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간단한 옷가지와 몇 가지 짐을 챙겨 부산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그녀와 통화를 했다. 잠시 만났으면 한다는 나의 이야기에 그녀는 그러자고 했고 다음 주 주말로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날 생각에 살짝 들떠 며칠을 보냈다.

　 며칠 후 걸려온 그녀의 전화. 그녀는 약속을 취소하며 ‘미안하다’ 했다. 나의 이성 속 또 다른 나는 내게 말했다.

　 ‘거봐 그녀는 크게 실망했고 마음이 식은 거야. 아니 애당초 그녀는 너처럼 뜨겁지 않았었는지도 모르지. 단지 외로워서 잠시 기대어 위안을 받을 곳이 필요했던 건지도 몰라. 인스턴트 사랑 같은 거 말야.’

　 하지만 나의 마음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냐. 아닐 거야. 무슨 사정이 생겼겠지.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들,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들 그것들이 거짓이나 가식이었니? 아니잖아. 그녀는 단지 조금 실망했고 어떤 사정이 생겨 망설이는 것뿐이야. 다시 한번 연락해봐. 만날 수 있을 거야.’

　 난 마음의 소리를 믿고 싶었다. 보름이 지나 그녀에게 다시 연락했고, 주말에 만날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며칠을 기다려 차를 빌려 그녀의 집이 있는 마산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향기로웠으나, 한편으론 차갑고 멀게만 느껴졌다. 손을 뻗어도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었기에 가슴 아팠으나, 한편으론 잘 됐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처음 내가 그녀에게 원하고 바랐던 거리가 아닌가 ‘just a friend’ 손을 맞잡을 필요까진 없는 그냥 친구. 커피전문점에서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요. 제가 못나서 일이 그렇게 돼버렸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마음 쓰지 말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하늘 씨가 좀 더 신중했어야 했어요. 그 이야긴 그만하죠.”

　 그녀는 새로운 직장이나 일거리를 찾는 중이라 했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나 역시 새로운 직업에 대한 고민을 잠시 말했고, 오랜만에 만나고 온 가족들의 이야기를 조금 했다. 첫 만남 때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나눌 이야기가 많았고 재미있었는데, 지금의 우린 억지 맞선자리에 나온 남녀처럼 데면데면하기만 하다.

　 서로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병원에서 상상했던 모습들과의 괴리감 때문일까. 나만 아직 뜨겁고 그녀는 그렇지 못하다. 사람 마음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그러한 것을. 어쨌든 우린 다시 만났고 대화를 나누었고 한 달쯤 후 봄이 오면 벚꽃을 함께 보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게 우린 인연을 이어가기로 마음을 모은 것이다. 그거면 됐다.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써 놓았던 편지 중 몇 통을 그녀에게 건넨 후 그녀를 데려다주려 했지만, 그녀는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타야 한다며 정류장으로 향했고, 나는 그녀가 버스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정류장에서 그녀의 뒤를 지켰다. 아쉬운 만남과 헤어짐에 괜스레 가슴이 저릿저릿해서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워물고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일주일 후, 학원 동기들을 만나 취업에 관한 정보와 소식들을 나누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무렵 그녀로부터 톡이 들어왔다.

　 『저...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난 바로 답하지 못했다. 여유만 있다면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주고 싶지만, 그녀가 갑작스레 부탁해올 정도면 푼돈 때문은 아닐 것인데 나 역시 백수라 가진 돈이 없었다. 빌려줄 능력도 안 되면서 어디 쓸 것인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단 돈을 융통할 만한 친구들을 떠올려 연락해 보았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은 어머니께 ‘나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언질을 받았노라 했다. 술 때문이라고. 알코올 중독자라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단다.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전화를 끊었다.

　 내게 비밀 계좌가 하나 있긴 하나 말 그대로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비상용이라 차마 손을 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거짓말로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은행에는 아파트 융자가 걸려있었고,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내게 대출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사금융마저 백수라는 이유로 날 거부했다.

