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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행복한 엔딩을
작가 : 네로
작품등록일 : 2016.9.11

숲속의 저택, 혹은 호텔. 그곳의 4명의 직원들과 정체모를 주인. 저택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사고들. 그 끝에 있는건, 언제나의 해피엔딩.

당신이 꿈꾸는 엔딩은, 무엇인가요?

 
ep 1. OO를 위하여 (2)
작성일 : 16-09-20 03:19     조회 : 272     추천 : 0     분량 : 7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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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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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빠! 놀자!"

 

 "어, 어..? 오빠가 지금은 좀 바빠서..."

 

 난 살풋 웃으며 보고 있는 꽃에서 눈을 떼었다. 화사한 꽃들 사이로 인영의 그림자가 진다. 뒤를 돌아보니 마치 그림책의 삽화같은 자태로 보랏빛 소녀는 서 있었다. 테나는 따스한 햇살이 싫은지 평소 들고 다니던 우산을 펴 양산 대용을 하며, 질문이 가득한 얼굴로 내가 보고 있던 곳을 갸웃거렸다.

 

 불편한 아침을 마친 후 운동이라도 할겸 잠깐 밖으로 나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야외에 위치한 식목 건물. 단순히 방안에서 책만 읽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바깥은 폭풍우로 가득해서 마땅히 돌아다닐 곳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던 중, 유리로 바깥 침입을 막은 넓은 정원이 있다길래 직원을 따라 이곳으로 나왔다.

 

 이름은 레인 가든. 절로 황제를 떠오르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유례는 없고, 단순히 이 호텔 주인이 비를 좋아해서 붙였다고 직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소년은 신비한 에메랄드를 옅게 접으며, 점심은 손님 취향에 따라 맞춰주겠다 대답한 후 먼저 정원을 나갔다. 그 후이 당돌한 귀족소녀가 나타나기 전까진 완전히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투명한 유리벽을 따라 작은 무지개빛 결정이 우두둑 떨어진다. 이따금 위협적인 천둥 소리도 동반했다. 강한 선율이 고막을 채워 혼란을 고한다. 테나는 보랏빛 잔상을 띄며 날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소녀가 옆으로 팔을 뻗어 살랑이는 꽃잎을 차례차례 건드린다. 소녀는 주인 허락없이 빨간 꽃을 똑, 끊어냈다. 종류는 장미.

 

 두꺼운 유리벽에 틈은 없었지만, 아침 이슬에 잎 끝이 물방울에 젖어 있었다. 테나는 감상에 젖은 얼굴로 꽃을 피부에 갖다 대었다. 촉촉한 물기가 살결을 따라 흐른다. 이게 뭔 짓인가, 잠시 회의감이 들었다.

 

 "...오빠, 장미 좋아해?"

 

 아니, 좋아하고 뭐고. 일단 나 바쁘다니까.

 

 속으로 중얼이며 살며시 입 끝을 당겨 올렸다. 어색한 표정으로 귀족소녀를 마주했다. 퉁명스럽게 말을 끊고 싶었다. 조금전의 혼자가 그리웠다. 나 자신만의 숨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대상은 귀족.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작위였다. 거스르면 안된다 스스로

 를 타일렀다.

 

 "좋아, 해요. 아가씨는요? 좋아 하시나요?"

 

 "응. 좋아해."

 

 섬세한 설탕공예처럼. 유리같은 목소리로 테나가 말했다. 그리고 꽃잎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받침과 맞닿았던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잎사귀에 작은 손톱 자국이 박혔다. 장미가, 시든다. 사정없이 잎을 뜯어낸 테나는 앙상히 가지만 남은 꽃을 조심스레 벽에 꽂았다. 난 여전히 웃었다. 뭘까, 저건. 보기와 다르게 호전적이군.

 

 "그런데 피어스는 싫어해."

 

 ".....피어스.. 요?"

 

 "아. 아직 이름 못 들었어? 사교성 없는 오빠구나."

 

 곧장 내리꽂는 말들. 난 속없이 '하하'라고 받아쳤다. 내 의욕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대답에 테나는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

 

 "......"

 

 "......"

 

 왠지 모를 어색함이 감도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 피어스가 누군데. 웨이터 이름인가? 귀족이 웨이터 따위(?)의 이름을 외우고 다닌다고? 테나는 꽃들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곧장 나를 향해 걸어왔다. 비와 대조되는 맨바닥 위로 딱딱한 굽소리가 들렸다.

 

 "왜, 그. 있잖아. 눈이 아름다운 오빠."

 

 "눈이 아름다운..? 아. 그, 웨이터. 말하는 겁니까?"

