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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왕비님의 알바일지
작가 : 박티티
작품등록일 : 2018.12.7

만년 배우 지망생 희우는 오늘도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낙담한다. 그러던 와중 왕비역을 구한다는 알바 공고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하는데, 뭐? 진짜 마왕이 왕비를 구하는 거였다고? 1년의 계약기간동안 마왕성에서 벌어지는 왕비님의 흔한 알바일지

 
#-이 정도 철판이면 1년 정도는 괜찮겠지요
작성일 : 18-12-10 22:11     조회 : 210     추천 : 0     분량 : 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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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떠 보니 아침이다. 희우는 눈 앞의 낯선 천장을 보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저게 뭐지? 원래대로라면 누런 물 샌 자국이 있는 자취방 벽지가 있어야하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얼룩진 벽지 대신 U자로 걸쳐진 하늘하늘한 천이 보인다. 희우는 잠이 덜 깬 얼굴로 한참동안 꿈뻑거리다가 잠꼬대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

 "뭐야... 꿈이잖아..."

 ​

 무슨 호텔도 아니고 내가 이런데에 와 있을리가 없지. 희우는 자신이 꿈 속이라는 것에 강한 확신을 가진 뒤 다시 잠을 청하려 한다. 그렇지만 그녀가 막 부드러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려고 할 때, 귓가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가 베일처럼 머리 위에 드리워진 잠을 슬쩍 걷어올린다.

 ​

 "왕비님?"

 "에...?"

 ​

 그러나 다시 잠에 곯아 떨어지기 시작한 희우의 반응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이상한 소리뿐이다. 이런. 그녀를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손님은 결국 어쩔수없다는 듯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쿡 찔렀다. 그 행동은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막 감겼던 두개의 눈꺼풀이 다시 영차영차하고 위로 밀려올라간다. 아직 초점이 없는 멍한 눈에 간밤에 눌린 베갯자국이 남은 적나라한 얼굴. 디노가 풉하고 웃더니 점잖게 그녀를 깨운다.

 ​

 "이제 출근하셔야겠는데요."

 "네...? 출근... 으아악!"

 ​

 희우가 괴상한 고함과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구석으로 사사샥 도망친다. 침대 머리맡, 그러니까 희우의 코 앞에 누군가가 얼굴을 불쑥 들이대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디노는 희우의 반응을 보고 의외라는 듯 눈이 동그랗게 뜬다.

 ​

 "뭘 그렇게 놀랩니까? 남편이 아내 찾아온 것 뿐인데."

 "어, 어, 언제 오셨어요?"

 "음... 30분 전에?"

 ​

 설마 30분동안 저 자세로 날 보고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희우는 불길한 생각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 디노는 생각보다 많이 놀란 듯한 희우를 보자 조금은 미안해졌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

 "이런, 그렇게 놀래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많이 놀랐어요?"

 "그렇게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으면 누가 안 놀라요?"

 "아하하, 그런가."

 ​

 정말이지 종잡을수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아직 안 지도 이틀도 채 안된 낯선 사람이긴 하지만-사람이라고 지칭하는게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왕자님이란 사람은 몇날며칠을 봐도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디노가 침대 곁에서 일어나 긴 몸을 펴더니 근처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는다.

 ​

 "아침 일찍부터 미안해요. 더 자게 두고 싶었지만 오늘내내 바쁠 것 같아서요. 지금 아니고선 말해줄 틈이 없을 것 같아서."

 ​

 희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디노를 쳐다봤지만, 디노는 그런 희우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

 "어제 본 머리 긴 아저씨는 아로닌. 어릴적부터 날 가르쳐준 스승이자 마계의 재상이에요. 엄청 까탈스럽지만 지금 마왕성에서 유일하게 믿을만한 마족이죠. 아, 차라도 한 잔?"

 "아뇨 괜찮..."

 ​

 아직 뭘 입 안에 밀어넣을 기분이 아닌터라 차 제안을 거절했지만, 디노는 이미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과 포트 쪽으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티포트가 절로 기울어져 잔에 쪼르르 물을 따랐고, 곧 두개의 찻잔이 둥실둥실 떠올라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온다. 디노는 능숙한 손길로 찻잔을 받아 들더니 하나를 희우에게 건넨다. 희우는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얼떨결에 찻잔을 받아들었다.

 ​

 "그리고 검은 머리에 인상 더러운 아저씨는 노이르 공. 내 숙부이자 내가 왕이 되는 것을 가장 반대하는 마족입니다. 그 자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면 안돼요. 어차피 직접 대화할 일도 없게 할테지만."

