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어?”
“잘 모르겠어. 무슨 생각인지 감이 안와.”
“왜? 뭐라고 하던데?”
“그냥 대뜸 없이 상담하고 싶다고 하지 않나, 휴대폰 번호 내놓으라 한 다음에 주말에 부를 테니 비워두라고 하지를 않나... 제대로 잘 못 걸린 거 같은 느낌이 들어.”
“그냥 데이트 하자는 거 같은데.”
“드디어 세진이에게도 봄날이!”
“에이, 설마. 뭔 말을 할 때마다 자기 말에 안 따르면 경찰에 신고한다는 이야기만 하는데 그럴 리가 절대 없어.”
아마도?
***
모든 수업이 끝났다. 간만에 아무런 일정이 없다. 집에서 푹 쉬면서 책이나 읽을까 고민하다가 운동을 너무 쉬면 몸이 굳어버릴 거 같아서 체육관에서 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녕하십니까!”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했다. 다들 운동에 열중하는 듯, 고개로만 인사를 받고 하던 운동을 계속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평소라면 원우가 왔냐고 반겼는데 오늘은 아니다. 그보다도 내 시야 안에는 원우가 없다.
탈의실에도 가보았지만 없다. 매일매일 출석체크를 하던 애가 갑자기 안 온 걸보니 뭔 일이 생겼나보다. 원우와 같은 학교 친구에게 가서 물어봤다.
“원우 무슨 일 있어?”
“아 실은요, 어제 형 안 왔을 때, 다른 체육관에서 이번에 대회 미들급 출전시킬, 재능 있는 신인이라면서 원우하고 스파링 붙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의가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스파링을 했는데 원우가 2라운드 K. O. 당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지?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 점수내기에서 K. O.라니 잘 없는 일이다. 그것도 원우 실력으로 신인에게 K. O라니...
“글러브는 12온스로 끼고? 헤드기어는 착용하고 한 거 맞지?”
“네, 글러브 무게도 같고, 기어 착용한 상태에서 스파링 했어요.”
믿기지는 않지만 어떠한 편법도 없이 확실히 원우가 진 것이 맞는 거 같다. 대회에서 우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원우 성격상 풀이 확 죽었을 게 뻔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내가 체육관에 처음 왔을 때부터 원우만큼 복싱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자부심을 갖고 복싱만을 위해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신인에게 K. O를 당하다니...
전화를 해서 위로라도 해줄까 고민하다가 지금은 이대로 두는 것이 나을 거 같아서 관뒀다.
운동을 시작하려고 탈의실로 갔으나, 원우 소식을 접해선지 갑자기 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옷을 벗으려다가 다시 입고, 운동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
“어휴. 지친다, 지쳐.”
집에 도착하자마자 N극과 S극이 이끌려 달라붙는 것처럼, 침대에게 이끌려져 누웠다. 평소라면 누운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들었으나 오늘은 뭔가 그럴 맘이 안 든다. 역시 원우가 신경 쓰인다. 원우에게 채팅을 보냈다.
임세진) 원우야 살아있냐?
얼마 안 되서 읽음이라는 단어가 조그맣게 떴다. 내가 보낸 채팅을 봤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3분 뒤, 답장이 왔다.
최원우) 네 형
임세진) 나랑 잠시 통화할 수 있냐?
잠시 고민하는 거 같았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났고, 결정한 듯 답장이 왔다.
최원우) 네
다행이다. 무리하게는 전화를 안 하려 했었지만 되도록 통화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울리고 세 번째가 울릴 때에 전화가 연결 되었다.
“여보세요?”
“...네.”
“네 이야기는 체육관에서 들었다. 괜찮냐?”
안 괜찮은 건 안다. 목소리에 힘이 없기도 하고 평소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뇨...”
“그렇겠지. 걔랑 붙고 나서 느낀 건 있어?”
“제가 복싱을 못한다는 거요.”
생각한 거 이상으로 다운된 거 같다.
“못한다는 놈이 첫 출전 때, 도민체전 우승하고 전국체전에서도 2등을 했냐?”
“운이 좋았나 봐요.”
“운은 무슨... 네가 징그럽게 매일 나와서 연습해서 그런 거잖아!”
자신의 노력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순간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건 제가 노력한 게 아니에요...”
“뭐?”
“그건 제 힘이 아니라고요!”
원우가 소리를 질렀고, 바로 통화가 끊겼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으나 들려오는 소리는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후...”
이번엔 내가 잘못했다. 기분을 좀 풀어주려고 전화했다가, 오히려 다운되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기회가 생긴다 해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원우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라도 원우가 한 말은 끝까지 부정할 거다.
“노력을 한 게 아니라니... 자기 힘이 아니라니...”
혼잣말로 다시 한 번 말해보니 또 다시 열이 난다. 그저 충격이 컸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답답함을 해소할 겸 열이라도 식히기 위해 샤워를 했다.
차가운 물방울 하나하나가 날 쓸어내리면서 뜨거운 열을 가져가 준다. 몸이 약간 떨릴 정도에 머리가 깨질 듯 한 차가움이지만, 샤워를 하고 나가면 말끔한 머릿속과 상쾌한 피부 촉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항상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다.
“후... 이제 좀 살겠다.”
머리를 털며 나오는데 휴대폰에서 불빛이 반짝거린다. 채팅이 왔다는 알림이다.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혹시나 원우에게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확인을 해보고 바로 실망했다. 채팅을 보낸 것은 원우가 아닌, 학교에서 이야기 나눴던 정보 공유를 위한 채팅방 개설이었다.
서찬민) 없는 사람 없지?
이지아) 야자 끝!!!!!!!!!!
김주호) 응 없어
벌써부터 시끄러울 거 같다. 정보를 위해 조금만 참자.
이지아) 세진이 보기만 한다 ㅡ.ㅡ
서찬민) 와 재미없다 얼른 나와라
“하......”
임세진) ㅇ
이지아) 아 뭐야 저게 ㅡㅡ
임세진) 아 됐고 글 올린 것 중에 정보 좀 있냐?
김주호) 우리 이제 막 야자 끝났는데?
이지아) 와 너무하다 혼자 야자 안한다고... 너 양아치야?
잊고 있었다. 나만 야자를 안 하는 걸...
임세진) 그럼 글 올리고 내일보자 ㅂㅂ~
채팅을 치자마자 바로 채팅방 알람도 끄고 폰 화면을 껐다. 기운이 나지 않는다. 원우가 신경 쓰인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에 보면 평소처럼 대해주면서 맛있는 것을 먹는 거 밖에 없다.
불을 끄자 눈앞에 보이는 건 창문 틈새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 같은 가로등 불빛 밖에 없었다. 한 번 신경 쓰이면 잠을 못 잘 수도 있다. 머리를 비우고 일찍 자자. 걱정과는 달리 눈이 스르륵 감겨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