 

 어.. 맞았네? 확실히 웨이터의 눈은 아름다웠다. 아, 이젠 피어스라고 불러야 되려나. 피어스의 눈은 마치 에메랄드의 원석을 파내 눈에 옮긴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여성이었다면 내가 처음으로 '예쁘다'라며 입밖으로 냈을지도 모른다.

 

 "응. 뭐. 웨이터지. 나한텐 좋은 오빠지만.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해."

 

 "......노, 놀리는 건가요.."

 

 "괜찮아, 괜찮아. 오빠도 나한테 같이 대하거든. 귀족이라고 꼬박꼬박 존대는 하는데, 그렇게 무서워하지는 않는 느낌이랄까. 아, 그래도 존대하는 건 역시 싫어."

 

 그녀가 아쉽다는 듯, 눈꼬리를 밑으로 내렸다. 난 바로 어젯밤에 테나가 피어스에 대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분명 존대해서 불편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그때 평가가 달라지는 것 같다. 이렇게 변덕스러운 타입은 이야기하기 힘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찮다.

 

 "음.. 그런데 아가씨는 왜 이곳에 오신 건가요?"

 

 "그야 당연히, 오빠가 여기에 있어서?"

 

 "전 일개 농사꾼인데.. 별로 테나 아가씨께서 즐거워할만한 일은 없을 거에요."

 

 그리고 나 산책 좀 하자, 귀족 아가씨. 난 살짝 팔을 굽혀 거절표시 비슷한 포즈를 취했고, 테나는 어쩐 이유에선지 우산을 펴 히끄무리한 날씨에 심령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콰릉, 시끄러운 천둥이 한차례 구름을 치고 지나간다. 난 조금전까지 내가 혼자였던 시간을 다시금 회상하며 대체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를 타파할지 고민했다.

 

 이 시끄러운 귀족소녀는 날 어디까지 신뢰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내게서 정이 떨어지고, 어떻게 해야 내 목숨 하나쯤은 유지할 수 있을까.

 

 우습게도. 고민 중에 느낀 건, 전율이었다. 발끝부터 시작해 몸 전체에 전기가 퍼지는 것 같다. 지긋지긋 할정도로 짜증나는 본능이 위험하다 내게 경고했다. 날 감시하는 눈길이 있다. 소름끼치는 암기가 이곳 어딘가에 있었다. 억지로 지어낸 미소에 한차례 파문이 인다.

 

 그 와중에 테나는 말없이 날 향해 미소 지었다. 우산 밑에 짙은 그림자가 끼어 소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뭐야, 그거. 이상하다고. 얼굴을 찡그렸으면 했다. 장갑 낀 손을 다시 한 번 더 정돈한 후 테나가 있는 자리로 조심스레 다가가, 조금 전 꺾인 장미 줄기를 꺼냈다. 끊긴 줄기의 양 끝에 찐득한 진물이 묻어났다.

 

 등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반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잡고 있던 줄기를, 뒤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짧은 공허 끝에, 바람 흐르는 소리가 난다.

 

 

 '팍'

 

 

 ..흐음, 명중인가.

 

 혀로 입술을 옅게 핥았다. 본능의 위험신호도 가셨고, 온통 긴장 상태였던 근육이 천천히 풀어졌다. 땀이 옷에 스며들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대충 테나 모르게 땀만 뽑아내 풀밭에 던졌다. 축축하던 옷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수축된 이성이 다시금 본상태를 되찾았다. 다른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이곳은 내가 찾는 곳이 맞다는 것.

 

 "..음..? 뭐야?"

 

 우산 밑에 본심을 숨긴 테나가 살며시 입술을 드러냈다. 소리가 난 쪽으로 잠깐 시선을 향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다시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눈의 도달점을 본 난, 재빨리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뭐야, 뭔데. 자연적인 방어본능으로 양 팔을 엑스(X) 자로 한 채 가슴에 갖다 댔다.

 

 테나의 바로 옆에 줄기가 꽂혀있던 터라 나와 소녀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지만, 난데없이 성인남성과 마주하게 된 테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내 쇄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입술을 살짝 핥았다. 깨끗한 양복 사이로 드러난 피부가 갑자기 어린 소녀에게 보여진 기분은 절대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거, 귀족을 제외하더라도 정상적인 10대 소녀가 보일만한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집에 돌아가면 나중에 혼날지도.

 

 조금 안전해졌다 싶어 팔을 내리자 테나는 싱긋 그 나잇대의 미소를 지어 내게 질문했다.

 

 "잘못 들었나 봐! 오빠는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아니요, 딱히. 못 들었습니다."

 

 아마도.

