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집으로 바리바리 싸들고 온 약들을 식탁에 쏟으며 마른세수를 한번 했다. 몇군데를 나누어 돌아다니느라 몇 장으로 나눠진 영수증이 뒤늦게 팔랑팔랑 떨어졌으며 동시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쩐지 허무해지는 느낌.
냉장고에서 어제 사둔 빵하나를 꺼내 우물우물 씹으며 의자에 앉았다. 전통 마약성분은 아무래도 구할 수 없었지만 의료용으로 암페타민류 등의 각성제나 벤조디아제핀 등의 억제제 정도는 의약품에도 포함되어있다. 그래봤자 그 수치는 미미한 정도고, 식품의약안정성을 통과해야 가능하다.
네카라는 단어를 최훈의 입에서 들었을 때부터 뭔가가 찜찜했다. 그건 이미 이 세상에 없어야할 약품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기억력을 풀가동시켜 봤지만 네카의 분자구조를 떠올리는데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은 엉키고 엉켜 그게 그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넘어갔다.
화학에 손을 뗀지도 어언 십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쓸데없이 먹지도 않을 약들을 사들고 들어왔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까지 합치면 이 식탁을 꽉 채우는 정도. 누가 보면 뭐 중독된 줄 알겠네. 나는 자조하며 퍽퍽한 빵을 먹느라 그새 꽉 막힌 목을 뚫기 위해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제약회사나 연구실이 왜 있겠나. 그걸 제일 잘 알면서도 포기하진 못했다. 얼추 비슷하게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DM에는 최훈이 있었다. 그의 비상한 두뇌회전과 어떤 식이라도 줄줄이 읊어내려 콕 집어내는 기억력을 생각해본다면 네카를 재생산해내는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 환각물질로 뭘 하느냐겠지만.
뭔가 무시무시하고 깊고 짜증나는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물컵을 내려놓고 종이와 펜을 들고 들어왔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 가장 가까이 있는 약통을 들어 원재료명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끝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장장 열흘이나 넘게 걸릴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몸이 회사에 있으되 정신이 가출한 상태로 열흘을 보냈다. 온몸이 뻐근했으며 눈가가 뻑뻑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한 투샷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한지 5일정도 되었지만 기분상으로는 한 달 넘게 지난 것 같았다. 몸을 상해가며 할 만큼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매번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항상 새벽을 향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내달렸다.
"후우.."
이젠 마치 사약처럼 보이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한숨을 쉬었다. 쾡한 시야 너머로 절구하나. 그 안에 담긴 하얀 가루. 나도 모르게 그걸 커피 안에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그 생각에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이쯤 되니 내게서 사라진 뭔가가 돌아왔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사람에 따라 '열정'이나 '열망' '욕구' 정도로 표현될 수 있겠다. 그런 감정이 없어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었다. 나도 그랬다. 나의 커리어가 사라진 이후 나는 이 바닥으로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했다. 사실 그런 다짐이 없어도 어렵긴 했다. 나는 빌미가 잡혀 무너진 회사의 직원이었고, 좀 더 파고들자면 중심부 쪽에 있던 사람이란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내쳐지기 전에 내가 문을 닫았다. 처절한 자기방어였지만 나는 그 조차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내면에 작은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심리학 이론의 표본처럼 행동했다.
보지 못했던 그 너머에 내가 원하던 삶의 방식이 존재했다. 닫힌 문은 닫힌 채로 먼지가 쌓였고 방치했다. 그게 내겐 최선이었다. 살짝 틈을 벌려 쳐다본 그 사이에는 사실 어둠만 있는건 아니었는데도 그것조차 나는 잊고 살았다.
부엌 싱크대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에 약통이 가득했다. 텅텅 소리가 나는 빈통에 있던 약의 80% 이상이 싱크대 배수구로 빠졌다. 쪼개고 으깨고, 몇 가지 기초적인 화학실험을 하는 사이 지글지글한 인공냄새가 집안 곳곳에 배였다. 식욕은 뚝 떨어졌고 눈만 툭 튀어나오고 있다는게 스스로도 여실히 느껴졌다. 이렇게 다들 괴짜 과학자가 되는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네카의 짭쪼름하고 박하향 나는 특유 냄새가 그 증거였다. 이런 건 상용화할 수 없다. 효능도 불분명할뿐더러 상온에 놔두면 시큼 떨떠름한 냄새까지 올라오기 시작한다. 특히나 박하향은 그 존재가 강력해서 어디서부터 제거해야할지 난황을 겪은 기억이 내 안에 남아있었다. 싸한 맛이나 느낌을 선사하진 않지만 향만 그랬다. 이걸 쓴다면..
나는 여전히 깨지 않는 머리로 생각해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태엽의 마지막 방향을 감는 것처럼 뻑뻑하다 이내 사고가 딱 멈추는 기분이었다. 방법은 알았으니 아무래도 약을 더 사야했다. 하얀가루를 가만히 주시하다가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다시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