　 그녀에게 무어라 말 해야 하나, 정말 중요하게 필요한 돈이라면 비밀 계좌를 털어서라도 빌려줘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이래저래 알아보고 연락해 보느라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음날 오전에 연락해 보기로 마음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식사를 마치고 나를 불러 앉히셨다. ‘또 무슨 일일까….’ 불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마산 다녀왔더구나. 안 만나겠다더니, 정말로 끝을 볼 참이냐?”

　 아차! 싶었다. 지난번 사건 이후 그녀와 관련이 있는 모든 증거를 인멸했다. 편지는 물론이고 내가 쓴 노트와 작은 메모 쪽지 하나까지 남김없이. 남은 건 통장. 통장에는 지난주 차량 대여비용과 커피숍 결제 내역이 남아있었다. 작은 방 장롱 밑에 숨겨둔 통장을 찾아내신 건가? 어떻게 알아내신 거지? 당황해하고 있던 내게, 정작 놀라운 말은 그다음 말이었다.

　 “돈은 왜 필요하다 그러더냐? 같이 벚꽃놀이 가자고 꼬리치고 돈까지 달라니 꽃뱀 아니냐?”

　 그녀와의 톡 내용을 다 알고 있다. 분명 휴대전화를 열어보신 것이다. 지문으로 잠겨있는 전화기를 도대체 어떻게 열어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너무 복잡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거기에 어머니는 비수를 꽂았다.

　 “너 수아랑 같이 안 살 거니? 이혼이라도 할 거냐! 산이는 또 어떻게 할 거냐! 그리고 왜 하필 그런 여자냐! 세상에 멀쩡하고 좋은 여자가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정신병원에서 만난 정신도 온전치 못한 근본도 모르는 꽃뱀 같은 그런 여자냔 말이다.”

　 난 이 말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미친 듯 소리치고 달려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거기 나보다 잘나고 대단한 사람들도 많아요. 단지 음주에 문제가 있어서 치료를 받는 거지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그 사람 나보다 훨씬 잘나고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이에요! 어머니한테 그런 말 들어도 될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좋아한 거예요!”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네. 미쳤어요! 제 인생이 불쌍해서 미치겠어요! 전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소처럼 일만 하며 살았어요. 가족을 위해 어머니와 처자식을 위해 남들 다 하는 거 한 번 즐겨본 적 없었다고요! 제가 제대로 된 여행을 한번 가 봤나요. 입는 거, 먹는 거, 노는 거, 무엇하나 좋다는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요. 언제가 가족이 먼저였고 저는 나중이었죠. 그런데 수아는 뭐라는 줄 아세요? 같이 살기 싫대요. 별거하잡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고 큰 죄를 지었다고! 나도 이제 좀 행복해지고 싶어요! 남들 다하는 거 하고 즐기고, 마음 가는 사람 좋아도 해 보고, 할 수 있다면 연애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고 싶어요. 산이 들먹이지 마세요. 산이도 내년이면 고등학교 졸업반이에요. 취업할 나이라고요. 저는 산이보다 어렸을 때부터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벌었어요! 기억은 나세요? 저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나오는 데로 마구 쏟아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다. 뱃속에서 시작된 불이 가슴을 지나 머리까지 올라왔다. 불부터 꺼야 했으나 지갑도 휴대전화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나왔다. 다시 들어가기는 싫었다. 집 근처 단골 가계를 찾아 담배와 라이터, 소주 세 병을 외상으로 사 들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백사장이 아닌 사람이 없고 조용한 선착장 방파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끔 눈에 띄는 낚시꾼들 외엔 사람이 없었다. 소주를 한 병 따서 병째로 단숨에 들이켰다. 물을 마시듯 단번에 한 병을 비워버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타오르던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진다. 술기운이 퍼지자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고 바람이 차다는 걸 느낀다.