 

 "아무래도 오빤 나중에 병원에 들려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 사교성도 안 좋고 청각도 이상하고. 그러다 나중에 쓰러진다고? 그런데 손에 들고 있던 줄기는 어떻게 한 거야? 아까 빼가던데."

 

 보기 흉하니 대충 다른 데다 던져 두었다는 변명을 하며 칭찬을 하던지 욕을 하던지 둘 중 하나만 하면 좋겠다는 내 바램이 닿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기원했다.

 

 

 ---

 

 

 난 이상한 취향을 가진 듯한 테나에게서 다행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상한 귀족소녀- 내 안의 귀족이 점점 하향화 되고 있다. -는 정원을 더 구경하겠다며 날 내버려 두었고, 난 그대로 내 방으로 향해 이중잠금으로 문을 닫았다. 조금 전 정원에서의 일도 있어 딱히 안심되지는 않았지만. 심지어 방에서는 할 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 집보단 넓은 호텔의 방에서 점심 시간이 올 때까지 이 지루함을 이겨내는 것 뿐이었다.

 

 이곳에 도착해 방을 신청할 때 이 곳에서 가장 평범한 방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방 4개와 침실 하나, 화장실 2개, 테라스 1개가 딸린 매우 기이한 살림살이가 같이 딸려 들어왔다. 어쩌면 이곳에서 주인 외의 다른 사람이 산다 해도 못 알아챌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침실과 나머지의 인테리어와 가구들 하나하나가 장인의 손길이 묻은 흔적이 있어 잘못 건드리면 부서질까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내가 이곳, 404호에 도착했을 당시 제일 처음 한 생각은 '와, 잘못 건드렸다간 망하겠다.'였다. 비싼 물건과 옷들이 가득한데 어쩌면 사람의 목숨값보다 더 비싸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정말 대단한 장인이 만든 것은 노예 몇 백명을 들여도 사지 못할만큼 귀하니까.

 

 호실을 열어 방에 들어오기만 하여도 바로 옆에 돈냄새를 풍기는 도자기 병이 하나 있었으니까. 테나를 피해서 방에 돌아오자마자 반짝대는 보석 때문에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콰릉. 번쩍. 투명한 빗물이 방울방울 흐르는 유리 너머 시끄러운 광경이 또다시 울렸다. 벌써 네 번째다.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게 주어진 공간은 많았고, 난 그 공간들을 꽤 잘 활용하였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다만, 아무리 넓어도 어차피 하나의 호텔에 불과하단 걸 깨닫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단 것.

 

 이제 테라스와 침실의 풍경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폭풍우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분이 우울해져 잠시 한숨 쉬었다. 열쇠와 잠금쇠로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문을 흘깃 바라보고, 4개의 방 중 책이 잔뜩 꽂혀 있던 곳으로 들어갔다.

 

 "오, 꽤 많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3개 벽 전부 책꽂이가 세워졌다. 심지어 1층부터 4층까지 빼곡히 책이 들어서 있다. 수많은 표지들이 즐거워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벽 한 쪽을 채우는 게 전부 책인만큼 종류는 다양했다. 마법 실행 관련 책, 마나가 발견됬을 때부터의 역사를 다룬 기록서, 제국의 여행지를 다룬 기행문.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실린 로맨스 소설. 심지어 상당히 옛날에 발간 되었던 신문이나 잡지도 있었다. 그중 '한 권으로 정리된 제국의 역사'를 집어 침실로 향했다.

 

 "....하아..."

 

 빗소리로 코트가 젖은 것 같다. 책을 들고 향하는 발이 무거웠다. 침실 입구 옆에 배치된 옷걸이에 코트 카라 부분을 가볍게 고정시키고 찬찬히 문고리를 돌렸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자 커다란 침대와 침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침실엔 작은 화장실도 함께 있어 목욕하고 바로 침대로 직행이 가능했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 중 하나다.

 

 침실과 테라스는 일방통행이라 곤충들의 구애소리나 나뭇잎과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이 소리들을 듣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선 그저 시끄럽기만 했다.

 

 닫힌 문 위로 커튼을 내렸다. 거대한 새의 날개처럼 순식간에 천들이 팔락인다. 커다란 창문을 덮는 건, 늪 처럼 기분나쁜 짙은 녹색이었다.

 

 

 ---

 

 

 '......는 반역을 일으켰다. 제일 처음에 제압당한 이들은 왕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황궁십자단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제압 당한 것이 아닌, 이미 그 전부터 황제의 정치에 관해 의문을 품었던 자들로..'

 

 "...씨!"

 

 '...는 순식간에 왕궁 중앙 홀까지 파고 들었다.'

 

 "....ㄹ 씨!!"