 ​

 디노의 직설적인 묘사에 희우가 곧바로 어제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은 찰나라고 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사냥에 열중하는 맹수처럼 날카로웠던 노이르의 눈빛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희우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런데... 그 노이르 공이라는 사람이 음... 어... 그 쪽의 작은아버지라고요?"

 ​

 디노를 뭐라고 불러야할지 난감했는지 희우가 호칭을 얼버무리자 디노가 피식 웃는다.

 ​

 "편하게 불러요. 디노리스라고 해도 좋고, 디노라고 해도 좋고, 디노씨도 뭐 상관은 없고. 아로닌 앞이 아니면 뭐든 상관없어요. 아로닌은 워낙 그런거에 예민해서."

 "그럼 다른 사람... 아니, 마족들 앞에서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요?"

 "예법대로라면 왕자님이나 저하가 맞겠죠. 즉위식 이후에는 전하가 맞는거고. 그런데 아직 그렇게 불려본 적은 없어서 어색하네요."

 ​

 멋적게 볼을 긁적거리는 모습은 마왕이나 왕자보다는 그저 장난스러운 소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이게 정말 어제 신하들을 호령하던 그 사람이 맞는건가. 희우는 이 남자가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

 "아무튼 맞아요. 노이르 공은 내 숙부, 그러니까 아버지의 동생되는 사람입니다."

 "그럼 친척이잖아요?"

 "그렇죠.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둘의 시선은 각자만의 이유로 의아해한다. 그리고 그 의이함을 먼저 밝힌 쪽은 바로 희우였다.

 ​

 "친척인데 왜 반대를 하는거에요?"

 "그거야 친척이니까 그렇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흠, 하긴 인간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군요."

 

 디노가 차를 한모금 머금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

 "마족은 힘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 힘은 혈통이 결정해요. 난 마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노이르 역시 예전에는 마왕의 아들이었던 자에요. 즉 그 역시 왕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거죠. 나와 내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목숨을 위협받아왔어요."

 ​

 치열한 과거사를 무덤덤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하마터면 이게 '나 죽을뻔했다'는 내용인줄도 모를뻔했다. 이거 무슨 사극에서나 볼법한 얘기아냐? 희우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디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얼마 전 내 아버지가, 그러니까 전 마왕이 노이르의 손에 죽었어요."

 "그렇군... 뭐, 뭐라구요?"

 "비공식이긴 하지만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마족들이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요. 그들은 강한 자가 왕이 되기를 원하니까. 나는 300년간 노이르에게 암살 위협을 받았지만,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한 마족은 없었어요."

 ​

 막장 가정사를 잔잔하게 전해듣는 기분이란 꽤나 오묘하다. 그런데 잠깐, 지금 몇년이라고?

 

 "그런데... 방금 몇년동안이라고요?"

 "정확히는 299년이요. 아차, 마족은 인간보다 수명이 10배정도 길어요."

 ​

 어제 로나의 나이를 잘못 들은게 아니었구나. 희우는 이제서야 알게 된 한가지 사실에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

 "로나는 똑똑한 아이에요. 아직 어리지만 희우씨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겁니다.

 "아, 역시... 음?"

 ​

 잠깐. 분명 방금 전에 속으로 혼잣말한거였는데?

 머릿속 생각을 그대로 간파당하고 거기에 대답까지 듣게되자 희우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이건 당황스럽다 못해 마치 완전히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

 "아직 잠이 덜깨서 그런가. 오늘은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보이네요."

 "네, 네에?"

 "내가 배우를 찾는다고 했잖아요. 희우씨가 왜 이 알바를 하게 됐겠어요?"

 ​

 디노는 찻잔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느새 다 마셨는지 그의 찻잔은 텅 비어 있었다.

 ​

 "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희우씨는 속으로 별의별 욕을 다 하면서도 얼굴에 티가 안나서 뽑은거에요. 이 정도 철판이면 1년정도는 괜찮겠다 싶어서."

 ​

 세상에 마상에. 희우는 뒤늦게 자신의 합격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럼 이 인간은 여태까지 자신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거 아닌가. 아니 그럼 알고있다고 처음부터 말이나 해주던가. 그럼 욕을한다쳐도 어느 정도 필터링(?)을 거쳤을텐데! 미친놈부터 시작해서 또라이네 뭐네 별별 흉을 다 봤던 것이 생각나자 희우의 얼굴은 이제 당장이라도 터질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러나 막상 디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

 "그럼 우선 여기까지. 오후에는 즉위식 준비 때문에 아로닌이 올테니 그 전까지 푹 쉬어둬요."

 "즉위식이요?"

 "말했잖아요. 나 마왕될거라고. 그럼 왕비님, 수고하십쇼."

 ​

 디노가 장난스러운 경례와 함께 방에서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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