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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란 씨 힐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걷는 게 불편해 보이는데."
" 전혀요. 걱정 마세요."
주연과의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애란 이지만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밀리는걸 용납할 수 없었던 애란은 다소 무리한 하이힐을 고집한다.
" 너 그 신발 신고 지금 나랑 밀고 당기는 신을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왜 아니겠어요. 아주 리얼하게 하자고요 우리."
" 율이 하고 합은 맞춰본 거야?"
" 무슨 합이에요. 손도 안 닫게 찍는데."
" 그래도 맞춰봐야 할 거 아니야. 허리는 숙일 수 있겠냐고 그 상태면......"
"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언니 동선이나 잘 파악하세요. 투 샷 때문이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왜 말을 빙빙 돌려요."
" 휴~ 그래 네가 알아서 해라."
' 별걱정을 다해주는 척 하네. 그런다고 누가 벗을 줄 알고?'
주연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에 들어가는 애란. 바로 연결해 들어올 신으로 문밖에 서는 리안은 이런 상황을 알지 못했다.
" 자 수민(주연의 극 중 배역)이 보는 앞에서 건우(율의 극 중 배역)가 윤희(애란의 극 중 배역)에게 뺨을 맞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둘이 실랑이 곧이어 인재가 사무실로 들어와 그 모습을 목격하는 신까지 원테이크로 연결할게요."
" 네"
" 자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되고 조용해진 세트장 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현에게 피터가 조심스레 다가간다.
" 저 꼬마가 너의 아기야?"
" 맞아."
" 엄마를 닮아 천사같이 이쁘네."
" 고마워 하지만 잘못 봤어."
" ?"
" 훨씬 이뻐 나보다 더"
" 후후 엄마들이란."
어느새 수현이 걱정하던 신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화를 멈추고 율이에게 집중한 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수현.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는 피터는 자신이 이토록 짧은 만남만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 이 아이 때문에.......... 인재 씨가 당신을 다시 만난 것도 나를 이렇게 버린 것도 모두다 이 아이 때문이야!!"
" 아니에요. 인재 씨는 건우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애란이 율이의 뺨을 때리려 몸을 숙이는 순간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그녀가 얘기치 못하게 넘어질 듯 기우뚱거린다. 그 모습을 보던 수현은 순간 잘못됐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 안돼. 저대로 있다간.......'
이상태로 라면 애란이 넘어짐과 동시에 아이가 그 아래로 깔려버릴 위험천만한 상황.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수현이 미친 듯 율이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애란도 넘어지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놈의 하이힐이 역시나 문제였다.
" 아악~!"
무리하게 버틴 애란의 발목이 꺾이고 기어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하지만 애란이 넘어진 곳은 율이가 아닌 수현의 위였다.
" 아아악!"
" 으으윽 괜찮아. 율아 괜찮아"
넘어지는 애란은 아픈 다리를 본능적으로 빼며 다른 발을 다시금 앞쪽으로 내디뎠고 그 발은 수현의 발목을 짓이기고야 말았다. 애란의 비명으로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수현은 그 소리에 놀랄 율의 귀를 막고 작게 신음을 토할 뿐이다.
" 애란 씨!!"
" 아악 수현 씨 피!"
쑥대밭이 된 그곳으로 스태프들이 황급히 달려간다. 물론 문 넘어 서 있던 리안이 제일 먼저 수현에게로 다가갔다.
"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흥분한 리안이 소리를 지르며 애란을 밀어내고 수현과 율이를 확인한다.
" 율아. 괜찮아?"
수현은 그 와중에도 율이 걱정뿐이었다. 놀란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급하게 아이만을 생각하고 달려들어 쓸린 팔과 하이힐에 찍힌 발목이 피로 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어......... "
그런 율을 꼭 안아주는 수현. 자신의 상처보다 놀랐을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독여 준다.
" 우리 아가 많이 놀랐구나......."
" 흑흑 어.....엄마......빠....빨게"
" 율이도 엄마랑 뛰어 뛰어 놀이하다 넘어져 무릎이 까졌었지? 하지만 약 바르고 괜찮아졌지요? 엄마도 약 바르고 율이가 호야 해주면 금세 나으니까 울지마. 엄마 괜찮아."
자신의 차분한 목소리로 놀란 율을 진정시키는 수현의 모습에 피터는 두 눈을 감아버린다. 트라우마. 피터의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 누나 병원에 가자. 일어설 수 있겠어? 민아!"
수현의 상처에 극도로 흥분한 리안이 자신의 매니저를 부른다. 하지만 그 앞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지 대표였다.
" 수현 씨는 우리가 모시고 병원에 갈 테니 넌 마저 찍어."
