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원서 공원
“우리 아빠 키를 내가 크게 만들 수 있어?”
나 돌은 그러고 싶었다. 종운은 십 센티만 더 컸어도 세상을 바꾸었을 거라고, 늘 아쉬워했었다. 수복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마도 힘들 걸, 아직은 공력이 한참 모자라서 힘들어요.”
“나중에는 가능해요?”
“존댓말 쓰지 마세요, 할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요.”
수복은 나 돌에게 공손히 말을 올렸다. 종운은 엄청 기분이 좋았다.
“집에 들어가자, 들어가서 형제의 결의를 다져야지.”
“아빠, 제가 공력이 올라가면 크게 해줄게.”
“당근이지, 아빠도 너처럼 커지면 세상을 다시 사는 기분일 거야, 좋지?”“응, 이상하지만, 좋아!”
종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민지의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세 사람은 다정하게 나란히 서서 아파트로 들어갔다. 민지는 벽에 걸린 단군영정 앞에 음식을 거하게 차려 놓았다. 음력 가경절이 나 돌의 생일이라고, 나 철 종사님이 승천하신 날이라고 설명했다. 민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세 사람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너희는 형제의 연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죽는 날까지 변함없는 우정으로 함께 하라는 나철, 서일 종사님의 뜻을 받들어라, 나종운, 김민지가 증언하노라!”
종운이 두 사람에게 하얀 사발에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민지가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들었다. 나 돌이 잔을 들어 수복의 잔과 부딪쳤다.
“형님이 먼저 한 잔 하세요.”
“형님은 무슨, 미안하게.....”
수복의 형님이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어색했다. 민지가 거들었다.
“할아버지 뜻이니 그대로 하는 게 맞아, 형님은 거리감 있으니까 형이라 불러, 그리고 나한테는 어머니라고 불러, 수복아!”
민지가 웃으면서 두 사람의 서열을 정해 주었다.
“나는 아빠라고 불러,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하여!”
종운이 잔을 들면서 ‘위하여!’를 외쳤다. 나 돌과 수복이 잔을 부딪치고 막걸리를 마셨다. 민지가 들고 있던 김치를 내밀었다. 수복이 수줍어서 망설이자, 민지가 입 앞에 내밀었다. 수복이 웃으며 받아먹었다. 나 돌이 막걸리 잔을 민지에게 주고는 수복에게 따르라고, 병을 주었다. 수복이 수줍게 웃으며, 민지가 든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그러면서 막걸리 상자에 빈병이 가득 채워졌다.
“형, 술도 올랐는데 우리 집에서 자자!”
수복이 일어나며 나 돌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다. 종운과 민지도 같이 가라고 나 돌을 밀었다. 민지의 집을 나온 수복은 나 돌에게 한 잔 더 하자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 돌은 태어나서 두 번째 마신 술이 올라, 계단을 내려가면서 휘청거렸다.
*..*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창덕궁 옆에 있는 현대 본사 건물 옆, 원서 공원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기 전에 막걸리 한 병과 과자를 준비해 왔다. 원서 공원 한가운데 큰 나무 앞에 섰다. 큰 나무 주변에는 석자 정도의 쇠막대를 이어서 사각형 가림막으로 막아 놓았다.
“나 철 종사님이 단군교를 중광하실 때 제를 올린 회화나무야, 알지?”
“응, 전에 아빠랑 왔었어..... 오늘은 회화나무가 그때하고 다르다.”
수복이 쇠울타리를 넘어 회화나무 밑, 조그맣고 넙적한 돌 위에 종이컵을 놓았다. 나 돌에게 들어오라고 눈짓을 했다. 나 돌은 종이컵을 들고, 수복은 막걸리를 따랐다. 막걸리를 돌 위에 올려놓고 두 사람이 네 번 절 했다.
“할아버지 수복이 왔어요, 돌이 형이랑 같이 왔어요....”
“저도 왔어요, 서일 할아버지....”
수복과 나 돌이 정중하고 진지하게 인사를 올렸다. 나 돌은 수복의 할아버지인 서일에게 먼저 인사를 올려 고마움을 전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치자, 바람도 없는데, 회화나무가 흔들렸다. 둘은 놀라서 서로를 보았다.
“뭐지?”
“형이랑 온 줄 아시나 봐요.”
두 사람이 올려 보는데, 옆으로 뻗은 회화나무 가지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꺾였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나 돌이 종이컵에 막걸리를 따르고, 수복이 받았다.
“종사님 돌이 형이랑 조국을 지키겠습니다.”
“종사님 통일을 위해 수복이랑 힘 합쳐 일하겠습니다.”
