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당신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읽다가, 문득 저도 그것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말이 옳아요. 왜 항상 그들은 결혼과 출산으로 행복을 증명하려 하는 것일까요. 무엇이든 그들이 원하던 것들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많이 생각해 볼 거리인 것 같습니다. 당신께 많이 배우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안나.
지금쯤이면 책을 다 읽으셨겠군요. 그 책의 결말 역시 결혼으로 맺어집니다만, 당신께서 다른 결말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가령, 줄리아가 모험가의 꿈을 이룬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분명 당신께서 생각하시기에 보다 만족스러운 결말이 될 겁니다.
어느덧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왔군요. 프란츠의 연주와 안젤라의 노래는 퍽 잘 어울리는 편이죠. 이번에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연습하는 것 같더군요. 부디 당신께서 즐거이 감상하셨으면 합니다.)]
[(안녕하세요, 스테판!
상상력이 풍부한 편은 아니라서…….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당신의 말대로 줄리아가 모험가의 꿈을 이루는 모습은 일하면서도 이따금 떠올리곤 했어요. 모험가는 그녀의 오랜 꿈이었으니까요. 만약에 줄리아가 꿈을 이뤘다면 그녀는 무엇부터 했을지, 어디로 갔을지, 무엇을 하고 살았을지, 그런 것들을 가만히 떠올리다가 정리하던 책을 떨어트릴 뻔 하기도 했었어요.
꽤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끝이 난 이야기의 후일담이나, 다른 결말을 상상하는 것들이요. 앞으로도 종종 책을 읽고 난 뒤면 짧더라도 꼭 한 번 씩 후일담을 상상하게 될 것 같아요.
어제 공연을 보고 왔어요!
다른 내용을 먼저 적으면서 흥분을 조금 가라앉혀보려고 했는데, 공연을 보고난 뒤의 후기를 적으려고 하니 또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공연은 역시 좋았어요!
공연장 안에 불이 다 꺼져 있었는데 문득 피아노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이었는데도 말이에요. 꼭 불이 켜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었어요. 개울가에 서있는 것처럼 유려한 연주였어요.
연주를 들으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데, 어느 순간 그 위로 안젤라의 목소리가 겹쳐졌어요.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요. 그리고 갑자기 무대 위에 불이 들어오고, 새카만 드레스를 입은 안젤라가 약간은 눈이 부신 듯 눈매를 좁히면서도 웃음처럼 눈꼬리를 늘어뜨렸어요.
꼭, 여왕 같았어요.
사람들의 입이 다물리고 오로지 프란츠의 피아노 소리와 안젤라의 노랫소리만이 울렸죠. 당신께서 '기존과는 다른 연습'을 했다고 하셨죠. 문득 그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단박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어요. 무언가…… 더 풍부해진 것 같았어요. 어둠 속에서 연주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아마 전 세계를 다 뒤져봐도 이런 식으로 연습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최고의 공연이었어요.
다시 한 번, 표를 보내줘서 고마워요, 스테판.
그리고 저 프란츠와 만났어요! 공연을 본 다음날에요!!
악! 다시 생각하니까 또 두근거리네요!!!
이번에는 레아와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도 그 때 이후로는 종종 편지를 주고받고 있고, 그래서 딱히 섭섭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그 애가 좋아하는 쿠키를 보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당신과 레아에게 줄 쿠키를 사기 위해 파네토네에 가서 쿠키를 세 박스 사고, 간 김에 당근 케이크 한 조각과 라떼를 시킨 뒤 기다리고 있는데 프란츠가! 파네토네로! 들어온 거예요!
하지만 그가 저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가 제 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앉아만 있었는데, 그가 무언가를 주문하곤 빈자리를 찾는 모양으로 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어요.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났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고요.
그는 저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하기는, 피아노 악보도 그렇게 잘 외우니까 같이 앉아서 디저트를 먹었던 사람의 얼굴 정도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아니, 그래도 너무 행복한데!
