 생수병을 내게 주었다. 갑자기 목이 타서 꿀꺽꿀꺽 마시고 나서야 살 것 같았다.

 "병원...은 아니네."

 "구급차 불렀는데 일단 여기로 왔어. 경위조사는 받아야된다고 하길래."

 앉아있던걸 보니 잠든 것 같지는 않은데 아까 그 지하 3층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치호가 손짓하자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날다람쥐2호 영감은 걸어와서 나를 품평하듯 요리조리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제 깼네. 자네 엔씨에 면역이 안된데다가 알코올 섞인 걸 먹었으니. 아무래도 와인에 있던건 내가 알던 엔씨보다 좀 더 강력해진 듯허이. 여기 자네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 걸 매매하려고 하다니, 괘씸한 것들."

 나는 입을 헤 벌렸다.

 "아니, 그런 멍청한 표정 짓지마. 얼핏 보면 아직도 자네가 중독된 줄 아니까. 환각을 심하게 앓는것 같던데 괜찮나?"

 나는 공기중으로 흩어져버린 수진을 떠올렸다. 그녀가 나타난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게 내 환각이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으나 믿고 싶지 않다는 말이 딱 맞았다. 끄응 하며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경찰서 내부는 여러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방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었을 사람들이 즐비해있었다. 초점 없는 두 눈으로 뭔지 모를 환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기괴한 풍경이었다. 나처럼 어지러운 듯 머리를 부여잡고서 구급차를 불러달라는 사람. 경찰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 사람. 적어도 오늘밤 DM클럽에 온 사람들이란 것만은 알았다. 한쪽 구석에는 아까 자기소개를 마친 날다람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들은 굳센 의지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국가대표 선수들 같았다. 하나같이 무엇이든 말하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는 얼굴이었다.

 어느정도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기시감이 나를 덮쳤다. 어수룩한 어둠에서 수술대위로 끌어올려진 듯한 밝은 조명. 철판 위에 부는 냉랭한 바람처럼 각자의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 어수선하고 밝은데도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찰서의 풍경이 그러했다. 불안감에 뭔가를 잘근잘근 물어뜯고 싶을 지경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한참동안 주물럭거리다 쳐다보니 종이가 휴지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구급차는 생각보다 더 늦어졌고, 나도 경찰의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그런 내 행동을 약에 취해 그런 거라 판단했다.

 잘 위조한 치호의 신분을 경찰이 드러내기 전, 그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놀란 표정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녀석의 모습을 예견했지만 이 역시 내가 상상했을 뿐이었고, 그는 그다지 놀란 기색도 아니었다. 네가 부른 거냐는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치호를 보고 경악한건 되려 내쪽이었다.

 "안녕하세요. 치호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깍듯하게 내게 인사하는 그는 초짜가 봐도 제대로 된 비율의, 그야말로 완벽한 조각상 얼굴 덕분에 차가움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상황은 모르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기색만큼은 무척이나 당당했다. 경찰에게 조용히 묻고 답하는 모든 것들에 여유로움이 담겨있었다.

 나와 치호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경찰서 밖으로 나왔고 나는 구급차에 타기를 거부했다. 네카가 인체 내부에서 어떤 화학반응으로 작용하는지는 내가 삼 년 가까이 보던 것이었다. 그게 알코올과 결합되었을 때 나오는 반응 또한 내가 짐작하는 범위 수준에 지나지 않을거라 생각하니, 일단 쉬고 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저 나중에 유진의 병원이나 들러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가면서 이치호가 허리를 깊이 숙여 꾸벅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낯설어 나는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아버지와 떠났다. 나는 그제야 최훈을 떠올렸지만 그 남자를 찾을 수 없었다. 경찰서에 있었을 텐데. 아직 안에 있는 건가? 아니면 먼저 갔을까? 하지만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에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최훈이 과거의 나를 지금과 겹쳐서 보지는 않았을까. 그 시절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유쾌하지 못했다.

 술 때문인지 네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모든 것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밤은 길었다. 나는 찬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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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그와 나(1) 2018 / 11 / 17 288 1 3176   
7 7. 그녀와 나 2018 / 11 / 17 289 1 2075   
6 6. 그(5) 2018 / 11 / 17 291 1 4345   
5 5. 그(4) 2018 / 11 / 14 270 1 3274   
4 4. 그(3) 2018 / 11 / 11 260 2 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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