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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의 집 -
" 뭐 좀 마실래?"
" 아.......아무거나."
"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지?"
수현은 은석의 말에 잔뜩 긴장한 채 소파에 걸터앉는다. 주방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석은 웃음이 배어 나온다.
"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그렇게 어정쩡하게 앉아야겠어?"
정말 틈이 보인다 싶으면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자신의 모습에 민망해진 수현은 조금 더 깊숙이 소파 등받이까지 몸을 들이 밀어본다.
" 누나 그게 뭐야. 푸하하하"
은석의 말에 의자 안까지 몸을 들이밀었건만 이 정도로 등받이가 뒤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현의 모습은 과히 들이 누운 것과 다름없었다.
" 우......웃지마! 소파 등받이가 왜 이렇게 뒤에 있는 거야?"
" 눈으로 보면 되지 그걸 왜 몰라? 크크크"
" 긴장돼서 그런 게 눈에 들어오냐고!"
은석에게 속마음을 내비쳐 버린 수현은 얼굴이 붉어진다.
" 오호~ 그렇게 긴장이 돼? 왜 긴장이 돼? 뭐 때문에 긴장할까?"
" 그.......그거야. 그래 너희 집에 처음 와봤고 그리고(주절주절)"
민망함에 수현은 중얼중얼 뭐라 말하지만 그런 모습까지 사랑스러운 은석이다.
" 어이구 그랬떠여? 우리 집에 처음 와 긴장도 되고 잘생긴 내가 앞에 있으니 자꾸 막막 요기가 두근거렸떠여? 그래서 그렇게 들이 누우셨나? 유혹이 너무 돌직구네. 크크크"
" 너~ 좋은 말 할 때 그만해라......(으드득)"
" 그래 지금 아주 좋아. 후후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갑자기 왜 그래 나까지 이상해지게."
은석의 말에 긴장이 풀린 수현은 웃음이 터져 나온다.
" 후후후 그러게 내가 왜 이래? 안 어울리게."
" 맥주 괜찮지?"
" 응"
" 혹시 와인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 아니 맥주. 솔직히 와인 무슨 맛에 마시는지 모르겠어. 떫기만 하고."
" 술은 역시...."
" 쐬주지!"
둘은 언제 긴장했냐는 듯 소주에 대동단결하며 큰 소리로 웃는다. 얼마 후 은석이 가져온 맥주를 받아들고 수현이 두리번거린다.
" 집구경 시켜줄까?"
" 봐도 돼?"
" 물론. 설마 거실에만 꽁꽁 가둬둘까 보여드려야지요."
" 그게 아니라 혹시 우렁각시라도 숨겨뒀을까 봐~"
수현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은석을 놀리려 들었지만 이내 자신의 무덤을 팠다는걸 알 수 있었다.
" 이를 어쩌나 그 우렁각시가 본분을 잊고 이렇게 내 눈앞에 서 있는데. 이제라도 알았으면 나 없을 때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래 반찬도 좀 해놔."
" 엑? 그게 우렁각시야? 우렁이 식모지 식모!"
" 후후후 왜 우렁각시면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 그리고 누가 우렁각시한데?"
" 그러니까 우렁각시 하면 안 되지. 그냥 각시를 해야지. 크크크"
" 사람을 갖고 놀아라 갖고 놀아."
"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하지마. 갖고 놀 그럴 여유 없다고 나."
별 생각 없이 던진 수현의 말에 은석은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오랜 사랑을 모르는 수현이기에 혹시라도 그런 마음이 들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던 은석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수현을 안고 사랑을 말하며 그녀의 모든 걸 갖고 싶지만 참고 있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 궁금한 게 있어."
" .........."
" 나를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야?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아르바이트할 때니까 그때?"
수현의 말에 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다.
" 뭐....... 뭐하는거야 갑자기."
" 나 봐봐."
" 응?"
은석은 수현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그녀의 눈에 초점을 맞춰본다.
" 므햐. 또 왜 구래해 (뭐야. 또 왜 그래)"
" 잘 봐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아?"
그의 말에 다시 한번 수현은 은석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솔직히 낯설지는 않았다. 분명 낯이 익다. 낯이 익지만.........
