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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두 번째 첫사랑(화양연화)
작가 : 정연일
작품등록일 : 2018.11.15

6인(人) 6색(色)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건실한 직장인이자 가장이었던 강하늘. 대우조선 사태로 정리해고를 당하고 방황하다 알코올 중독자가 된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다가온다.
‘나는 가정이 있는데….’

유명 사립대 교수로 젊은 나이에 성공과 실패를 맛본 김미영. 좌절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된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
‘난 친구보다 가벼운 연인이 필요해….’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일을하며 가정을 꾸려가던 신수아. 오직 남편과 아들, 가족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녀에게 닥친 또 다른 시련.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방황하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윤명희.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아들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외도는 크나큰 죄악이야….’

아빠의 부재가 늘 안타까웠던 아들 강 산. 어느 날 아빠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아빠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 한다.
‘내게 여동생이 생겼다고?’

그리고 2049년의 그의 딸 강하영.

여섯 명이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 가족의 이야기.

 
1부. 나의 이야기(8화)
작성일 : 18-11-28 09:35     조회 : 306     추천 : 1     분량 : 8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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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한 달이 흘렀고 일도 사람들도 조금씩 적응해가는 중이다. 첫 급여를 탄 기념으로 어머니와 아내, 아들에게 적은 돈이지만 용돈을 조금씩 송금하고 전화를 드렸다. 새로운 직장에 잘 적응하고 있고, 단주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생활도 잘하고 있노라 했다.

  퇴근 후 월급날을 맞아 열린 회식 자리에 얼굴도장만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수(선임) 승현은 첫 회식 자리인데 어떻게 그냥 가느냐며 붙잡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위험한 자리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니까. 평생을 이렇게 술자리를 피하며 살 순 없겠지만, 거절하는 법을 익힐 때까지는 일단 피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와 클래식 음악을 틀고 아메리카노를 한 잔 타 마시며, 그녀에게 톡을 남긴다.

 

  『첫 월급을 받았어요. 가족들에게 용돈을 조금 송금하고,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를 사양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한잔 타 놓고 미영 씨를 생각하며 이렇게 글을 써 봅니다. 오늘 같은 날 함께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면 참 좋을 텐데... 하면서요. 이제 유월 중순이라 낮에는 벌써 여름처럼 덥지만, 저녁이면 산책하기 알맞은 공기예요. 저는 저녁을 먹고 한 바퀴 돌아볼까 생각 중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두 번째 읽고 있어요. 언젠가 보았을 때는 깊이 생각하며 읽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나의 삶의 무게를 돌아보고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 참 좋네요. 미영 씨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만, 여쭙지는 않을게요. 언젠가 이 그리운 마음도 추억으로 기억될 날이 오겠지요. 그때까지 이렇게 읽어만 주세요. 그거면 족해요. 고마워요. - 당신의 벗. 하늘 -』

 

  그리고 노래를 한 곡 보냈다. 김동률의 ‘답장’이라는 노래. 얼마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였는데, 마치 내 마음 같던 노랫말에 가슴이 저릿했었다. 그녀가 이 노래를 듣고 내 마음을 조금은 알아주었으면 하며.

  매트리스에 기대어 앉아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었다. 한 시간쯤 흘러 일곱 시가 다돼갈 즈음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고 일어서는데 ‘까톡’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나와 SNS를 하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기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집어 들고 확인했다. 역시나 미영(sweet heart)이였다.

 

 ※ 『 』 = 톡, ( ) = 하늘의 생각

 

  『노래 좋네요. 하늘 씨 마음인가요?』 (언젠가는 답을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놀랐어요. 어떻게 지냈어요?)

  『네.』 (그래요. 그래서 보냈어요. 그 노래.)

  『전에 물었었죠. 다시 물어볼게요. 하늘 씨 저 사랑해요?』 (뭐라 답해야 하나….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네요. 거짓말이니까.)

  『.....』

  『전에 답했듯 감정은 맞는데, 역시 자인은 못 하겠나요? 입장 때문에?』 (콕 집어 답을 말해버리네요.)

  『미안해요.』 (이말 밖에 할 말이 없네요.)

  『상관없어요. 그리고 하늘 씨가 부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잘 알아요. 하늘 씨 인생에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아요. 부담이 되고 싶지도 않고요.』 (갑자기 걸림돌, 부담. 이건 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무슨 일 있어요?)

  『하지만 저도 더이상 감추고 있을 수만은 없네요. 배도 많이 불러오고, 가족들에게 숨기는 것도 한계예요.』 (배가 불러온 걸 지금껏 감춰왔다는 말은... 오.하느님... 설마 했는데...)