 

 '이 때 떨어진 왕의 머리는 현재 불에 타 재가 되어 사라졌으며...'

 

 "폴 씨!! 폴 씨!!"

 

 "....?"

 

 난 콧등의 안경을 살짝 밑으로 내렸다. 책등에 놓인 노란색 띠줄을 책장 사이에 끼고, 다시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이고 투박한 소리와 함께, 익숙하면서 어색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박한 소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이고.. 또 하나는.

 

 "...폴 씨!!"

 

 "아, 피어스인가."

 

 근데 왜 이름을 부르는거지. ...뭐 딱히 상관 없지만.

 

 안경을 벗어 옆에다 둔 후 재빨리 앞머리를 정돈했다. 괜히 이것때문에 들킨다면 곤란했다. 무엇보다 이런 시덥잖은 이유로 걸렸다면 정말 집에 돌아가자마자 실시간으로 죽는 경험을 만긱할 것이 분명. 그것만은 싫었다.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침실이 상당히 끝에 있어 입구에 도착하는데 10초나 걸렸다.

 

 세차게 흔들리는 문은 조금더 늦게 열었다간 부서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여기 웨이터, 무섭구나..

 

 잠금쇠를 풀자 문 흔들림이 더 강해졌다. 나아진건 철 닿는 소리가 사라진 것 뿐이었다. 열쇠를 문고리에 꽂아 돌리자 그제야 모든 소음이 사라졌지만 입구에 서있는 피어스의 표정은 마치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악마가 모든 것을 걸고 평온하게 서 있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왜 이렇게 늦게 여신 거죠? 손님?"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

 

 "아... 그, 죄송.. 합니다. 책을 읽다가.."

 

 "책이요? 무슨 책을 말하시는 건지?"

 

 "방에.. 있는 책. 있잖아요. 책만으로 가득 채운.."

 

 피어스는 헷갈리는 듯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더니,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장갑 낀 손은 겉으로 보기에도 무척 날렵했다. 저 손가락은, 무엇을 잡고. 무엇을 이용하고. 무엇을 가지고 있었을까. 음, 남자의 손에 흥미는 딱히 없지만.

 

 ".......아. 그 방 말씀하시는 건가요. 책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필요하신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새 책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충분해요. 그런데 무슨 이유로.. 오신건지..?"

 

 인형처럼 아름다운 눈이 서서히 내려간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껌벅였다. 이리저리 얽힌 색깔이 어지럽다. 매혹적인 눈동자다. 아름다운 인형의 입술이 잠깐 붙었다 떼어졌다.

 

 "....저흰 분명 손님 취향에 맞춰 준비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을텐데요."

 

 "아, 네. 그렇죠. 그렇긴 한데..."

 

 신랄하게 대꾸하는 피어스의 말에 난 그저 얼굴을 묻었다. 확실히, 아까 피어스는 '내 취향에 맞게' 음식을 준비해줄 것이라 대답했다. 그때는 그냥 내 취향을 알고 있으려니, 어림짐작 한거지만. 지금은 이럴거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이미 내 취향을 다 파악해서 그렇게 말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멍하니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던 찰나 손에 있는 노트가 문득 눈에 띄었다. 의문도 잠깐, 소년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한장한장 노트를 뒤로 넘겼다. 그러더니 장갑 낀 손을 버릇처럼 핥으며, 그 손으로 펜을 꺼내 말없이 날 응시한다. 서로를 바라보길 한참. 먼저 말을 꺼낸 건 피어스였다.

 

 "....새우 요리, 괜찮습니까?"

 

 "네? 아. 네."

 

 "간은 어떤 걸로요? 매콤하게? 싱겁게?"

 

 "굳이 말하자면... 싱거운 것?"

 

 "디저트는 푸딩 어떠신가요?"

 

 "네... 어. 네."

 

 "오렌지 푸딩입니다. 맘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따, 딱히 상관 없어요."

 

 "음료는 20분 후 요리가 완성되었을 때 묻겠습니다. 그동안 휴식을 좀 더 취하시면 좋겠네요."

 

 뭐, 뭐지. 방금 뭔가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은데. 혼란스럽군.

 

 피어스가 재빠르게 무언갈 노트에 써내려가며 절도있는 동작으로 뒤돌아 복도를 걸어갔다. 문을 닫기 전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그를 쳐다보니,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살짝 허리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노트를 이마에 갖다 대 몇 초 뒤 떼는 것으로 인사 비슷한 걸 하고 제갈길 간다.

 

 문을 닫고 열쇠로 잠근 뒤도 한참 생각해야 했다.

 

 ....결국 뭐였던 거지, 아까 정원해서 말했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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