" 눠 심화궤 잘쉥귀귄 해똬. (너 심하게 잘생기긴 했다)"
" 뭐? 하하하하"
맞다. 이 녀석 정말 심하게 잘생겼다. 그전에 왜 미쳐 몰랐을까 이토록 잘생겼단 걸. 그래서 아름이 외 숱한 여자들이 목을 매고 호프집에 뻔질 왔었겠구나 싶은 수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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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민영입니다."
" 정시연이에요."
둘은 식사 내내 별말이 없었다. 차를 마시며 입을 연 건 그녀였다.
" 결혼하실래요?"
민영은 그녀의 말에 찻잔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다.
" 그래도 상관없다면."
둘 사이에 이 말 말고 다른 질문이 무엇이 필요했을까. 이미 그들은 각자 필요한 부분을 알아보고 더 이상의 최선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더 만나긴 해야겠죠? 바로 결혼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 그것마저도 의심할 테니."
" 괜찮겠어요?"
" 후후후 어떤 부분에서요?"
" 전 이혼도 그리고 아이도 있어요."
" 다행이에요."
" ?"
" 전 늙다리 할아버지가 제 짝이 아닐까 십 대 때부터 생각해왔던 터라 이 정도면 만족할만한데요?"
자신도 저리 슬픈 눈빛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민영은 차마 그녀의 눈을 오래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히 아픔을 공유할 사람이 생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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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드레스룸"
" 히엑~ 무슨 옷이 이렇게 많아."
" 누나 나 이래 봬도 할리우드에서....."
" 그래그래 너 잘나가는 연예인이지. 미안해 자꾸 깜빡깜빡한다고."
" 쳇! 깜빡하지 말고 항상 기억해. 이렇게 잘나가는 남자가 누나를 얼마나 사랑~"
" 으악~ 그만~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수시로 입에 달고 살 수가 있어. 너 원래 이랬니?"
" 아니 누나한테만 그래.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 이 말을 하게 됐는데. 이 정도에 놀라면 안 되지. 아직 멀었어. 평생 계속할 건데?"
" ................."
" 왜 말이 없어?"
" 그냥 내가 너한테 그만큼 표현을 못 해주는 게 미안....... 한거 같아서."
" 뭐가 미안해. 내가 누나 몫까지 다 하면 되는데. 미안하단 말 하지 마. 그거 듣기 싫다."
" 하지만......."
" 이리 와봐. 누나가 꼭 봐야 하는 데가 있어."
은석은 수현이 미안해하는 모습을 더 볼 수 없어 어디론가 그녀를 이끌고 간다.
" 짜~라라라~란~"
별다른 가구 없이 커다란 침대 하나와 작은 협탁. 네이비와 화이트로 깔끔하게 정돈된 침구. 그중 눈에 띄는 침대 위 낯익은 풍경의 커다란 그림 액자 하나. 연예인들 집 공개하는 프로를 볼 때면 꼭 하나씩은 자신의 액자를 걸어놓는 거에 비해 너무도 심플한 벽면은 수현에게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욱더 눈에 띄는 그림 액자. 수현은 가만히 그 그림을 바라본다.
산골보육원이다. 그녀의 슬픔과 추억이 묻어있는 분명 산골 보육원의 전경을 그려놓은 것이다.
" 어딘지 알겠어?"
" 너........ 이거........여길 네가 어떡해......."
수현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지 않은가. 은석이 이곳 산골보육원을 그것도 그림으로 커다랗게 침대 위에 걸어놓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놀라 굳어 있는 수현을 뒤에서 살포시 감싸 잠시 안고 있던 은석이 수현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린다.
" 이래도 모르겠어?"
은석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삐삐모양으로 만들고 수현의 눈앞으로 다시금 얼굴을 들이 밀어본다. 그 아이다. 분명 추억 속 그 여자아이였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 누나랑 뒷동산 가서 같이 누워있으면 진짜 꿀잠 잤는데. 그래도 잠자리채로 벌 잡아놓고 빼라고 시켜 쏘이게 한 건 너무 했어."
" 설마.......... 근데 그 애는 여자애였는데.........."
수현의 말에 은석은 협탁으로 가 작은 액자 하나를 들고 온다.
" 우리 엄마 취미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누나 기억 못 하나 본데 나 치마 입었지만 서서 오줌 눴다 뭐."
