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그들은 상인들이 끌고 나온 다양한 노점상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남은 오후 시간을 흘려보냈다. 사과에 설탕을 입힌 과일 사탕, 꿀을 바른 빵, 크림과 잼을 바른 와플, 과일즙을 넣은 음료수 같은 것들을 보면 자꾸만 안나에게 먹이려 하는 탓에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녁은 어떻게 할 거야?”
안나에게 기어이 와플 하나를 물려준 안젤라가 프란츠를 돌아보며 물었다.
“글쎄. 역 근처에 가서 먹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미간을 좁히고 잠잠히 고민하던 프란츠는 돌연 안나를 바라보았다. 막 와플을 한 입 크게 베어 물던 안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안나, 혹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습니까?”
“어, 음, 글쎄요. 저는 딱히…….”
안나가 난감한 낯으로 답했다.
무엇이 맛있는지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계속 주전부리가 들어간 탓에 배가 그리 고프지 않기도 했다.
“파스타는 어때요?”
“저는 다 괜찮아요.”
안젤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입을 비죽 내밀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녀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역 근처에 제가 아는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죠.”
우선은 역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마차를 잡아타고, 둘씩 나눠 마차에 올라타는 그들의 발치를 오렌지색 노을이 잔잔히 적셨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그락 달그락 달리는 마차를 타고 있자니 축제 행렬에서 왕족 분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적당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이.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안나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흐트러트리곤 쏜살같이 도망갔다.
눈을 내리깔고 물끄러미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안나는 도착했다는 말이 들리고서야 시선을 들어올렸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조명이 은은하게 켜진 작은 식당 앞이었다.
외양부터 고요하고 느긋해 보이는 식당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안나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선반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어디선가 틀어놓은 음악이 가게 안을 잔잔히 울리고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다른 이들을 따라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크림 파스타. 안나는요?”
“음, 저는 빠네파스타요.”
메뉴판을 심오하게 바라보던 안나는 결국 나름 익숙한 메뉴를 골랐다.
이어 프란츠와 알렌까지 메뉴를 정하고, 잠시 기다리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무섭게 입을 꾹 다물었다.
고소한 향이 공기 중에 흐릿하게 퍼졌다. 토마토 스파게티의 새콤달콤한 향도 짙게 깔리듯 퍼져나갔다. 코를 발름거리던 안나가 면을 돌돌 말아 입에 쏙 집어넣었다. 크림소스는 고소하고 부드러웠지만, 느끼하지는 않았다. 치즈인가? 면을 우물우물 씹던 안나가 곰곰이 생각했다. 치즈 특유의 고소한 맛도 느껴지는 것 같은데…….
면도 너무 익히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푹 퍼진 면과 크림소스가 만나면 쉽게 물릴 수도 있는데, 면이며 소스며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덕분에 크림파스타임에도 남김없이 먹어치울 수 있었다.
행복한 얼굴로 파스타를 먹어치우는 안나를 바라보던 안젤라가 미소 지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너무 느끼하지 않아서 좋아요.”
빵을 조금 찢어 오물거린 안나는 함께 시켰던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하고 시원한 음료수가 옅게 남아 있던 크림 맛을 지워주었다.
“이제 슬슬 행렬이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창밖으로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던 프란츠가 중얼거렸다.
때맞춰 시끌시끌하던 역 앞이 더욱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음식 값을 계산하고, 가게를 나오며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에서 가면을 꺼낸 안젤라가 머리 뒤로 끈을 묶어 가면을 고정시켰다. 안나도 넣어두었던 가면을 꺼내 눈가를 가렸다.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고 나자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딱딱한 무언가가 눈가를 누르고 있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아, 도착했나 봐요.”
근처에서 들려오는 익살스러운 목소리에 안나의 곁에 서있던 안젤라가 속닥거렸다.
흰 가면을 쓴 한 남자가 등 뒤로 줄줄이 들어오는 행렬의 선두에 서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좌우로 갈라선 인파를 헤치고 걸어온 남자는 등에 커다란 바구니를 메고 있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끼어서면 돼요.”
안나의 손을 꼭 붙잡은 안젤라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하며 행렬의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 누구도 그들을 핀잔하지 않았다. 오랜 동료를 맞이하듯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하고, 그들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아까 있었던 광장 기억나죠? 이제 거기까지 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걸어가며 다른 시민들이 건네주는 간식이며 음료수 같은 것들을 먹고 마시기도 했다.
다리가 아플 텐데도 누구 하나 투덜거리는 사람 없이 경쾌한 분위기만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안나는 얼떨결에 누군가 건네주는 화관을 받아들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한데 엮인 풀꽃들은 여전히 싱그러워보였다.
감사의 의미를 담아 웃어 보인 안나는 안젤라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서 화관을 머리 위에 얹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정말로요.”
생그레 웃은 안젤라가 손을 뻗어 화관을 정돈해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금씩 흥이 나는 것 같아서 작게 어깨도 들썩거렸다.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기이한 행렬은 어쩐지 중간에 소리를 질러도 화답해줄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을 북돋아주었다.
한 사람이 건네준 초콜릿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안나는 이내 저 앞에서부터 남자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썩은 사과의 심판을 내리러 왔다!”
남자의 익살스러운 목소리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광장 근처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을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지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깨닫고 나자 저 앞 우뚝 솟은 로겐 브로트가 보였다. 깨닫기 전에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성이었다.
작게 보이는 남자가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바구니를 쿵 내려놓았다.
앞쪽에 서있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바구니 속으로 손을 뻗었다. 의아한 얼굴로 그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던 안나는, 행렬을 마주하고 있는 길쭉한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흠칫 떨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조잡한 나무 관을 쓴 커다란 인형이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며 서있었다.
“그 옛날의 심술궂던 영주를 나타내는 거예요. 사람에게 사과를 던질 수는 없으니까요.”
바구니 속에 무엇이 들었나 했더니, 썩은 사과가 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나가 안젤라의 설명에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사과의 심판을 받아라!”
“와아아아아!”
남자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과를 손에 든 사람들이 무서운 기세로 인형을 향해 사과를 던지기 시작했다. 인형을 향해 매섭게 날아간 수많은 사과들이 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맥없이 휘청거리던 인형은 마침내 반으로 꺾여 풀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크게 터져 나왔다. 정말로 못된 영주를 물리치기라도 한 것 마냥, 신나게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은 하늘 위를 곱게 수놓는 불꽃들을 보고서 환호하며 박수쳤다.
안나는, 그 순간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어른거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둥글게 모여 하늘을 향해 불꽃을 쏘아 올리던 마법사들이 탈진할 것 같은 얼굴로 비틀거리며 광장을 벗어나고, 삼삼오오 모인 시민들이 제각각 집이며 술집으로 몰려가는 그 순간에도.
공기의 흐름, 소리의 파편, 아른거리는 불꽃의 색, 코를 파고드는 향신료의 향 같은 것들은 착실하게 기억의 일부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