막걸리를 올리고, 네 번 절을 올렸다. 또 회화나무가 흔들렸다. 옆으로 뻗은 가지가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꺾였다. 두 사람은 나무가 부러지는 걸 보고, 놀란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전에는 이런 일은 없었는데....”
“잘 하라는 계시겠지, 우리가 온 걸 알고 있다고 표시 내는 건가 봐.”
나 돌과 수복은 나무가 부러진 것을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기는지 보려고 한참을 서 있었다. 회화나무는 꼼짝도 안했다. 원서 공원을 나온 두 사람은 헌법 재판소 쪽으로 올라갔다.
나 철이 단군교를 만들고 포교를 하자, 신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일제는 단군이라는 단어사용을 불법이라며 단군교를 탄압했다. 나철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려고,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나 철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총본사로 사용하던 건물이 길가에 있었다. 그 건물 앞에는 서울시에서 세워놓은 책자 크기의 기념비가 박혀 있었다.
“너무 초라해....”
나 돌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몸 바친 독립군의 본산지를 알리는 초라한 팻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팻말에는 대종교 총본사 건물이었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기념비 앞에서 또다시 절을 네 번 올렸다. 수복이 다정하게 지나가는 20대 연인을 불렀다.
“어이, 사진 쫌 찍어줘라.”
마른 체형에 긴 머리를 옆으로 넘긴 캐주얼 차림의 남성은 수복이 부르자, 돌아서 왔다. 빨간 스커트에 노란 긴 머리가 눈에 띄는 늘씬한 여성은 남성이 하는 걸 보고 섰다.
“사진요?”
남성은 웃으며 일어로 물었다. 수복이 남성의 일어를 듣고 갸웃거렸다.
“쪽바리? 겁 없이 쪽바리가 야밤에 돌아다녀, 이름이 뭐야?”
수복은 다짜고짜 여성의 이름을 물었다. 여성은 큰 덩치의 수복의 화난 목소리에 놀라서 머뭇거리며 남성을 쳐다보았다.
“안 미옥 인데요, 왜요?”
“쪽바리랑 다녀서 물었다, 다니지 마.”
일본 남성은 수복의 말투와 얼굴에서 미옥이라고 밝힌 여성과 안 좋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일본 남성이 여성에게 물었고, 여성이 대답을 했다.
“싸가지 없는 쪽바리가 어디서 욕지거리야!”
수복이 일본 남성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격했다. 얼굴을 맞은 남성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여성이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했다.
“경찰이지요, 사람을 막 패고 있어요, 예, 빨리 오세요.”
수복이 여성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쓰러졌던 일본 남성이 미옥을 데리고 가려고 팔을 잡아당겼다. 수복이 남성의 옆구리를 발로 가격했다. 윽! 일본 남성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미옥이 겁에 질려 울면서, 정신 차리라며 남성을 흔들었다.
“하지 마, 왜 사람을 때려...”
나 돌은 수복의 느닷없는 행동을 난감한 표정으로 말렸다. 수복은 말리는 나 돌은 개의치 않고, 쓰러진 남성을 발로 찼다.
“쪽바리,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쪽바리 나라로 가!”
수복의 발길질을 미옥이 몸으로 막았다. 수복은 미옥이 막자, 발길질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왜 쪽바리랑 다녀, 다니기를.....”
“왜 이러세요, 그만하세요, 사람 죽겠어요, 제발!”
수복이 여성을 때리지 않는다는 걸, 수복의 행동으로 알게 된 미옥이, 악을 썼다. 안국동 쪽에서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왔다. 수복이 경찰차를 보고는 나 돌에게 어쩔 건지 눈으로 물었다. 나 돌은 더 있으면 골치 아프게 생겼다고 판단하고, 수복의 손을 잡고 경찰차와 반대쪽으로 뛰었다.
“뛰어!”
뒤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렸다. 나 돌과 수복은 어둠이 깔린 길을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산으로 난 길을 창덕궁을 오른쪽으로 끼고 뛰었다. 나 돌은 제법 멀리 뛰었지만, 몸이 훨씬 가벼워 힘들지 않았다.
“아무리 일본 사람이라도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지, 왜 그랬어?”
“그냥, 일본말만 들으면 뚜껑이 열려서, 또 그럴지도 모르는데 어쩌지.....”
나 돌이 핀잔을 주자, 수복이 미안한 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 돌은 또 그럴 걸 걱정하는 수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참아, 국가 일본을 상대로 하는 거지, 사람을 때리는 건 아니잖아.”