" 무슨 소리야 내가 같이......."
" 사람들 많은 데서 대 놓고 광고하겠다는 거야? 다 내팽개치고 프로답지 못하게 친한 누나 병원을 따라가겠다. 누가 봐도 이상할 거란 생각 안 해?"
" 하지만......."
" 대표님 말씀이 맞아."
수현이 리안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 나로 인해 그렇게 한다면 내가 널 어떻게 만나. 나 때문에 리안으로서 네 자리를 잊지 마."
" 알았어....... 알았다고"
아직 울먹이는 율이의 얼굴을 매만지며 미소짓는 수현.
" 율아. 아까 엄마랑 했던 약속 기억나?"
" (훌쩍훌쩍)"
" 울지 않고 잘 할 수 있다고"
" 하지만 엄마 율이 무서워......"
" 아니야 율이가 얼마나 용감했는데 우리 율이가 엄마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엄마는 정말 많이 다쳤을 거야."
" 정말?"
" 그럼 정말이지. 눈물 닦고 우리 멋지게 해내고 오자. 엄마 기다리고 있을게. 율이 찍고 올 때까지."
" 아니야. 엄마 병원 가서 호야 하고 와. 율이 혼자 잘할 수 있어."
" 어?"
" 엄마 아픈 거 싫어. 율이 이제 안 무서워. 엄마 지키려면 용감해 져야 해. 할 수 있어!"
" 내가 잘 지켜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율이 말대로 해. 율이 아빠랑 같이 멋지게 해낼 수 있지?"
" 네~"
이렇게 아이도 부모도 한 뺨씩 자라나는 걸까 그런 율이의 모습에 수현은 가슴이 뭉클해진다.
" 수현 씨 내 어깨 짚고 일어나요. 민이가 지금 차를 더 안쪽으로 끌고 올 거니 조금만 힘내."
" 아 네 죄송해요."
" 내가 안아서........"
리안의 말에 지 대표와 수현이 동시에 쏘아본다.
" 알았어! 알았다고. 정말 못 해 먹겠다. 기다려 민이 불러 같이........"
' 번쩍'
" 꺅!"
지 대표의 어깨를 붙잡고 애를 쓰며 일어나는 수현을 누군가가 번쩍 안아 올린다.
" 진짜 천사 아냐? 왜 이렇게 새털같이 가벼워?"
" 피터! 너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접근금지란 말 잊었어? 빨리 내려놔!"
" 워워 리안 진정해. 우선 다친 거부터 치료를 해야 하지 않겠어? 네 옷에 피를 묻힐 순 없잖아."
" (으드득)"
" 그래 피터 말대로 해. 수현 씨도 이편이 편할 테고"
" 꽉 잡아. 안 그러면 떨어진다."
" 그 정도 힘도 없이 날 들어 올린 거야?"
" 후후후 물론 아니지. 가자 모차렐라."
수현을 안고 걸어가는 피터의 뒷모습을 보며 은석은 이를 악문다. 아무리 여자를 좋아하는 피터지만 자신의 몸이 귀찮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그라는 걸 알기에 은석은 심기가 불편했다. 저건 단순히 여자를 꼬시던 피터의 모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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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에 갈 거야."
" 누나 일단 조금만 참고....."
" 참아? 너 내 발목 꺾이는 거 못 봤어? 참기는 뭘 참아!"
" 하지만 오늘 촬영 미루면 다음 스케줄들 다 엉킨다고요. 인터뷰며 화보까지 줄줄인데."
" 아 몰라!!"
시형은 이런 프로 의식 없는 애란의 모습에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는다.
" 신발 어딨어요?"
" 네?"
은석은 다시 한번 애란에게 말한다.
" 신발 어딨냐고."
" 무슨 신발을 말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석의 눈에 가지런히 놓인 애란의 높은 하이힐이 눈에 띄었다.
" 저건가?"
" ?"
신발을 낚아챈 은석을 멍하니 바라보던 애란은 이내 몸을 부들부들 떤다. 자신의 신발 굽을 은석이 모조리 꺾어버린 게 아닌가.
" 지.......지금 뭐 하는 거예요!!"
" 딱 한 번만 말할게. 잘 들어. 어떤 이유에서건 이렇게 생각 없는 짓으로 다시 한번 피해 주면 그땐 신발 굽만 꺾는 거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발목이 으스러져도 당장 일어나 촬영 준비해. 네가 연기자라면 말이야. 그리고 시형 씨."
" 아...아....네."
" 구두값은 민이한테 말하면 바로 처리해 드릴게요."
만신창이가 된 애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간다. 그 모습을 보던 시형은 어디선가 깨소금 냄새가 솔솔 풍기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