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 시외버스를 타고 거제로 향했다. 운전을 할 정신도 컨디션도 아니었다. 두 시간 후 아파트 단지 옆 공원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고 저녁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여섯 시가 되어 집으로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자, 아들이 반색하며 반겼고, 아내는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놀란 듯했으나 이내 함께 식사하자며 저녁 식탁에 나를 불러 앉혔다. 아내는 오랜만에 찾아온 내가 반가웠는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고, 아들은 반가운 마음에 싱글벙글이었다. 나는 별다른 대화도 없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식사가 끝난 다음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 다음 아내와 아들을 거실로 불러 앉혔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먼저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 일하시는 건 요즘 어때요? 많이 힘들죠.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아내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이 없다. 무언가 느낀 것일까? 아내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음으로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산아. 학교생활, 기숙사 생활은 어떠니? 불편한 건 없니? 준비하던 자격증 합격한 거 축하한다. 취업은 어디로 가기로 마음먹고 있니?”
“학교생활이야 늘 그렇죠, 뭐. 취업은 공기업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잠시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 나서, 나는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 거예요.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예요. 저...... 연인이 있어요. 그 사람과 사이에 아기도 있고요.”
너무 순간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건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산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지만, 반면 아내는 놀라지도 흥분하여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도 않는다. 아내는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되묻는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무표정한 아내의 질문에 도리어 내가 당황스럽다. 하긴 아내와 20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녀가 화를 내거나 흥분한 것을 본 적이 몇 번 없다. 물론 부부싸움을 해 본 적도 거의 없다. 아내는 통찰력이 있었고 언제나 대범하며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반면 아들 산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나와 아내를 번갈아 보고만 있다. 내가 말이 없자 아내는 다시 묻는다.
“이혼을 원해요? 그 여자와 살 건가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물음. 나는 머뭇거리며 삼키듯 말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날 떠나 버렸거든요. 아기를 데리고... 그 사람은 나와 당신과 산이에게 큰 죄책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어쩔 생각이죠?”
“그녀는 처녀예요. 그녀와 아기에겐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 여자는 가족이 없나요?”
“부모님과 남매가 있지만, 달가워하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그녀를 미혼모로, 아기를 사생아로 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나의 애원 조의 말에도 그녀는 눈썹도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하고 온 거네요. 통보하러.”
“아니에요. 통보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하고 용서와 허락을 구하러 온 거예요.”
“그 여자를 사랑하나요?”
“저에겐 지금의 상황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과 의무에 관한 문제에요.”
“그럴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나와 산이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못 느낀다는 건가요?”
“아니라는 제 마음 아시잖아요. 당신과 산이는 어느 정도의 안정된 생활이 있지만, 그녀와 아기는 전혀 그렇지 못해요.”
나의 말을 듣고 길게 한숨을 내뱉은 아내는 잠시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다. 여전히 무표정하고 냉소적인 말투였으나 그녀의 말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흥분되어 있었다. 아마도 흥분을 가라앉히는 중인지도 몰랐다. 폭발하지 않기 위해. 아들 산은 감히 대화에 끼어들지는 못하고 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아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금 와서 내가 무어라 말 한데도 당신 마음에 변할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네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이혼을 원하면 그렇게 해 드리죠. 단, 당신은 그 외에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어요. 이 집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도 없고요.”
“알고 있어요. 그럴 자격 없다는 거.”
“그럼 잘 생각해 보고 꼭 해야겠다면 서류 준비해서 법원에서 봐요. 날짜 정해지면 연락주세요.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 말고. 그만 가세요. 쉬어야겠어요.”
아내는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감정 없이 말을 던졌고, 산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말 미안해요. 용서를 바라지 않을게요.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산아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 동생을 낳아준 사람을, 그리고 어린 그 아기를 내버려 둘 수는 없구나. 다시 연락하마.”
아들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네’라고 답했다. 아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황망히 아내의 집을 나서, 그 길로 밤차를 타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혹시나 하고 미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고, 나는 톡을 남겼다.
『집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내와 아들에게 모든 걸 얘기했어요. 아내는 이혼을 허락했고요.』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셨을 텐데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많이 야단맞았을 거 같은데 걱정돼요.』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는데, 미영 씨는 언제까지 저를 피하실 생각인 건가요?』
『당신과 하영이에겐 제가 필요해요. 서두르지 않을게요. 잘 생각해 보시고 마음이 정리되면 연락주세요. 기다릴게요.』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당신도 하영도.』
그녀는 톡을 모두 즉각 확인하고도 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결정 이건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기다리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어머니께는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아내나 산이를 통해서 알게 되시겠지만 먼저 알려드릴 생각은 없다. 미리 아시게 된다면 또 무슨 일을 꾸미실지 알 수 없다. 하긴 일을 꾸미려고 해도 내가 어디 사는지, 어디서 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시니 별다른 방법도 없겠지만. 여하튼 아내와의 이혼, 미영과의 결합. 무슨 일이든 일단락된 후에 그때 가서 알려도 알려야 할 것이다.
