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은 선준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주현의 부탁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변명할 수는 없었다.
“주현아... 조금 더 쉬고 와. 부스는 재찬이랑 둘이 지키고 있을게.”
“아니... 나도 같이 가.”
지운은 선준과 주현이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먼저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주현이 지운을 따라나섰다.
“그래? 그럼 가자.”
지운이 선준을 슬쩍 바라보고 밖으로 나갔다. 선준은 지운의 뒤를 따르는 주현의 뒷모습을 보다가 주현이 먼저 노골적으로 자신과 둘이 있는 상황을 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슬슬 화가 났다.
‘지운이랑 둘이 있는 건 괜찮은 건가? 그건 그렇고 왜 지운이 어깨를 잡고 있었을까? 설마 주현이가 지운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주현과 지운의 행동에 선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답답해서 안 되겠어.”
선준은 왜 자신을 피하는지 주현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선준이 부스에 돌아오자 재찬과 지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린 잠깐 다른 부스 좀 갔다 올게.”
데이트가 있었던 재찬과 지운이 부스를 떠났고, 좁은 부스에는 주현과 선준만 남게 되었다. 선준은 지금이 기회다 싶어 주현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얼굴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길게 줄을 섰다.
“와!! 너 키 진짜 크다. 어깨 각도도 장난 아닌데. 고등학생이야?”
여자의 카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든 선준이 고개를 들어 올려 위를 보았다. 황금빛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몸매가 드러나는 베이지색 니트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는 흥미로운 듯 선준을 보았다. 선준이 표정을 굳히고 짧게 대답하지 않자 여자가 피식 웃었다.
“저...”
“얼굴도 작고 비율도 좋아서 모델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쪽에 관심 없어?”
여자는 앞에 있는 주현의 말을 무시하고 옆에 앉은 선준에게 다시 물었다.
“네. 생각해본 적 없어요.”
“아쉽네.”
“그리고 뒤에 줄 서 있는 거 보이죠? 페인팅하실 거예요?”
선준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줄을 가리켰다. 냉랭한 선준의 반응에 여자의 붉은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할게. 하면 되잖아. 여기 앉으면 되지?”
“네.”
“여기에 그려줘.”
주현의 앞에 앉은 여자가 손가락으로 오른쪽 볼을 톡톡 쳤다. 진한 붉은색 손톱 위로 빛을 머금은 비즈가 반짝였다. 주현이 왠지 모를 위압감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어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주현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응. 갔다 와.”
휴대전화를 확인한 선준이 주현에게 말하고 급히 일어나 부스를 나갔다. 부모님께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선준이 부모님께서도 오늘 판매를 하신다고 했지.’
“너 쟤랑 친해?”
“네? 네.”
여자는 선준이 나가자 바로 주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나 쟤 마음에 드는데 전화번호 알려줄래?”
눈을 가늘게 반달 모양으로 뜨며 방글방글 웃는 여자였다.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선준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 누나는 선준이랑 사귀고 싶은 건가? 선준이가 다른 사람이랑 사귄다고...? 싫어... 그건 싫어...’
“...그건... 안돼요.”
제법 단호한 주현의 목소리에 여자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하긴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친구한테 물어봐서 뭐하겠어. 곤란하게 해서 미안.”
주현의 거절에도 여자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사과했다. 고작 몇 년 차이지만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연예인처럼 예쁘고 키도 커 선준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따끔. 그 생각에 가슴이 아픈 주현이었다.
“저 흰색 물감이 모자라서 그런데 잠시만 계세요. 금방 가지고 올게요.”
“응. 그래.”
주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부스 뒤쪽으로 나갔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다가 옆에 놓인 주현의 휴대전화를 힐끗 보았다.
부스 뒤로 온 주현은 가져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여러 색의 물감 중에 흰색만 보이지 않았다. 분명 넉넉하게 챙겨왔었지만 마음이 복잡하니 집중하기 어려웠다.
‘선준이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생각이 나는 주현이었다.
“정신 차려. 요주현. 그렇다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주현은 머리를 강하게 흔들고 물감을 찾았다. 바로 앞에 있는 물감을 들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주현을 보며 생긋 웃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여자의 대답에 주현이 가져온 흰색 물감을 팔레트에 짰고,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완성했다.
“어머, 잘 그렸다. 고마워.”
“아니에요.”
여자가 그림을 확인하고 의자에서 일어서는데 부모님 부스에 갔었던 선준이 돌아왔다.
“아참, 그림 말고도 고마워할 게 생길지도 모르겠으니 미리 인사할게. 고마워.”
“네?”
“그럼 안녕.”
주현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여자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부스를 떠났다. 선준이 미간을 구기고 주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근데 너 왜 다시 왔어? 부모님 두 분이 하셔도 돼?”
“응? 응... 여기서 너 도와줄게.”
“난 괜찮은데...”
주현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기뻤다. 조금이라도 더 선준과 함께 있고 싶은 주현이었다.
‘같은 대학교로 가면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아까의 여자처럼 선준에게 호감을 느끼는 여자들이 많아지면 어떻게 할까 상상한 주현은 무심결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대학교 가면 여자친구 사귀겠지?”
앗. 주현이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뭐? 그렇겠지...”
주현은 담담한 선준의 대답에 가슴이 아렸다. 시무룩 해하는 주현의 표정에 오히려 짜증이 난 선준이었다.
“그러는 넌? 넌 여자친구 안 사귈 거야?”
반대로 선준이 주현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어딘가 화가 난 듯한 선준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주현의 가슴을 찔러왔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꽉 물고 눈물을 참았다.
“...좋은 사람 만나면 사귈 거야.”
주현은 감정을 억누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선준의 표정이 더욱 무섭게 굳어졌다.
‘역시 지운이를 좋아하는 건가?’
“너 혹시 지운이 좋아해?”
갑자기 튀어나온 선준의 질문에 주현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주현이 대답을 못 하자 선준은 주현이 지운을 좋아하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참기 힘든 화가 가슴속에서 솟아났다.
“너 남자 좋아하냐고?”
격앙된 목소리로 다그치는 선준의 질문에 주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주현은 자신이 선준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환멸을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렸다.
‘선준이는 정말 싫어하는구나. 절대 내 마음을 들키면 안 돼. 지운이랑 재찬이 사이도 말하면 안돼...’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는 주현의 모습에 선준은 주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주현의 턱을 잡고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주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짜 지운이를 좋아하는 거야? 왜 말을 못 해?”
“누가 지운이를 좋아해? 주현이가?”
선준은 뒤에서 들린 재찬의 차가운 목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