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져나오는 분노의 메아리를 있는 힘껏 삼켜낸 하지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세탁비는 됐구요. 그 동생 전화번호나 주세요."
"저기..일단 제가 지금 현금지급기 가서 세탁비를.."
"세탁비든 사과든 그쪽 동생한테 받아낼 테니까 전화번호 달라구요."
"아..네..당연히 사과 받으셔야죠..근데 아직 어린애라 돈은 제가.."
"이봐요. 나 지금 끈끈해 미치겠어서 여기 이러고 서 있는 것도 짜증나거든요? 번호나 주고 갈 길 가요."
"아.. 네.. 이, 일단 제 번호 드릴게요..저한테 연락하시면 제가 제 동생 데리고 나와서 꼭 사과드리겠습니다.. 꼭 연락주십시오.. 세탁비도 꼭.. 반드시.."
"말 안통하시네."
"예..?"
"그쪽이랑 말 더 섞일 일 없구요. 이 지랄해 놓고 사과 한 마디 없이 도망친 그 쪽 동생한테 제가 직접 연락할 테니까 번호나 주세요. 어려? 어리니까 어릴수록 교육을 잘 시켜야죠. 잘못을 했으면 책임도 지고, 사과도 하고. 안그래요? 지금 어딨어요? 번호 줘요. 전화하게."
"아.. 네..옳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알아듣게 확실히 교육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지, 지금은 얘가 콘서트..아니 팬미팅에 너무 늦어서 핸드폰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동생 핸드폰도 지금 저한테.."
"뭐요? 어딜 가? 뭔 트?"
"아, 저 그게..콘서트...아니 팬미팅에.."
"하.. 사람 이 꼴 만들어놓고 콘서트? 제정신이예요? 어리댔죠? 몇 살? 학교 이 근처예요? 고등학생?"
학교 이름 대요.
수많은 진상 고객들한테도 꿀리지 않던 하지였다.
자신이 을이고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월급을 받아 먹어도, 아닌 건 아니었고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뭐?
멀쩡한 사람에게 피해를 끼쳐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콘서트장으로 토껴?
그런 것들이 자라서 이 사회의 진상 고객이 되는 거라고, 애초에 뿌리를 뽑아야 된다고, 큰 눈을 부라리며 하지는 의지를 불태웠다.
"번호 못 주겠으면, 학교 이름대라구요."
"아..저.. 새바다..초.."
"네? 뭘 받아요?"
"그게 아니고.. 후.. 새바다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하.
하지의 입에서 절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초딩? 고작 초딩이라니.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말라며 그럴싸한 설교를 하고 세탁비를 받아내기에 초딩은 좀 그랬다.
아니, 많이 그랬다.
"초등학생? 동생이 초등학생이라구요? 미치겠네, 진짜."
"진짜 죄송합니다. 대신 제 번호 적어 드리겠습니다. 꼭 연락 주시면 제가 동생 데리고 나와서 사과도 시키고 세탁비도 꼭 드리겠습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하.. 초딩이라니."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하지가 끈적이는 손을 힘겹게 들어 훠이, 훠이 내저었다.
자신을 내쫓던 원장의 심정도 이것이었을까?
분노로 이글거리는 마음은 어디 한 곳 둘 데 없이 허탈했고, 또 분풀이를 할 수 없어 참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조심 시켰어야 하는 건데.."
"됐어요.. 그 쪽 번호나 적어 놓고 갈 길 가세요."
입으로는 연신 사과를 하며 하지가 대충 닦아 바닥에 던져 버린 휴지 조각들을 줍느라 한창이던 도연이, 화가 수그러진 듯 한 하지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정복 자켓의 안주머니를 뒤적여 종이와 펜을 꺼내 황급히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내려갔다.
자랑스런 해군 정복을 차려 입고 시민의 통행을 방해하다 못해 큰 피해까지 끼쳤으니 영 마음이 편치 않던 차였다.
가만히 있어도 도도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부는 아가씨가 날카롭게 화를 내니 도연의 등줄기에선 땀이 줄줄 흘렀다.
정복만 안 입었어도 이 정도로 당황하진 않았을 텐데.
"진짜 죄송합니다. 여기 제 번호입니다. 꼭 연락주시면 제가 동생 데리고 나와서 사과도 시키고 세탁비도 꼭 드리겠습니다."
"알았다구요. 이만 가 보세요."
도연이 건네는 쪽지를 받아든 하지가 다시 한번 손을 힘겹게 들어 훠이, 훠이 내젓자 도연이 꾸벅 인사를 하곤 뒤돌아섰다.
"허우대 멀쩡해서는.. 쯧쯧."
키도 크고 멀쩡한 남자가 동생 하나 잘못둬서 고생하는구만.