다음날(일요일) 오후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산아 어디니? 기숙사 들어갔니?”
-아뇨. 집이요.
“학교는?”
-선생님께 엄마가 몸이 아파서 이삼일 정도 등하교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 잘했구나. 네가 엄마 곁에서 좀 보살펴 드리거라. 네가 있다니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엄마는 좀 어떠시니?”
-어제는 밤새 우셨던 거 같아요. 오늘 일도 안 나가셨고, 식사도 전혀 안 하셨어요. 주무시는 건지 울고 계신 건지, 불러도 대답도 없고 방에서 안 나오세요.
“충격이 크셨을 거야. 아마도 말도 못 하게 화도 나셨을 거고, 넌 좀 어떠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일이라. 기분도 마음도 머릿속도 엉망이에요. 아빠가 없어진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아니야. 없어지는 게 아니야. 난 언제나 산이 네 아빠이고, 네게 아빠가 필요할 땐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다만 당분간 네 여동생인 아기와 그 엄마를 돌봐줘야 해서 자주 만나기 힘들 뿐이지. 넌 아빠의 최고의 보물이라는 거 잊지 마라. 아빠는 지금도 앞으로도 너와 엄마를 변함없이 사랑한단다.”
-네. 이해하려고 노력해 볼게요.
“고맙구나, 너한테 무거운 짐을 지워서 미안하다. 엄마 잘 좀 보살펴드려라. 믿는다. 아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다시 또 연락하마.”
-네.
아내는 내 앞에서는 담담한 듯 행동했지만, 상처를 크게 받았을 것이다. 말로 못 할 만큼 아팠으리라. 이십 년을 함께 한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외도로 아이까지 낳았으며 이혼까지 요구받았으니 오죽 아프고 고통스럽겠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 아내에게 이혼 서류를 보낸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 것이다. 아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후 때를 기다려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내와 아들, 미영과 그녀의 부모님. 모두가 시간을 가지고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한숨 돌리고 갈 필요가 있었고, 나 역시 마음을 정리하고 미영과 하영을 받아들여 돌볼 수 있도록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딱히 재산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집과 자동차, 약간의 저축 등은 모두 아내에게 남길 생각이었기에 미영과 처음부터 시작하려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야 했다.
일상으로 돌아간 후 미영에게 매주 톡을 남겼다. 여전히 답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할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어떻게 지내는지, 하영은 건강하게 잘 자라는지, 부모님은 잘 해 주시는지, 걱정과 애정, 그리움을 담아 글을 남겼다.
아내와 아들에게도 연락했는데, 아내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주로 아들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때(지난번 집에 갔을 때) 말로 다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미안한 마음 등을 담아 아내와 아들에게 몇 통의 편지를 띄웠다. 그렇게 두어 달이 흘러 계절이 바뀌었고 나는 어느새 겨울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사이 나는 보조 딱지를 떼고 정식 기사가 됐고,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보증금을 올려 방이 두 개인 좀 더 넓은 집으로 계약했다. 미영을 위한 나의 배려였다.
산이를 통해 아내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는지 한층 평안해졌다고 한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잘 지냈느냐고 물어보면 제가 나쁜 놈이겠죠. 미안해요.”
-잘 아시네요. 그래도 아주 잘 지낸다고 말해 주고 싶네요. 당신은 어때요?
산이 말처럼 많이 안정된 듯하다. 나는 본론을 바로 꺼내기로 했다.
“저도 하루하루 나아지려고 노력하며 그런대로 잘 지내요. 법원에 갈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어요?”
-언제요?
“당신 편한 시간을 알려주세요. 제가 맞출게요.”
-다음 주 월요일 어때요?
“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제가 모시러 갈게요.”
-아니요. 그냥 법원 앞에서 만나요. 그게 편해요.
“네. 그렇게 하죠.”
다음 주 월요일, 법원 앞에서 만난 우리는 협의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심리를 받고, 한 달의 조정 기간을 받았다.
법원에 다녀온 뒤, 이사를 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러 2017년 1월 말. 부산에서는 드물게 제법 굵은 눈발이 흩날리던 날 ‘판사 확인 기일’ 법원에서 이혼을 확인받고, 우리 부부는 햇수로 십구 년의 혼인 생활을 뒤로하고 법적으로 남이 되었다. 헤어질 때까지 아내는 말이 없었고, 밥이라도 먹고 가자는 내 말에도 고개만 가로저었다. 마지막 말인 듯 아내가 입을 열었다.
“잘 가요. 잘 살고. 딸아이도 잘 키우고... ”
“그렇게 멀리 가는 사람처럼, 다시 안 볼 사람 같은 인사는 하지 마요. 자주 보게 될 거예요. 당신과 산이는 여전히 내 1번이니까.”
그렇게 짧은 인사만 남긴 채 우린 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