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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유해화합물
작가 : llena
작품등록일 : 2018.12.4

이건 금기에 관한 이야기이자 약속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정의를 다르게 쓰는 네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2화. 더 약한 쪽.
작성일 : 18-12-10 22:22     조회 : 213     추천 : 0     분량 : 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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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싶은 마음과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 마음. 그 어디쯤에서 어찔어찔해진 선은 입술을 여는 대신 술을 들이키는 걸로 대신했다.

 

 흔들리는 평형감각에 정신이 들었을 땐 익숙한 시트러스향이 살랑거렸다. 이거보다 우디향이 더 잘 어울릴 텐데.

 

 “아현이는?”

 “택시 태워 보냈어.”

 

 술을 잘 마시는 아현과 달리 선은 잘 취하고 잘 깨는 타입에 가까웠다. 평소에는 분위기 맞추는 정도로만 잔을 들긴 하지만 오늘 같이 작정하고 마시면 쉽게 비틀거리고 만다.

 

 업어달라고 조르는 술버릇을 가진 선은 업히면 또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우주에게 매번 조심성 없다며 한바탕 혼이 났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화난 건가. 그러고 보니 마지막 대사가 뭐였더라. 지지직 끊긴 필름에 영상이 나올 때까지 되감아봤다. 유리에 있던 손을 떼게 만든 우주는 좀 부루퉁해보였다. 어떻게 해도 험악한 인상에 몇 안 되는 애 같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겠지만.

 

 ‘내가 멋있다고 말한 건 경고였거든. 반하지 말라고.’

 

 그러곤 나타난 아현이 술은 언제 먹느냐고 동동 거려서 넘어갔다. 우주가 잠시 형들에게 붙잡혀 간 사이 빠르게 술을 마시다 훅 취한 모양이다.

 

 바닥에 운동화가 닿도록 내려 준 우주는 별 말없이 몸을 돌렸다. 불만이 가득 느껴지는 등이다.

 

 “한우주.”

 

 발이 멈췄다.

 

 “제티 타줄까?”

 

 그제야 고갤 돌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선이 손을 내밀었다.

 

 “맛있게 해줄게.”

 

 평소처럼 맥없는 얼굴로 사탕을 흔드는 유괴범을 보는 우주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이씨.”

 

 제 앞머리를 헝클이곤 분노하듯 성큼성큼 걸어와 선을 덥석 끌어안았다.

 

 “너 존나 싫어.”

 “알아.”

 

 선은 고분고분한 목소리를 냈다. 우주는 그런 선에게 약했다.

 

 “내일 아침엔 망고 스무디 사 줘.”

 

 그리고 선은 그런 우주에게 약았다.

 

 우주가 몸에서 떼어낸 선의 양 볼을 큰 손으로 쥐어 눌렸다. 얄밉다는 듯, 그럼에도 연약하고 부드럽게.

 

 툴툴거리며 결국 손을 잡고 들어가는 우주의 등은 아까와는 달리 기분이 좋아 보인다. 얼굴보다 등에서 감정을 쉽게 알아차리는 건 이상한 일이다.

 

 식탁 의자에 앉아 손 하나 까딱이지 않은 선은 제가 알아서 우유를 꺼내 초코가루를 타 먹는 우주에게 물었다.

 

 “근데 너 어디 가려했어?”

 

 우주가 데려다 준 곳은 선의 집이 아니라 본인의 집이다. 레이블과 계약하면서 새로 얻은 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훨씬 쾌적한 환경과 안전한 위치를 갖췄다. 거실도 있고 방도 두 개나 있다.

 

 우주는 뭐- 하고 말꼬리를 늘이더니 컵을 만지작거렸다.

 

 “형들이 2차로 근처 술집 갔는데 거기 따라 가도 되고, 그냥 동네 좀 돌아봐도 되고, 아님 작업실이든. 갈 데는 많거든!”

 

 말하다가 욱하는 건 가슴 속에 불꽃이 많아서 그렇다. 그녀한테만 주로 그러지만.

 

 별 생각 없이 한 질문이기에 별 감흥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머쓱해졌는지 우주는 한 번에 원샷하고는 설거지를 했다.

 

 식탁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리를 올리고 반쯤 기울어진 시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우주를 깜빡, 깜빡 담았다. 점점 느려지는 눈꺼풀과 흐려지는 의식으로 꺼칠꺼칠한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안 씻을 거야?”

 “귀찮아.”

 “방에 가서 자.”

 “응.”