　 그렇게 해 질 무렵까지 앉아 있었다. 배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파도를 바라보며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사라졌다. 옆에는 빈 소주병 세 개와 수북한 담배꽁초만 남았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여기 있었던 거지? 여덟 시간은 된 듯하다. 추웠다. 술기운 덕분인지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쓰레기를 챙겨 들고 선착장을 빠져나오며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해변으로 향했다. 겨울이 끝나가는 광안리 해변을 쓸쓸하고 스산했다. 정처 없이 걸었다. 지금 집으로 갈 생각도 없었고 좁은 방에 들어가면 터질 것 같았기에 계속 걸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해변에는 쌍쌍의 커플들과 여러 무리의 젊은이들이 끝나가는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나는 저런 호사를 누려본 게 언제였던가…. 산이 아주 어릴 때였으니 참 오랫동안 미련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이 마흔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사회에서 낙오되어 알코올 중독자가 돼버린 난, 내가 마치 환갑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냐, 난 아직 젊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아. 그래. 뭐가 됐든 다시 시작해 보자. 나이 마흔이면 두 번째 스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두 번째 스물이다.’

　 밤이 되면서 점점 추워졌다. 지갑도 전화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깊은 밤이 되어 집으로 향했다. 내 방으로 들어서니 피곤이 몰려왔고 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사설 응급이송단 덩치들이 나를 덮친다. 잠이 덜 깬 채로 반격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결박당했다. ‘아. 또 끌려가는구나.’ 분노도 일지 않았다. 허탈했고 절망스러웠다.

　 사설 구급차에 실리자 구급차는 응급환자도 아닌 날 태우고 사이렌을 울리며 미친 듯 질주한다.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응급이 아니면 조용히가도 될 것을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궁금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사이렌을 켜고 차들 사이를 빠르게 달리는 게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건당 돈을 받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잡아넣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는 꽃뱀(어머니의 표현을 빌자면)에게 미치고, 술에 미친 아들을 먼 곳으로 요양 보내기로 결정하셨고,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생전 한 번도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는, 경북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정신요양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다. 난 그렇게 두 번째 그녀와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봄날의 벚꽃을 약속으로 남긴 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내가 모자란 탓인 것을 잘 알기에, 어머니 또한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시는 마음에 이 모든 일을 계획하셨음을 알기에 미워할 수도 없었다.

　 난 모든 걸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냈다. 이곳의 생활은 ‘슬프다’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는데, 몸도 마음도 생각도 멈춰진 채, 의미 없는 시간만 하염없이 죽여댔다. 그리움이 사무쳤다. 모든 것에 대해. 가족과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그녀.

　 벌써 두 번째다. 그녀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잠적을 한 것이.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으리라. 그녀의 연락처를 외우지 못한 것이 처음엔 안타까웠으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연락처를 알았다 해도 연락할 자신도 없거니와 연락을 한다 한들 어찌 또 그녀에게 정신병원에 있다고 말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밀 계좌를 털어서라도 그녀에게 도움을 줬더라면’ 하고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어버린 일.

　 분명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나에게 도움을 청했으리라.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으므로.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할 어떤 사정이 아니라면 내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문득 ‘임신’이란 단어가 떠올랐고, 난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던 날로부터 계산해 보았다. 그녀가 도움을 청한 날이 대략 3개월이 조금 넘어가는 시점, 얼추 날짜가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설마….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나와 그녀 둘 다 오랜만의 관계였었다. 처음으로 단 한 번 관계를 가졌다고 단박에 임신이 된다는 건, 유부남이 정신병원에서 운명의 사랑을 만나는 것 만큼이나 확률이 아주 희박하다. 나는 20여 년 혼인 생활을 유지했고 자식을 낳아봤으며 유산도 경험했었다. 임신이란 게 말처럼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어쨌거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가타부타 답조차 하지 못하고 잠적을 해 버리게 되었고, 봄의 약속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운명에 맡길 일이다. 나는 내 앞가림부터 잘해야 했다. 더이상 아내와 지낼 수도 없었고 어머니와 지낼 수도 없다. 어머니는 미영과 관계없이 나를 미치게 할 것이다. 어머니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독립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 직업과 거처가 필요한데 직장에서 숙식이 해결된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거처를 구해야 한다면 비밀 계좌를 털어서라도 거처를 구해야 할 터다. 이 모든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단주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독기를 품고 끊어보리라.