나 돌이 정색을 하자, 수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저절로 반응이 그래요, 한 두 번도 아닌데, 아마도 술기운 때문인가 봐요.”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존댓말을 쓰면 내가 미안하지, 술 마시면 그래?”
“응, 전에 주차장에서도 그랬잖아, 이유 없이 남을 괴롭히면 재미있어... 미안...”
“술 마시지 마, 그럼 되지.”
나 돌은 주차장에서의 일도 수복의 술주정인 걸 알게 되었다. 수복은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술이 맛있잖아, 조금만 마실게, 형이랑 있을 때만.”
“내 앞에서만 그런다고?”
“형 없었으면 쪽바리는 죽었어, 형 덕분에 그 정도로 끝난거지.....”
수복은 일본 남성을 봐 주고 온 걸 진짜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수복이 진짜 사람을 해친다고 마음먹으면, 누구도 당할 자가 없을 거였다.
“술은 자제하면 좋겠다.”
나 돌은 담담하게 수복에게 부탁조의 말을 던졌다.
“노력해야지, 형이 말리는데..... 아무도 나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거든.....”
“부모님은 어디 계셔?”
“아버지는 열 살 때 돌아 가셨어, 무술에 욕심이 너무 많아서 수련을 하시다가 절명하셨고, 엄마는 어디 갔는지 몰라, 내가 중학교 입학 하던 날 같이 갔다가 오는 길에 자장면 사주고 어디론가 갔는데..... 혼자 컸어, 아버지가 가르쳐 준 무술 덕분에 태권도장에서 애들 가리키면서 무술만 했어...."
나 돌은 어려웠을 수복의 성장기를 상상했다. 그 와중에 혼자 엄청난 무술을 익힌 수복이 존경스러웠다.
“어디서 컸는데”
“전라도 강경 살았어, 고등학교는 안 다니고 모악산에서 무술을 익혔지, 아버지가 남긴 유물 중에 단기 개천이 있었고, 동그란 환으로 된 약이 있었는데 그걸 먹었더니 갑자기 이렇게 커지고, 공력도 한참 업그레이드 됐어, 형도 공력이 늘어나야 개구리 권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데, 그 약이 두 알이었는데 내가 다 먹었어.. 형이랑 나누어 먹을 걸 그랬나...”
수복은 약을 혼자 먹을 걸 미안해하면서 말 끝을 흐렸다.
“그랬으면 형도 내 얼굴처럼 삭았을 거야.”
수복은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얼굴이 약 때문이야?”
“응, 덩치가 커지면서 얼굴도 팍 삭더라고, 무술하고 바꾼 셈 치지 뭐.”
나 돌은 무술을 잘하는 것하고, 얼굴이 삭는 것하고 어떤 걸 선택할지 잠시 헷갈렸다.
“잘했어, 잘 싸우는데 뭔 걱정이야, 서울은 언제 왔는데?”
“산에서 수련하는데, 서울로 가라는 할아버지 계시가 들려서, 날 잡아왔지, 형 만나려고...”
수복은 형이라는 명칭을 정겹게 불렀다. 나 돌은 무언가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수복에게 형이란 소리 듣기가 민망했다. 수복과 대화를 나눌수록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이 느껴졌다.
“많이 본 동네네....”
고개를 넘어서면서, 높은 담으로 이루어진 성북동 부잣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요코가 살고 있는 집이 보였다. 수복은 요코도 일본 사람이라고 싫어할 거 같았다.
“일본 여자는 어때?”
“일본 여자? 몰라, 일본말 듣고 있으면 죄짓는 것 같고, 울분이 솟아서 싫어.....”
“일본말 안하는 예쁜 일본 여자는 어떤데?”
“몰라, 본 적이 없어서... 알아?”
“아니, 그냥...”
요코의 집 담 너머에 환한 불빛이 어두운 하늘을 밝혔다. 요코의 집을 지나면서 신경을 곤두 세웠다. 요코의 집안에서 기합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린데, 일본 놈들이 싸우는데.....”
수복이 긴장하면서 집중하고 소리를 들었다. 여자의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 돌의 마음이 바빠졌다.
“저 담 넘어갈 수 있어?”
“왜, 넘어가게?”“아는 사람 비명소리야, 담 너머에서 들렸어!”
나 돌은 요코의 비명소리에 높은 담을 원망스럽게 올려 보았다. 수복이 나 돌의 허리를 한 손을 잡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앞으로 겅중겅중 뛰었다. 주차된 차의 지붕을 밟고, 껑충 뛰어서 담 위에 올라섰다. 마당에는 긴 칼을 든 시게이가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요코를 겨누고 있었다.
“야, 그만해!”
나 돌이 일단 외치고 담을 뛰어내렸다.
16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