  『병원은 다녀오셨어요? 둘 다 건강한 거죠?』

  『네. 딸이에요.』 (딸…. 좋긴 한데. 지금 이 일을 기뻐해도 되는 걸까?)

  『혹시, 지난번에 필요하다던 돈. 이 일 때문이었나요?』 (그때 왔던 ‘촉’이 그냥 온 게 아니었네요.)

  『네. 지우려고 했었어요.』 (돈 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아닌가. 지웠다면 차라리 미영 씨에겐 나았을지도….)

  『그런데, 마음을 고쳐먹었군요.』 (일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날 용서해요.)

  『저, 이 아기. 하늘 씨 아이 낳고 싶어요. 도와줘요. 출산 때까지만, 그 뒤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부담 주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말해줘서. 손 내밀어줘서. 당연히 도와야죠. 부담 줘도 괜찮아요. 이제 나에게 당신과 아기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생겼으니.)

  『지금 어디예요? 일단 만나요.』 (만나서 얘기해요.)

  『집이요.』 (바람처럼 날아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한 시간 후에 봐요. 집 앞에서 전화할게요.』 (그녀의 집 앞에서 커피숍을 본 적 있다.)

  『네.』

 

  대충 걸쳐 입고 날 듯 큰길까지 달려가서 택시를 잡아타고 ‘마산 합포 갑시다’하고 외쳤다. 기사는 장거리에 신이 났는지 뒤를 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출발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가슴도 복잡하다. 지금의 상황을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을는지 안타까우면서도 아기를 품고 있어 줘서 고맙기도 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북받치듯 휘몰아치고, 한 편으론 아내가 떠올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일단은 당장 그녀를 만나면 뭐라 말해야 할지, 그것부터 더듬어 보았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다.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하고 심란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가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생각에 다시 집어넣고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초조하면서도 설렜다. 참 희한한 마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깐의 기다림이 아주 길기도 했고 매우 짧게도 느껴진다. 매우 혼란스럽다는 뜻이리라. 문이 열리고 그녀가 보이자 나는 자동인형처럼 벌떡 일어섰는데, 그 바람에 테이블을 건드려 커피가 약간 넘쳤다.

  넉 달 만에 보는 그녀는 여전히 예쁘다. 그러나 얼굴도 몸도 그때보다 많이 부어 보였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녀 역시 어색한 미소를 잠시 지으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지 이내 굳은 표정이 되어 내 앞에 섰다. 그녀에게 물어 커피를 주문해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었죠... 미안해요...”

  “아니요.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하늘 씨가 잘못한 거 없어요.”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고, 나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도 미안해요. 고맙고.”

  “뭐가 미안하고, 뭐가 고맙다는 거죠?”

  “혼자 힘든 일을 겪게 해서, 곁에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아기를 지우지 않고 품고 있어 준 게 고맙고 또 저를 믿고 기다려 준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다려 줬고 연락해 줬고 그 사실을 알려준 게 고마워요. 말로는 다 못할 복잡한 마음인데 표현하기 힘드네요.”

  “오히려 제가 하늘 씨한테 고마워지네요. 지우지 않은 걸 고마워하시니, 제가 생각했던 하늘 씨다워서요.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왜 지우지 않았느냐고 남자가 화를 내야 당연할 거라 생각했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입장을 바꿔봤죠. 내가 하늘 씨라면 어땠을까... 두려웠을 거 같아요. 억지로 지우라고는 못 했겠지만 지우길 바랐겠죠. 이 아이로 인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의 짐이 되거나 고통의 씨앗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매우 소중하죠, 나의 가족. 하지만 생명이 먼저예요.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어요. 하물며 하늘이 내려준 나의 혈육인데, 어떻게 내 행복을 위해 생명을 해할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짐승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네. 그래요. 그럴 것 같았어요. 당신은. 사실 하늘 씨는 여느 사람들과 조금은 다를 거라는 기대. 했었어요. 그래서 알린 거고, 도와달라고 한 거예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출산 때까지만 도와줘요. 그 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낳기로 결정 한 건 저예요. 제가 책임질 일이에요. 하늘 씨에게 짐을 지우진 않을 거예요.”

  “아니요. 미영 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기가 미영 씨 혼자만의 아기가 아니듯. 함께 하게 될 거예요. 제 삶이 조금 전 당신과 아이를 향해 방향을 살짝 틀었거든요.”