　 이 개월의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낸 후, 형에게 연락을 했다.

　 “그 사람을 만나고 말고 따위의 이야기는 안 할래. 그 사람이 만나줄 리도 없겠지만, 들었겠지만 수아는 별거를 원해 그렇다고 어머니와 지낼 생각도 없어. 직장을 구해서 지방으로 가든 정말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조선소로 돌아가든 어쨌든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어. 술은 더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 두 달이면 충분히 생각했어 내 보내줘.”

　 “잔소리는 안 하마. 그 사람을 만나건 말건 그건 알아서 해라. 술 끊고 가정만 지켜라. 그거면 된다.”

　 다음날 퇴원해 부산으로 왔다. 많이 생각하고 망설였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 보기로 마음먹고 톡을 보냈다. 갑작스레 전화를 걸면 거북하고 불편하리라.

　 『연락도 없이 또 잠수를 타버렸네요. 미안해서 할 말이 없어요. 본의 아니게 재발해서 입원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답을 바라진 않습니다. 그냥 미안해서.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어요. 미 안 해 요.』

　 그녀는 톡을 확인했으나 답을 달진 않았다. 그거면 됐다. 고마웠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취업에 매달렸다. 연락 가능한 모든 인맥을 동원해 일자리를 구했다. 일주일 동안 몇 군데 일자리를 소개받아 면접을 보러 다닌 끝에, 전에 기중기를 배웠던 학원장의 소개로 부산의 서쪽 끝 녹산 공단 인근에 자리한 중장비 임대 전문 회사 ‘KL중기’에 취직을 했다. 보조기사로 수습 기간을 거쳐 정식 기사 자리를 약속받았다. 급여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야 했다.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취직했어요. KL중기라는 중장비 임대회사예요. 보조기사로 시작하지만 수습 기간이 지나면 정식 기사로 채용하겠다네요. 이제 독립할 집을 구해야 해요. 또 연락 할게요.』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월세로 원룸을 임대했다. 보증금과 간단한 세간을 들여놓기 위해 비밀 계좌에 있던 돈 대부분을 써야 했다. 이 돈은 결혼 후 이렇다 할 제대로 된 해외여행을 못 해본 아내를 위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아무도 몰래 깜짝 선물로 몇 년 전부터 급여 외에 부수입을 조금씩 모아온 것이다. 아마도 조선소를 계속 다녔다면 지금쯤 목표했던 천만 원을 채워 그럴듯한 해외여행을 다녀왔으리라. 하지만 오백만 원 남짓의 이 돈은 생각지 못하게 나의 독립생활의 밑천으로 쓰였다.

　 어머니 댁에서 이사를 나오던 날, 어머니는 직장과 집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물으셨지만 나는 신경 쓰실 것도 염려하실 것도 없으며 자주 찾아뵙겠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끝내 회사와 집에 관한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이제 더이상 내 인생에 어머니도 형도 끼어들 수 없도록 해야 했다. 내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사를 하고 첫날 밤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회사 근처에 집을 구했습니다. 원룸인데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깨끗하네요. 간단한 세간을 들여놓고 이사 완료했어요. 혼자 있으니 (신경 쓸 사람이 없어) 마음은 편하네요. 좀 쓸쓸하기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 꾸준히 그녀에게 톡을 남겼다. 그녀는 언제나 재깍 확인하지만, 답은 없다. 하지만 서운하지는 않다. 이렇게 말할 상대가 있고 읽어주는 그녀가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내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긴 채 병원에 잡혀있을 동안 그녀도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생각하면 오히려 차단하지 않고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