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한대도 어쩔 수 없다고, 날다람쥐1호는 생각했다. 그에겐 힘이 없었고 능력도 없었고 알량한 재롱이외에 그녀의 환심을 살만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한참 울고 떨쳐버린 그녀는 후련하게 파하, 하며 숨을 한번 내쉬고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날다람쥐1호의 손을 꽉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아버지의 폰을 꽉 쥐어잡았다.
"배고프다. 그치?"
발갛게 부은 눈을 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눈물냄새가 났다. 짭짤하고 상쾌한 향이었다.
그는 그녀와 김밥 떡볶이 라면을 먹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집은 자그마한 투룸으로 거실을 보자마자 날다람쥐1호는 현관문 앞에 방이 바로 있네, 라는 시덥잖은 소리를 해서 그녀를 한껏 웃게 만들었다. 그때는 예의 없는 말이란 걸 몰랐고 그저 아까 울던 사람이 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더 많이 웃어야 될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그때 그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좀 서러운 마음을 눈물로 털어버리니 괜찮았다고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없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그 말은 자라나는 날다람쥐1호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았다.
아버지가 날다람쥐1호를 그녀에게 부탁한건 아직도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 중 한가지였다. 말 그대로 아버지는 그녀를 그날 처음 본 것이 맞았다. 아버지 은사님의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인 그녀와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남자와 길 잃은 아이를 데려다준 여자 그 이외에 연결고리랄게 전혀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유 없이 그녀를 상처주지 않았던가. 잘못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걸려온 전화에, 그녀의 집앞까지 온 아버지는 어린 그의 짐을 들고 있었다. 아들을 데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단정한 목소리로 사과를 하고 봉투를 건네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남아있다.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라고 거듭하면서도 아버지는 부탁을 거두지 않았다. 아버지와 그녀 사이에서 날다람쥐1호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금방 올게."
아마 진심이었을 그것은, 그에겐 아주 멀리 간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큰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울면 다시는 안올것 같아 그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버지와 날다람쥐1호는 반년 뒤에 재회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그녀와 살았다.
날다람쥐1호는 그녀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녀는 덤덤히 열 살 난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이게 또 의아한 점인데, 당시에 날다람쥐1호 자신도 별생각없이 넘겼지만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이고 투룸에서 자취하며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채 5년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아버지는 꼬박꼬박 그의 양육비 겸 생활비를 보조해주었지만 그 이유때문에 아이를 받아들였다기에 그녀는 너무 젊고, 또 어렸다.
날다람쥐1호는 그녀와 밥을 먹고 책을 읽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때론 그녀가 내 수준에 맞췄을 것이 분명한 받아쓰기나 끝말잇기 따위를 하며 보냈다.
그는 그녀와 나란히 서서 이를 닦거나 우리 오늘은 불량식품을 먹자며 그를 꼬드기는-그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항상 그랬다- 그녀를 따라 난생 처음 먹어보는-그러나 맛있는-음식을 먹고, 놀다가 그냥 벌러덩 늘어져있다 또 스르르 잠이드는 그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라는 건 몰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오감을 활짝 열고 이 기억이 변색되거나 퇴화되지 않도록, 체하지 않도록 꼭꼭 씹어 가슴에 새기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식으로 그녀와 친밀한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는지 날다람쥐1호는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생판 남인 자신에게 그런 애정을 준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란 걸 모르지 않아서 날다람쥐1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꿈을 꾼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선생님과 반년을 보냈고, 그것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단지 그 시기만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큰 줄기였다. 그녀가 날다람쥐1호의 중심인건 처음만난 그날부터 그랬다. 지금껏 변한 게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세밀하고 견고한 감정을 대체 누구한테 설명하고,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였을까. 날다람쥐1호는 그렇게 회고했다. 9년 전의 그가, 그녀에게 말한 문장은. 어쩌면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고는 한다.
'내가 왜 선생님이야?'
그 물음에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은 그에게서 나왔으되, 그의 말이 아니었다.
'나를 이끌어줄 것 같으니까요.'
날다람쥐1호는 어쩐지 깊어진 눈을 한 그녀를 기억했다. 열 살인 그가 입에 담은 말은 두고두고 그를 따라왔다. 그를 이끌어줄 선생님은 이미 한참 전에 잃었다. 그녀는 과거에, 그는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그는 자주 생각했다.
날다람쥐1호가 돌아간 집에 어머니는 없었다. 중학생 이후 멀리 외국에서 그에게 온 편지가 몇 통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도 없어졌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에 자랐고, 그들은 적당한 온기와 사랑으로 그를 키웠다. 그는 단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고 그의 사춘기는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뒤늦게인지, 때마침인지 한 남자가 생각났다. 그는 그녀가 유일하게 날다람쥐1호에게 소개시켜준 그녀의 지인이었고 쓸데없이 성실해보이는 인상과, 숨길 의도가 없는 건지 숨기지 못하는 건지 대놓고 그녀를 좋아하는 게 보이는-나는 여기서 인상을 찌푸렸다-사람이었다.
조금 더 자라 그는 꽤 많은걸, 가시적이고 형식적이고 사회적인 어떠한 조각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 남자를 다시금 떠올렸다.
날다람쥐1호는 그 남자를 찾기로 했다며 글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