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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춘희, 겨울에 피는 꽃
작가 : 최선영
작품등록일 : 2018.11.17

1950년대 '여성국극'이라는 가장 핫한 문화 아이콘이 있었다.
그 중심에 당대 최고 스타였던 한 여성 남장배우가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 치던 한국근대사처럼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60여년 만에 도착한 편지를 따라서, 사랑과 질투 그리고 여성국극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04. 춘희(1)
작성일 : 18-11-28 18:48     조회 : 239     추천 : 0     분량 : 4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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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호가 돌아가고, 유진은 사무실로 바로 출근했다. 그리고 편성이 취소된 다큐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꼬박 일주일을 일에만 매달렸다.

 

 정치적인 문제와 맞물려있던 다큐는 아무래도 세상에 내놓지도 못하고 이대로 묻히게 될 것 같았다. 유진은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은 후 대표에게 쉬겠다고 통보했다.

 

 다행히 대표는 할머니의 일과 함께 터진 다큐 때문인지 흔쾌히 쉬라고 했고, 그러면서 너무 오래 걸리지만 말아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회사를 정리하고 돈의동 한옥 마당에 들어서던 유진은 어느새 녹아 없어진 눈 때문에 그대로 땅 위로 노출된 동백꽃잎을 보았다. 바닥에 떨어져 이미 검붉은 색을 띄고 있는 동백꽃잎은 마당을 어지르고 있었다.

 

 유진은 동백꽃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툇마루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은 햇볕이 좋아 부모님 오시기 전에 청소를 해야겠다. 오랜만에 들어온 임여사의 방은 주인을 닮아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임여사가 병원에 입원한 후로 청소도 안 되어 있던 방이어서 뽀얗게 않은 먼지만이 주인의 부재를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유진과 임여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이 맞지 않아 다툼이 종종 일어났었다.

 

 그래서 장호와 떨어져 지내기로 했을 때에도 이곳으로 올 생각은 없었다. 임여사가 쓰러지지 않았고, 부모님이 아프리카로 자원봉사를 가지만 않았어도 유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부모님 댁으로 갔을 것이다.

 

 게다가 임여사는 고집 또한 엄청났다. 빌딩 숲 사이에 자리 잡은 이 낡은 한옥을 사겠다고 찾아오는 이가 꽤 있었다. 그때 팔았다면 아파트 몇 채는 족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여사는 가족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기다리 듯 평생을 돈의동 한옥에서 살았다.

 

 방안을 둘러보던 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된 집만큼이나 임여사의 물건들은 모두 낡고 오래된 것들뿐이었다. 유진은 낡고 쓸모없는 물건들을 선별해서 버렸다.

 

 그러다 방안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낡은 자개농을 쳐다봤다. 방주인과 다르게 화려한 자개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이 공간을 과거의 어느 시간에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유진이 자개농 문에 손을 대자 삐걱거리며 열렸다. 자개농의 크기에 비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여벌의 이불과 옷 그리고 앨범이 다였다.

 

 자개농에서 꺼낸 물건들은 장례식장에서 공순복에게서 들은 말들을 떠올리게 했다. 신줏단지처럼 고운 보자기에 보관되어 있던 것은 남자 양복이었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남자양복에 유진은 이것이 할머니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손으로 양복을 쓸어보던 유진은 상한 곳 없이 잘 보관되어진 모습에 살아생전에 임여사가 관리에 꾸준하게 신경 썼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왜 가족에게 국극배우라는 사실을 숨겼을까? 남장배우라서 그랬을까?

 

 할머니의 비밀스러운 삶이 걷잡을 수 없이 궁금해진 유진은 유품으로 남겨진 앨범을 넘겼다.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 할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만 보일 뿐 그 어디에도 할머니가 국극배우였다는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앨범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임여사 성격만큼 정갈한 글씨로 설명되어진 글이 적혀있었다. 글은 사진의 상황 등에 대해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의 육아일기 혹은 성장일기처럼 보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편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유진의 머리에 그 날 아침의 빛바랜 편지봉투가 떠올랐다. 유진은 자신의 방에 걸린 코트 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다시 편지를 임여사의 방으로 가져온 유진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봉투에서 나온 내용물에 유진은 잠시 멍해졌다. 적힌 날짜를 보니 이것이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63년 만이었다.

 

 유진은 이것을 할머니가 보셨다면 어떤 표정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이 편지를 할머니에게 전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유진은 앨범의 첫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증조할머니와 함께 찍은 앳된 모습의 임여사의 사진을 편지 속 내용물과 번갈아 쳐다봤다.

 

 *

 

 1940년 적산가옥이 즐비한 연곡(緣哭). 벚꽃이 흩날리는 기와집에서 판소리 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를 따라서 뒷방을 엿보면 꽃다운 나이의 열여섯 춘희가 맛깔스런 목소리로 읊고 있었다. 춘희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소녀였기에 스승으로 보이는 고수의 북장단은 절로 신이 나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대문에서 중년 여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이 판소리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권번(춤과 노래를 배울 수 있는 기생조합)으로 찾아온 춘희모였다.