  “부인과 아들은 어쩌구요. 저는 그렇게까지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솔직히 하늘 씨에 대한 믿음도 확신이 없어요. 지금 제게 확실한 건 아기뿐이에요.”

  “이해해요. 미영 씨 마음. 지금까지도 늘 실망만 줬으니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이젠 다를 거예요. 아시다시피 저 독립했거든요. 그리고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집사람이 별거를 선언했어요. 뭐 말하기 전에도 별거 상태였지만, 지난겨울 집에 갔을 때 아내가 당분간 따로 지내기를 원하더군요. 그래서 그러기로 했어요.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미영 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임신을 알기 전에는 일자리나 일감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친구들 만나러 다니고 했어요. 그러다 몸이 이상해서 테스트를 해봤더니 두 줄이더군요. 산부인과에서 검사받고 그 후로 정기검진 때 외에는 거의 집 밖으로 안 나갔어요. 주로 방에서 지냈죠. 번역 일 하면서. 그런데 몸이 너무 불어서 부모님께 더 이상 살이 쪘다는 핑계로 둘러댈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일하러 간다고 했어요. 서울 친구 집에서 당분간 지내려고요. 출산 때까지.”

  “그럼 혹시 저랑 같이 지내실 생각은 없으세요? 작은 원룸이라 다소 불편하겠지만 눈치 볼 사람도 신경 쓸 사람도 없으니 마음은 편히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아무도 제가 사는 집을 몰라요. 어머니도 아내도 회사 동료들도. 혹시나 해서 주민등록 이전도 안 했어요. 유령이죠.”

  “사실 제가 도와달라고 연락 드린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원래 서울로 갈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친구에게 말해야 하고, 분명 친구들과 지인들 사이에 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게 되겠죠. 솔직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어요. 먼저 그렇게 말해 주니 제 마음이 편하네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미영 씨가 저의 집에 와 주신다면 제가 고맙죠. 언제 오실 수 있어요? 제가 모시러 올게요.”

  “그럼 주말이 좋겠네요. 하늘 씨 쉬는 날.”

  “그래요, 그럼. 모레 오전에 올게요. 몇 시쯤?”

  “열 시가 좋겠어요.”

  “그래요. 모레 오전 열 시. 연락드릴게요. 저 일찍 출근해야 해서 이제 가봐야 해요. 긴 이야기는 우리 집에 와서 나눠요.”

  “네. 고마워요. 모레 봐요. 준비하고 있을게요.”

 

  열 시가 가까운 시간 긴장한 채 만났던 그녀의 얼굴이 이제야 환하게 웃는 얼굴이 되었다.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들여보낸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건너뛰었는데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아 그냥 대충 씻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비로소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문제의 심각성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하는 이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일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만약 내가 미영과 아기를 선택하고 돌보게 된다면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겠지? 아니라면 미영의 말 대로 출산 후 미영과 아기를 보내야 하나?’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다녔고, 난 아무런 답도 찾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일을 하면서도 온종일 미영과 아기 그리고 아내와 아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생각을 거듭하다. ‘내가 혼자서 무언가 어떻게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미영과 함께 머리를 맞대보고, 그다음 아내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상의를 해봐야지. 아내는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니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을 마무리했다.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으나 험한 꼴을 당한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 먼저 직접 얘기하고 욕을 하면 들을 것이고 때리면 맞아야겠지, 그리고 상의를 해 봐야지. 어머니께는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 하리라.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으므로.

 그런데 아내가 화를 내긴 할까? 화를 낸다는 건 상대에게 애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던데,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서로 애정을 표현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다. 아니다. 내가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듯 아내 역시 나를 사랑한다. 표현하지 않을 뿐,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아내를 배신한다면 아내는 크게 충격을 받겠지. 나의 이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아. 이 죄 많은 인간을 어찌할꼬.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아내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나의 사랑은 또 어떤 사랑일까? 미영의 사랑은 또 어떤 것일까...?)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안 청소를 말끔히 하고 탈취제도 좀 뿌렸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대부분 그렇듯 좀 어수선하고 홀아비 냄새가 날 것 같아서.

  여덟 시에 집을 나서 예약해둔 쉐어링카를 몰고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아홉 시 십 분.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 들고 차에 앉아서 라디오를 켰다.

 아홉 시 사십 분,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준비해서 나오세요.』

 

  십 분도 안 돼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그녀가 현관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고, 현관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그녀를 배웅한다. 그녀는 큰길 쪽으로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톡을 보냈다.