수현은 은석이 건넨 액자를 뚫어지라 본다. 사진엔 수현의 기억속 그 여자아이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해맑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 봐봐. 남자답게 딱 누나 어깨에 손도 올리고. 완전 상남자야. 캬~"
" 처음부터 난 줄 알고 있었어? 근데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
" 모르니까."
" ?"
"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누나랑 놀고 그런 게 추억이었을지 모르지만, 혹시 누나한테는 즐겁게 지낸 기억도 상처일지도 모를 일인데........ 나만 좋고 반갑다고 누나 기분 생각 안 하고 그럴 수가 없더라."
" 은석아......"
" 엄청 입이 근질거리긴 했어. 그리고 서운도 했고."
" ................"
" 아무리 변했어도! 난 누나 바로 알아봤는데."
" 근데.........은석아."
" 응?"
" 네가 봐도 알아보기 힘들 거란 생각 안 해봤어?"
수현은 들고 있던 액자를 은석의 눈앞에 들이 밀어본다.
" 으악! 이건 누나니까 보여주는 거야. 솔직히 내 흑역사라고! 누나랑 찍은 거라 버리지는 못하고 으이구"
" 그때....... 갑자기 너 없어져서 솔직히 힘들었어. 왜 그랬던 거야? 사람들한테........ 네 얘기 안 물었어. 분위기도 물을 상황 아닌 거 같았고. 인사도 없이 갈 정도로 나랑 별 사이가 아니었나...........나도 어렸지 한편으론 너한테 배신감도 들었거든."
" 그때 엄마 돌아가셨어. 투병이랄 것도 없이 갑자기."
" 미........안해 그것도 모르고."
" 알 수가 있나. 사람들도 이모 눈치 보여 쉬쉬했을 텐데."
" 이모?"
" 산골보육원 원장님이 우리 이모야. 엄마 동생."
" 아 그래서......."
" 응 그래서 자주 갔던 거야. 엄마랑"
" 그랬구나. 근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한 번도 안 왔어? 이모라며"
" 방황했어. 너무 허망하게 엄마 잃고, 아빠도 나도 충격이 컸거든. 어느 정도 회복됐을 때는 이모가. 이모가 엄마랑 정 떼고 잘들 살게 하려고 막았고. 거기 엄마하고 추억이 많으니까"
" 힘들었겠다. 그 기분 알아. 갑자기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지는 기분. 그것도 나로 인해........... 나도 부모님 잃고 숨 쉬는 것도 미안했어.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모두다.
그때 만났어. 마음의 문 굳게 걸어 잠갔을 때. 쳐내고 밀어내도 자꾸 나한테 다가오는 너 보면서 아......... 나도 아직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구나. 나처럼 못된 아이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모든 게 변했지."
" 설마 지금도 누나 잘못이라 생각하는 거 아니지?"
" 응 이제 아니야.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고 있거든."
" 그중 제일 큰 사랑은 나한테 받고 있고. 후후"
" 맞아. 정말 이 세상에서 너만큼 아낌없이 나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는 거 같아. 이렇게 오랫동안."
은석은 그녀를 품에 꼭 안는다.
" 응 이 세상에 나만큼 누나 사랑하는 사람 없어. 은아 누나도 그래 율이도 누나 사랑하지만 다들 나보다 경력이 짧다고. 알지? 어디 가든 경력자 우대해줘야 하는 거."
" 특별수당까지 열심히 챙겨주도록 노력할게."
" 그럼 그거 오늘 좀 받아야겠다."
은석이 그녀의 볼을 살며시 만진다. 부드러운 그 볼에 자신의 입을 맞추고 수현의 붉은 입술로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옮긴다. 한 번 두 번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점점 더 수현에 대한 갈증은 심해진다.
" 미안 누나 나 오늘 안 되겠다."
은석은 수현을 침대에 눕힌다. 놀라 두 눈 질끈 감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녀의 앞머리를 헝클린다. 이마에 키스를, 그 이마를 따라 코에 키스를, 그리고 붉은 입술로. 가녀린 목에 사르르 한 떨림 은석은 부드럽게 얼굴을 묻는다.
" 사랑해 사랑한다 정수현."
"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지금까지 사랑해줘서."
" 더 고마워하게 될 거야. 상상도 못할만큼 더 많이 사랑해줄 테니."
온 세상은 어둡고 깊은 한밤이지만 수현과 은석의 밤은 너무도 달콤하고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