 

 그럼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다 한숨을 조금 쉬는가 싶더니 몸을 들어준다. 취하면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는 그녀를 잘 안다는 듯.

 

 진한 초코 냄새, 단단한 팔, 덮어지는 이불, 희미한 숨소리, 간지러운 시선, “나쁜 꿈꾸지 말고.” 악몽을 쫓아내듯 단호한 목소리. 어슴푸레 밀려드는 감각을 지우며 꿈속으로 달아났다.

 

 코끝으로 알람처럼 스며드는 냄새는 망고다. 눈을 겨우 뜨자 침대에 반쯤 걸터앉은 우주가 제 이마로 스무디를 내려놓았다. 차갑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직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아 미간을 찡그렸다.

 

 우주는 괴롭히는 게 즐거운 건지 못생긴 얼굴을 비웃는 건지 명확하지 않게 키득거렸다.

 

 “너무 안 일어나서 죽은 줄 알았어. 제사상에 올리려고 사 온 건데 귀신 되서 왔나 보네.”

 

 이불에 넣어 놓은 팔을 빼서 스무디를 잡으려고 했지만 우주가 더 빨랐다.

 

 “밥부터 먹고. 콩나물국도 끓였어.”

 “한 입만.”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빨대를 선의 입술에 물려줬다. 한 모금 쭉 빨아 당기는데 좀 들어오나 했더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우주가 빨대 가운데를 잡아 힘주고 있었다.

 

 “나가서 밥 먹자.”

 

 선은 미적미적 몸을 일으켜 식탁 앞에 앉았다. 계란말이와 콩나물국, 햄 몇 개와 멸치볶음. 식당 아들 아니랄까봐 음식 솜씨가 제법 좋다. 아무리 해도 제티도 제대로 못 타는 누구와는 달리.

 

 옷과 속옷 몇 벌을 챙겨 놓은 서랍장 까지 있을 정도로 선은 이 집에 자주 온다. 학교와도 가깝고 술집이 많은 거리와도 가깝고 심적으로도 안정이 된다.

 

 제가 먹는 모습을 확인하고서 수저를 드는 우주는 제 엄마쯤 되는 줄 안다. 매번 뭐 먹고 다니는지 묻고 제대로 안 먹는다고 혼내고.

 

 아니면 더 타당성이 있는 주장은.

 

 “나 개 같아?”

 

 갑자기 뭔 또 헛소리냐는 눈빛이다.

 

 “이상한 생각 말고 먹어.”

 

 선은 인정하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릇의 바닥이 드러나자 우주는 냉장고에서 스무디를 꺼내줬다. 의자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쪼록 쪼록 마시는 선을 보는 눈이 못 말리는 애라도 쳐다보는 눈이다. 역시 개인가.

 

 회색의 톤으로 맞춘 집은 소품 같은 건 많이 없어도 영화 <레옹>의 흑백 포스터나 앨범과 DVD로 나누어져 한 가득 꽂힌 벽을 보면 명확한 정체감을 드러낸다. 주로 무채색 옷을 입고 다니면서도 팔레트에 색이 넘치는 제 주인처럼.

 

 “작업실 갔다가 저녁엔 회사 형 생일이라 모일 거고.”

 

 한 살 어려서 저렇게 가능성이 넘치고 혈기가 왕성한 걸까 싶지만 일 년 전에도, 아니 십년 전에도 선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

 

 쏴아 쏟아지던 수도꼭지가 잠기고 손에 물기를 털어내며 우주가 몸을 돌렸다.

 

 “얼굴도 퉁퉁 부어가지고. 붕어.”

 

 우주는 종종 저를 붕어라고 부른다. 쉽게 붓는 얼굴에 머리도 좋지 못하고 씻으러 들어가면 한참 뒤에 나와서.

 

 사나운 눈매에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 좀 툴툴거리고 좀 삐뚤빼뚤 대고 놀리는 게 우주가 보이는 앞면이라면

 

 “너무 많이 먹음 배탈 나.”

 

 무얼 할지 매번 알려주고 사소한 말도 잊지 않고 제가 어디에 있든 데리러 오고 저를 챙겨주는 건 뒷면이다.

 

 “헤엄이나 좀 치고 와. 데려다 줄 테니까.”

 

 문득이지 이상하다.

 

 애정을 하염없이 쏟아 보이는 우주도, 손 놓기는 싫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연인도 아닌 이 관계가.

 

 

 
작가의 말
 

 사실 제가 초코 우유를 좋아합니다. 바나나 우유와 딸기 우유도 좋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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