아무튼 그래서 저를 향해 다가오곤, 정중하게 앞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묻곤 제게…… 웃어주었어요……. 저는 그날 주문했던 당근 케이크는 입에 대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뜰 뻔 했어요.
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나 봐요. 그가 조금쯤 난감하다는 얼굴로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변명처럼 말하더라고요. 저는, 그런데, 저는, 아! 갑자기 완전 뜬급 없이 연주 멋있었다는 말을 건넸어요! 아! 그걸 갑자기 거기서! 왜!! 그냥 괜찮다는 말만 하면 될 걸!
제 바보 같은 반응에 그가 웃었어요……. 그 때 저는 정말로 당근 케이크를 버리고 집으로 뛰어서 도망갈 용의가 있었고……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죠?'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물론 괜찮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어요. 더 바보 같은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건 정말, 정말, 정말, 사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자, 그가 매끄럽게 질문하더라고요. 어제 공연은 어땠느냐고요. 저는 그냥 솔직하게 말했어요. 최대한 흥분한 걸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프란츠는 제 대답을 듣고 퍽 만족스럽게 웃었어요.
그리고, 저를 이곳에서 만날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에 '……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제가 맞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가 금세 다른 말을 꺼내서 묻기에도 애매해졌거든요.
그런 뒤에 그간 잘 지냈느냐고 묻고, 어쩐 일인지 묻고, 그냥 그런 평범한 대화들을 나눴어요. 그는 자신의 친구가 누군가에게 받은 쿠키를 나눠줘서 이곳의 쿠키를 처음 먹어봤고, 계속 생각나서 한 박스 사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쿠키를 제가 사준 것 같다는 말은 하려다가 꾹 참았어요. 괜히 생색내는 것 같아서요.
음……. 사실 세 박스를 산 건 당신 것 하나, 레아의 것 하나,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는 안젤라의 것 하나였는데……. 프란츠는 왠지 단 걸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요.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나니까 좀 고민되더라고요. 한 박스 사는 게 더 좋겠지, 싶어서 결국 쿠키 상자는 네 개가 되었어요. 두 상자는 각각 프란츠와 안젤라에게 하나씩 나눠주세요. 한 박스는 당신이 먹고요.
아무튼, 그러고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주문했던 쿠키 한 상자가 나오는 바람이 대화가 끊겼어요. 그는 그가 지내던 곳으로 떠났어요.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남기고서요. 하지만 이 정도로도 너무 좋았는걸요! 그리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생각보다 그와 제가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의외의 면도 발견해서 조금 즐겁기도 했고요.
으음, 편지가 너무 길어졌네요. 다 적고 나니까 조금 민망한데……. 그래도 그냥 보낼래요. 프란츠에게 혹시 제가 실수한 점이 있다면 사과드린다고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쿠키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안녕하세요, 안나.
안 그래도 그가 제게 당신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쿠키 상자를 전해주니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해서, 이렇게 전해드립니다.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이더군요.
공연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어둠 속에서 피아노를 치며 시작하는 것은 어떠냐고 의견을 낼 때까지만 해도 잘 될 지 걱정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드린 것 같아 안심이 되네요. 그만큼 많이 연습한 프란츠와 안젤라의 공이 크겠지요.
저는 쉬는 동안 리온 오펜의 신작을 읽었습니다.
제목이, '두 갈래 길'이던가요. 자신이 가야할 길과 가고 싶은 길 중에 고민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잘 서술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복잡한 고민을 하던 당시의 기억이 저절로 떠오르며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더군요.
주인공 샐리처럼 고민할 일이 있다면, 부디 선택한 길이 당신께 행복이 되길 바란다던 작가의 말이 계속 떠오릅니다. 안나, 부디 당신께서도 고민할 일이 있다면 당신이 선택한 길이 무엇이든 당신에게 최고의 선택지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언젠가 읽어보셨으면 하는 작품입니다.
어느새 봄입니다. 당신께서 따뜻한 날들을 보내셨으면 좋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