 

 춘희모는 젊은 시절 연곡 일대에서 알아주는 기생이었다. 일찍 부모를 잃고 권번에 몸을 담아 세상 풍파를 겪은 탓에 딸 춘희만은 기생으로 키우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춘희를 보자마자 그 손을 잡아끌고 권번을 빠져나왔다.

 

 춘희 또한 엄마가 왜 그런지 알기 때문에 그동안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고 있었고, 기생이 아닌 예인으로 소리를 배우고 싶었다. 자신도 조금은 더 넓은 세상에서 즐거운 일들을 찾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춘희모는 내팽개치듯이 방으로 춘희를 밀어 넣고는 방문을 닫았다. 차라리 뭐라고 욕이라도 하면, 변명이든 항변이든 할 텐데 춘희모는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는 듯 춘희만을 방에 남겨두고 나갔다.

 

 다음 날, 춘희의 집으로 인철이 찾아왔다. 유일하게 춘희모가 춘희를 안심하고 내어주는 인물이자, 가장 경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인철은 연곡 제일가는 세도가의 장남이다. 춘희보다 다섯 살 많은 인철은 춘희에게 있어 저를 위로하는 오빠였고, 제게 글을 가르쳐주어 꿈을 꿀 수 있게 만든 스승이었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남자였다.

 

 엄마가 그러게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춘희가 엄마 몰래 무리를 해서 소리를 배우는 것 또한 이 남자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곧 이 곳 연곡을 떠나, 아니 조선을 떠나 머나먼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때문이다. 춘희는 내일이면 멀리 떠나는 그를 잡을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 터질 듯 한 이 마음을 어디에 둘 곳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더욱 소리에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철이 싸리문을 열고 들어오자, 부엌에서 마당으로 구정물을 내다버리던 춘희모는 가슴이 답답해왔다. 한낱 퇴물 기생 년에게조차 이리 깍듯하게 인사하는 인철의 모습에 마음을 내어준 춘희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손금 보듯 뻔히 알 수 있는 두 사람의 미래에 춘희모는 그나마 인철이 유학을 간다고 하니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서로의 연심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겠지만, 지금이라면 그 마음을 충분히 거둬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하게 둬야 할 듯해서 춘희모는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인철은 춘희모가 밖으로 나가자 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춘희의 방문을 아련하게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구나. 나는 오늘, 네 얼굴을 오랫동안 보고 싶은데 안보여줄 것이냐?”

 

 방안에서는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고요해서 그나마 몇 개 없는 세간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마치 텅 비어 있는 빈집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춘희야, 나는 말이다. 네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았으면 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연곡이 아닌 다른 곳에서 널 보고 싶어.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이 모두 네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에서 널 보고 싶다.”

 

 인철의 목소리가 설핏 떨리는 듯싶더니, 방문 너머에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춘희야, 그래서 나는 내일 가야만 해. 너에게 그런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네가 좀 더 자유롭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 나는 떠나기 전에 네 얼굴을 보고 싶구나.”

 

 그러고도 방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인철은 방문을 향한 시선을 바로 가져와 주머니 안쪽에 손수건으로 고이 싼 것을 꺼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방문이 끼이익 불편한 소리를 내며 슬쩍 열렸다. 그러나 아직 마음이 다 동한 것은 아닌지, 문이 반도 채 열리지 않았다.

 

 “얼굴은 안보여 주는 것이냐?”

 

 인철은 이미 춘희가 어떤 마음인지 다 알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얼굴은 내밀지 않고,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은 예쁘지 않아서 보여주기 싫습니다.”

 

 “너는 내게 늘 예쁘다. 그런데 나는 네게 예쁘지가 않은 사람인가보구나.”

 

 “그게 아니에요. 지금은 제가 예쁘지 않습니다.”

 

 인철은 안에서 들려오는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꺼내놓은 손수건을 펼쳐 그 안에 든 사진을 쳐다보았다. 지난번 사진사가 마을에 찾아왔을 때, 찍었던 사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구나.”

 

 춘희는 인철의 말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이 농담인줄 알면서도 서운함이 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인철은 보지 않아도 지금 춘희의 입술이 삐쭉이고 있음을 알아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인철은 사진 속 춘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웃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문 것이 여간 성깔 있어 보이는 게 아니다. 이것은 오래오래 남는 것이라는데, 나는 네 고운 얼굴이 이렇게 성깔 있는 얼굴로 내게 기억될까 걱정이 되는구나.”

 

 인철은 춘희가 여전히 기척도 내지 않고,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자 사진을 열린 방문 틈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이제 나는 가봐야겠구나. 언제 볼지 모르니 그리 울지만 말고 씩씩한 여성이 되어라.”

 

 제 할 말을 끝낸 인철이 방문을 쳐다보고는 툇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방문 너머에서 숨죽이듯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가의 말
 

 춘희는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재창조된 이야기 입니다. 춘희의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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