 

  『어머니께서 보고 계시네요. 따라갈게요. 쭉 걸어가세요.』

  『알고 있어요.』

 

  잠시 후, 그녀를 따라가 트렁크에 짐을 싣고 그녀를 태우고 벨트를 매주며 물었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요?”

  “아홉 시 삼십 분쯤 마당에서 봤어요. 차 안에 앉아있는 하늘 씨. 언제부터 기다린 거예요?”

  “아홉 시요. 식사는 했어요?”

  “대충요.”

 

  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표정 뒤에 그림자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부모님을 속이고 나의 집으로 오는 것이... 집으로 오는 길. 나는 대형마트로 차를 몰았다.

 

  “집에 라면밖에 없어요. 장을 좀 봐서 들어가요. 살 것도 하나 있고.”

 

  우린 카트 하나 가득 장을 봤다. 대부분이 그녀의 먹거리와 생필품들이었다. 그리고 전자제품 매장으로 올라가자 그녀가 묻는다.

 

  “뭐, 사려구요?”

  “집에 TV가 없어요. 심심하실 거예요.”

  “저도 일거리 가져왔어요. 노트북도.”

  “그래도 심심하실 거예요. 저 혼자라면 몰라도 둘이라면 필요할 것 같아요.”

 

  우린 크지 않은 것으로 TV를 골랐다. 내가 계산을 하려 하자 그녀가 말했다.

 

  “저도 집에서 일해요. 번역 일. 저도 돈 있어요.”

 

  결국, TV는 내가 계산했고, 식료품은 그녀가 계산했다.

  집에 돌아와 그녀는 짐을 대충 정리하고 나는 TV를 설치했다. 오후 한 시가 다되어 우리는 점심 식사를 준비했는데 그녀의 요리 솜씨는 현란해서 마치 주방장을 연상시켰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전공이 미술사이고 전직이 대학에서 미술사학 가르쳤던 거 맞아요? 요리사 아니구요?”

  “좋아해요. 요리하는 거.”

 

  식사를 마치고 난 설거지를 했고 그녀는 내가 읽는 책들을 뒤적거렸다. 설거지가 끝난 후 난 그녀를 욕실로 데리고 가 양변기 위에 앉히고 대야에 따듯한 물을 받아 그녀의 발을 담갔다. 예전 그녀의 발보다 통통하다. 살이 붙었고 붓기도 있는 듯해서 손으로 꾹꾹 눌러 마사지를 하며 그녀에게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때, 돈을 보냈다면 지웠을까요? 아기.”

  “모르겠어요. 그때 톡을 보낼 때는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왜 생각을 고쳐먹었나요? 그때 난 병원에 갇혀있어서 미영 씨로서는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행방불명 상태였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낳으려고 한 건지 궁금해요. 진심으로.”

 

  내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테스트기로 임신을 확인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어요. ‘지워야 한다’ 날 위해서도 하늘 씨를 위해서도 그래야만 한다, 고. 그래서 수술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거고요. 그리고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어요. 아기의 뛰는 심장을 보고 그 소리를 들었죠. 병원을 나서면서 깨달았어요. 이미 생명을 부여받아 사력을 다해 뛰는 저 심장을 내가 임의로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문득 이 아이라면 내 인생이 바뀔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신이 내려준 축복이나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전에 말했듯 저는 결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아이는 꼭 갖고 싶었거든요. 하늘 씨 생각이 났어요. ‘그래, 그 사람의 아이라면 낳아도 좋겠다. 아니 낳고 싶다.’ 그렇게 마음먹었지요.”

 

  나는 그녀의 발에 비누칠을 하고 문지르며, 조용히 듣고는 말했다.

 

  “저 같은 남자라…. 잘 모르시나 본데, 저 참 못난 사람이에요.”

  “아뇨 좋은 사람이에요. 저도 많은 사람을 만나 봤지만, 하늘 씨 같은 남자 아주 드물어요.”

 

  샤워기로 그녀의 발을 헹구고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다 됐어요.”

 

  그녀는 내 뺨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입을 맞추곤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요.”

 

  매트리스 위로 가서 드러누우며 ‘아! 개운해’라고 크게 말하고는 TV를 켜 클래식 음악채널에 맞춘 다음, 소리가 없었다. 대충 씻고 나가보니 그녀는 잠이 든 듯했다. 어제 잠을 못 잔 건지 임신 때문에 그런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몹시 피곤했던 듯 순식간에 곤히 잠들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나는 그 옆에 누워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작가의 말
 

 항상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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