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

　눈 앞에서 번뜩이는 칼날을 보며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생각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레이스의 몸에서 바깥쪽으로 엄청난 바람이 불어나갔다.

　챙! 하는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

　그레이스의 미간 앞에서 멈춰 선 노인의 검과 익숙한 모습의 검붉은 창이 달빛에 반짝였다.

　"오랜간만이군요. 아틀리케의 마법사 "

　바람에 후드가 벗겨진 노인이 그레이스의 두 눈을 정확히 응시하면서 말했다.

　"아니 이렇게 불러드려야 했던가요? 악신의 첫번째 창. "

　노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달빛에 빛나는 흑요셕과 같은 고고한 자태의 흑기사가 검붉은 창으로 자신의 검을 막아서고 있었다.

　"반-아스트라스 , 네놈이 왜 여기에..."

　그레이스의 부름이 없었음에도 자기스스로 반지에서 튀어나온 폰틴이 붉은 안광을 붉히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때문에 온건 아니니"

　노인이 검에 더 무게를 실자 폰틴의 검은 그림자가 노인의 칼을 타고 흘러갔다.

　"그럼 네놈이 왜 여기있는거지?"

　"허허허... 다 늙은 노인네가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게 무슨 이유가 필요할지요?"

　"헛소리...."

　흘러들어간 폰틴의 그림자가 노인의 검을 완전히 검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인이 칼을 옆으로 살짝 비틀자 검에 붙어있던 그림자들은 조각조각 찢어져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노인은 뒤로 폴짝 뛰며 폰틴과 그레이스와 거리를 벌렸다.

　폰틴은 창을 세 바퀴 회전시키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았다.

　그러자 창이 꽂힌 바닥을 시작으로 주변이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 갔다.

　"당신은 절 이길 수 없습니다. 폰틴, 격의 차이는 이미 한 번 알려 드렸을텐데요."

　노인이 고고한 자태로 비스듬하게 검을 빼어들며 말했다.

　"기사란 자고로 죽음과 맞바꿔서라도 지켜야 하는게 있는 법.

　이미 내가 한 번 말하지 않았던가? 반-아스트라스"

　폰틴의 붉은 안광이 더욱 밝게 빛났다.

　"물론 기억이 납니다. 폰틴 당신의 유언이지 않았습니까?

　허허~ 물론 죽은 당신은 안식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헛소리..."

　폰틴이 오른손을 서서히 움켜쥐었다.

　그러자 바닥을 검게 물들이며 멀리멀리 퍼져나가던 검은 그림자들이 일순간 노인을 감싸는 형태로 둥글게 말려들어갔다.

　월식의 순간처럼 검은색만을 간직한 동그란 구 형상

　폰틴은 반쯤 오므렸던 손을 강하게 움켜 쥐었다.

　그러자 마치 페트병을 손으로 구긴것처럼 검은 구체는 순식간에 찌그러들며 부서져 나갔다.

　"과연 아틀리케의 마법사. 영창도 없이 이런 기술을 구사하다니 놀랍습니다."

　여전히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

　폰틴은 땅에 박았던 창을 다시 뽑아 들고는 대지를 부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챙!

　맞붙이치는 검과 창

　달빛 아래에 두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떨어져나왔다.

　뒤바뀐 둘의 위치

　지금은 노인이 폰틴보다 그레이스와 더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좋은 싸움이었습니다."

　노인이 칼날을 칼날을 손가락으로 한번 쓱 훓고는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폰틴의 가슴부위가 비스듬하게 밑으로 흘러내리며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져갔다.

　"반-아스트라스, 정의의 신 '티안'의 기사여. 으.... 그헉...."

　점점 검은 연기로 변해가는 폰틴은 사라지기 직전 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바람에 흩날리는 재와 함께 그레이스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Lv.444 의 네임드 몬스터

　'파랑'이라는 칭호를 가진 마법사 세루리안을 제압했던 폰틴이 단 일격에 연기가 되어 흩어진 것이다.

　뚜벅...뚜벅...

　폰틴을 제압하고 여유로운 방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노인

　그레이스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상태이상 : 압도적인 위압감 >

　그레이스의 눈 앞에 출력된 디버프 메시지

　세루리안과 폰틴을 만나서도 보지 못했던 메시지였다.

