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꿈??? 또 옛날 꿈을 꾼거야?'
시후의 눈가에 눈물이 맽혀있다.
"22년 전 있었던 일이 이렇게 생생하다니..."
그는 혼잣말 하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똑똑."
"도련님...사모님 오셨습니다. 지금 도련님을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아침부터 이정애 이 여자는 무슨 일이지?'
그는 기분이 언짢아 눈살을 찌푸렸다. 대답이 없자 다시 집사가 문을 노크했다.
"알았어, 곧 나갈게."
"아침부터 어쩐 일이시죠?" 그의 목소리는 냉랭하다.
"넌 두달만에 들린 엄마를 너무 섭섭하게 대하는거 아니니?"
그녀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나오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어떤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집으로 여자를 데리고 온건 처음이라 확인차 들렸단다.
앞으로 이 집안 며느리가 될수도 있는데 내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니?"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카랑카랑 하다.
"아줌마가 상상하는 그런 여자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시후의 목소리는 겨우 흥분을 누른 상태이다.
"무슨 뜻이냐?"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겁니다. 그러니 착각 그만 하시고 돌아가세요. 전 아침에 회의가 있어서 들어 가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그냥 가마. 일단 지켜보면 알겠지. 그리고...시후야.. 아직도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는게 맘 편치 않구나.
난 법적으로도 벌써 22년째 너의 엄마이자 너의 아버지 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영감, 배웅해 드리게."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정애의 얼굴이 모욕감을 감추지 못해 울그락 불그락 거렸다.
시후는 그녀를 뒤로 둔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디 두고보자. 이 녀석."
정애가 섬뜩이는 눈으로 시후의 뒤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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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시후에게 영감은 급하게 전할 말이라도 있는 듯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수지 아가씨가 오늘 점심때 전화가 왔습니다.”
“수지?”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지난번 가실 때 제 전화번호를 드렸었는데...아가씨가 목걸이를 잃어 버렸다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메이드에게 찾아보라고 시켰는네...다행히 서랍장 밑에서 이걸 찾았습니다.
수지아가씨에게 아주 특별한 목걸인 듯 했습니다. 어찌나 반가워하든지. 허허."
영감이 미소지으며 계속 말했다.
“도련님이 직접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 드립니다. 조금 있다 도착하신다 합니다.”
“아.. 알았어.”
그는 무심한 듯 목걸이를 건네 받았다.
가운데 작은 메달이 있는 중간 두께의 금 목걸이였다.
왠지 낯설지 않는데...어디서 꼭 한번 본 것 같단 말야...
그는 목걸이를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T Y .... 이건 무슨 의미이지?"
메달 뒤에 새겨진 이니셜.
수지는 아니고 ...... 설마?
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김시후 정신 차려.. 자꾸 그녀에게서 태이의 흔적을 찾으려고 하지마.“
“도련님, 아가씨 도착하셨습니다.”
갑자기 그의 가슴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줘."
‘시후,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좀처럼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신 헛기침을 했다.
서재 창가에 그녀가 서 있었다. 속이 살짝 비치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약간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짙은 녹색 스커트를 입고 있다. 허리 라인 위로 올라온 하이 웨이스트 치마 때문에 그녀의 가는 허리가 더욱 더 짤록해보였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떼기 싫었다.
“아~~."
그의 입에서 낮은 감탄의 신음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늦은 오후 마지막 뜨거운 햇살에 비춰진 그녀의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지난번 보다 더 밝은 갈색으로 보였다. 눈부셨다.
그는 숨 죽여 그녀를 바라봤다. 겨우 진정시킨 그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아.. 안녕하세요.. 차수지입니다. 잘 지내셨죠?“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향해 가볍게 목 인사를 했다.
"제 목걸이가 여기 있다고 해서..”
그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향이 느껴지자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당황한 수지는 그에게서 두어 발 뒷걸음 쳤다.
“제 목걸이 어디에 있죠?”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있어. 근데 궁금한게 한가지 있어. 아가씨 이름은 차수지인데 여기 이니셜은 왜 TY인거지?“
“아~~! 원래 이 목걸이는 돌아가신 엄마꺼에요.
아빠가 엄마에게 주신 선물인데 엄마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새겼다고 들었어요."
“그렇군..."
실망한 표정이 그에게서 비쳤다.
“이 목걸이 쉽게 풀리는 고리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설마 다시 여기 오고 싶어 일부러 빼 놓고 간건 아니겠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제가 얼마나 찾았는데...."
순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이런, 이런. 내가 농담이 심했나? 농담이었어.. 하 하 그렇게 정색 할 필요는 없잖아.”
그가 그녀 코앞에까지 바짝 다가섰다.
'무슨 짓이지?'
수지는 당황스러운 듯 두어발 뒷걸음 쳤다.
그의 숨 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뭐 하시는 거에요?”
그녀에게서 약간 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 대답 없이 그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목뒤로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