멀어져 가는 도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깐 경황이 없어 뭘 입었는지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 갖춰진 유니폼을 입은 뒷 모습이 제법 듬직했다. 유니폼이 듬직한 건지 태평양만큼 떡 벌어진 그의 어깨와 등판이 듬직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이 유니폼 입는 직종끼리 좀 봐줄 걸 그랬나. "
잠시 후회를 해보다가 푸하하, 실소가 터졌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원장한테 욕 먹어, 해고당하는 건 시간문제에, 비 맞은 생쥐꼴을 하고 지하철역에 오두카니 남아버린 자신도 있는데.
여전히 찐득찐득한 하지의 모습에 지하철역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꾸 모아지고 있었다.
.
.
.
쩍,쩍, 쩍, 쩍, 쩍
끈적한 소리를 울려대며 걸어가는 하지의 눈이 매서웠다.
가능하다면 압구정동 전체를 이잡듯 뒤질 생각이었다.
"그 새끼 말만 믿고 순순히 보내주는 게 아니었어!!!"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득 불길해진 하지가 시험삼아 핸드폰 번호를 눌러본 건 그 남자가 떠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
........!!!!!!
이 미친!!!!!!!
제 귀를 의심할만 한 황당한 멘트에 기가 막힌 하지가 비슷한 번호 언저리를 찾아 수도 없이 눌러댔지만 소용 없었다.
친 거였다. 그 새끼가, 사기를.
까다롭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박하지가 당한 거였다, 어이없는 사기를.
그 자리에서 번호가 맞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 새끼를 돌려 보낸 건 하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침부터 진상 고객한테 털려, 원장한테 털려, 이 화창한 날 콜라 날벼락까지.
"진짜 이 사기꾼 새끼를!!!"
약이 오를대로 오른 하지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뽐뽐대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끈적하게 내려 앉은 콜라물엔 대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소복히 앉아 하지의 얼굴 곳곳 꼬질꼬질한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일진이 드럽게 안좋더라니!"
진상 고객을 둘이나 만났을 때 조심했어야 했다.
하. 이 새끼를 만나기만 하면 고객들의 귀여운 진상 한 번쯤은 곱게 눈감고 넘어가리라.
그러니 제발 만나게 해주세요.
수능때도 이토록 간절히 기도를 해 본 일이 없었다.
지금 하지의 월급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고, 고로 한 푼도 갚지 않은 할부값은 고스란히 빚이 되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만나야 했다.
만나서 몇 푼이라도 받아내야 했다.
하지의 눈빛이 간절함과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쩍,쩍.
지하철역 바닥을 딛는 하지의 신발이 닿는 곳마다 끈끈한 소리가 묻어나왔다.
지난 달에 월급 타 벼르고 벼르다 해외 직구까지 해 온 운동화였다.
거기다가 이 옷. 콜라비를 맞아 거뭇거뭇한 얼룩이 세로로 물들어 있는 이 옷 역시 하지가 아끼고 아끼는,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드는 옷이었다.
아 짜증나!
생각할 수록 짜증이 난 하지가 끈끈함을 못이겨 서로 뒤엉겨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다 말고 화들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내 카디건!!!!!!!!!!!!!!!
그건 하지의 옷장을 통틀어 가장 비싼 옷이었다.
입어도 예쁘고 팔에 들고만 있어도 예쁘고 어깨에 그냥 툭 걸쳐만 놓아도 예쁘다며 매장 직원이 침이 마르게 칭찬해 마지 않던 옷이었다.
한 철 잠깐 입을 카디건 쪼가리를 그 비싼 돈을 주고 샀냐고, 엄마가 알면 등짝을 열두 번도 더 맞았을 옷이었다.
아직 할부도 여섯 달이나 남았는데, 이번 달에 육개월 무이자 할부로 사고 아직 단 한 번의 할부값도 갚지 않은, 오늘 딱 두 번째 입고 나온 그 옷에..
..덕지 덕지 콜라 자국이 만연했다.
머리로 쏟아지는 콜라를 카디건을 들고 있는 팔로 무의식적으로 막은 게 제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반은 하지의 머리위로, 반은 카디건 위로 쏟아진 콜라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장렬히 전사했지만 죽어서도 가죽을 남긴다는 호랑이처럼 그 흔적은 짙었고, 또 매서웠다.
"하..씨발.."
하지의 입에서 또다시 거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같이 유니폼입는 처지고 나발이고 세탁비를 톡톡히, 아니, 목욕비에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청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당장이라도 붙잡아다 있는 욕 없는 욕 모조리 해대고 똑같이 콜라를 부어 주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똑같이 콜라를 부어주기는 커녕 세탁비 한 푼 받아낼 수 없게 된 지금, 하지는 열 받아 미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