　그레이스는 바닥에 넘어진채 손을 더듬어가며 노인과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뒷걸음질쳤다.

　아무리 스텟이 높다고 해도 그레이스의 레벨은 15

　444 레벨의 폰틴도 이기지 못한 상대를 자신이 이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뚜벅...뚜벅...

　하지만 노인과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는다.

　툭...

　설상가상 그레이스의 등에 닿는 딱딱한 감촉

　막다른 골목의 끝에 있던 벽

　더이상 그레이스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뭐야.. 이것도 이벤트야..? 세상에 이런 이벤트가 어디있어?'

　'불굥평해! 이런거 반칙이란 말이야!'

　아무리 불평의 말을 생각해봤자 소용 없다는것은 알지만, 지금 그레이스가 할 수 있는건 이게 전부였다.

　노인은 이제 불과 3m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레이스는 떨려오는 다리를 부여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죽을 수는 없었다.

　이가 없다면 이빨로.

　검이 없다면 맨주먹으로라도 싸우다가 죽는게 그레이스의 방식이었다.

　"이얍!"

　날카로운 기합을 넣으며 그레이스의 주먹이 노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노인은 그레이스의 주먹을 옆으로 가볍게 흘리고든, 그래이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노인의 눈은 이제 그레이스와 불과 15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죽이십시오."

　차갑게 노인을 쏘아본 그레이스가 냉철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죽고싶지 않아. 하지만 이건....'

　모든것을 포기하고 그레이스는 눈을 감았다.

　어지쩌지 겨우겨우 모면해왔던 'Epic Tales'에서의 첫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었다.

　알뜰살뜰 모은 돈도. 신나게 올린 경험치도

　어쩌면 장비하고 있던 장비까지도 떨어뜨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이상 저항할 수단같은건 그레이스에게 없었다.

　토닥..토닥..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은 그레이스에게 느껴진 것은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아빠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줄때 느꼈었던 따스한 사람의 체온이었다.

　그레이스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눈 앞에는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노인이 자신의 머리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꼬마 아가씨.

　당신이 아카네 여신에게 먹히지 않았다는건 아까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으니"

　붙잡았던 손목을 놓아준 노인이 그레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레이스양이라고 했지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반-아스트라스.

　그냥 반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뗀 노인은 잡고 일어나라는듯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온 몸이 굳어버린 그레이스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일수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순간적으로 흑요석 반지를 끼었던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폰틴을 부를 수 있는 효과의 반지, 폰틴이 죽은 시점에서 파괴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다행히 반지는 아직 그 곳에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몸이니까,

　그레이스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정확히 캐치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주 미묘한 눈동자의 떨림이나 움직임까지도 노인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반지 안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내일 아침정도면 다시 부름에 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인의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레이스였다.

　아직 별로 부려먹지도 못한 폰틴이 이렇게 사라지는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할아버지는 대체 누구세요?"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랍니다."

　"거짓말 마세요. "

　평범한 할아버지가 444레벨의 폰틴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은밀했던 세루리안의 실험도 알고 있는데다가, 아카네 여신의 가면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눈치다.

　이런 인물이 평범한 인물일리가 없었다.

　"정의의 신 '티안'의 기사. 분명 폰틴이 사라지기 직전에 당신을 그렇게 불렀어요.

　할아버지도 폰틴과 마찬가지로 신들 중 한명을 따르는 기사인거죠?"

　그레이스의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이 노인을 쏘아보았다.

　"이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노인이 여기저기 흩날린 신문지들을 살피며 말했다.

　"오늘 밤 잘만한 장소와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부족하겠지만 그걸로 오늘 밤 무례를 용서하시길..."

　노인이 신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눈가에 진 주름과 인자한 미소.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굳은 살 배긴 손

　그레이스는 순간 노인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천천히 노인의 손에 손을 올렸다.

　그레이스의 눈 앞에 위와 같은 작은 메시지 창이 출력되었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 메시지가 보이는건 그레이스 뿐인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달빛이 가득하고 신문지가 휘날리는 어두운 골목에서 점점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