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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지자."
참으로 쉬운 말 아닌가?
그와 그녀의 6년 연애를, 길고 긴 지겹고 익숙한 사이를 끝내기에 이보다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말이 어디 있을까?
" 뭐?"
수현은 가만히 민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과연 이 사람이 지금껏 6년을 봐온 그 사람이 맞나 싶은 낯섦 때문이었을까? 수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참으로 쉽지 않은 말이었다.
그와 그녀의 6년 연애 그 속에 가족으로 이뤄진 사이를 끝내기에 이보다 더 잔인한 말이 어디 있을까?
한순간이었다. 수현과 율이 민영에게 버려진 건 정말 찰나 같았다.
"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 지긋지긋해. 모든 일에 아등바등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생각해봐 너랑 나같이 상처투성인 사람들이 가족을 이룬다는 자체가 가당키나 해?."
" 뭐? 아......그래 자기가 요즘 스트레스가 많았던 거 같은데 미안해. 내가 잘 챙겨야 했는데........"
" 알았으면? 알았으면 네가 나한테 뭘 챙겨줄 수 있는데? 넌 고작 여기 와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오길 턱 빠져라 기다리는 거 그리고 율이 돌보는 것뿐이었잖아. 그런 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 ............민영아
" 어때 내 말이 맞지 않아? 아니면 아니라고 해봐."
수현의 애처로운 눈빛에 민영의 가슴이 녹아내린다.
' 제발 그만 수현아. 그냥 그러라고 해. 더 이상 나 같은 놈 붙잡지 말고 더 심한 말 들을 필요 없어. 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어. 이 이상 어떡해 더 나를 위해 주겠어."
" 미안해. 네 말이 맞아.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없긴 해. 하지만...... 하지만 율이는 우리 율...."
"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놈이 자기 자식 사랑하는 거 봤어? 보고 배운 게 없는데 뭘 기대하는 거야."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원망해도 참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율이는 다르다. 그 아이마저 놓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 그래 그러자 헤어지자. 더 이상 널 설득시킬 자신도 붙잡을 용기도 없어. 이 이상 나보다 율이한테 상처가 되는 말을 더 듣고 버틸 자신이 없으니까. 좋아 네 말대로 할게. 우리 헤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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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월 후 한국 -
" 율아~"
" 아! 은아 이모닷! 은아 이모~"
" 으구 내 새끼 쪽쪽쪽쪽."
" 아이참 이모 그만 그만해~"
" 어허~ 우리 율이 벌써 이모 뽀뽀 거부하는 거야? 섭섭해."
" 아니. 이모 저기 놀이터에 있는 여자애가 내가 좋아하는 애란 말이야. 나한테 절대 다른 여자랑 뽀뽀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율이가 손가락 걸고 약속했거든. (속닥속닥) 이따가 저~어기로 가서 율이가 뽀뽀 많이 많이 해줄게. 응?"
" 오호~ 우리 율이 여자친구 생긴 거야?"
" 아이참~"
" 요즘 어린이집에서 율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아주 여자애들끼리 난리도 아니에요. 후후후"
" 제 조카가 워낙 한 인물 하다 보니 하하하"
" 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어머니께서 워낙 한글을 많이 사용하셔서 그런지 의사소통도 잘되고 있고 점심시간에는 한식을 어찌나 잘 먹는지 편식하는 것도 없어요."
" 정말요? 요 녀석 아주 이뻐죽겠네. 쪽쪽쪽쪽"
" 아이~ 이모~~~~~"
5개월전 갑작스레 수현의 이혼 소식을 들은 은아는 믿을 수 없었다.
" 미.....친...새끼"
" .............."
" 어떻게 너희를 버리고 한국으로 가버릴 수가 있어!!"
" 내가 알아서 한다고 고집부려서....... 그래도 집 정리는......"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돈만 주고 혼자 가버리면 그게 버린 게 아닌 거야? 타지에 너희 둘만.....흑흑"
" 은아야........"
" 이 개X끼 내가 가만 안 둬!! 죽여버릴 거야!!!!"
" 그러지 마......."
" 왜!! 왜 그러지 마 넌 화도 안 나? 그런 새끼가 뭐라고 편들어 편들길!!"
" 편드는 거 아니야. 그냥 율이가 버림받았단 생각이 들게 하기 싫어. 그러려면 나 또한 버림받았단 생각을 안 해야 율이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 테니까......은아야 나 율이한테 그런 기억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
".수현아..........흑흑"
" 울지마 나 괜찮아. 정말......흑흑흑.......괜찮아...."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은아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은아의 아버지가 자신의 건물 원룸을 내어주셨고 수현과 율이는 그렇게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와 수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민영과 서류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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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대표 사무실 안-
" 리안이랑 송애란이라니. 다른 애로 알아보라고 해."
" 하지만 지금 송애란 주가가...."
" 그딴거 필요 없어! 리안이가 확정된 것만으로도 이미 그 영화는 이슈야 이슈!! 근데 다 된밥에 송애란을 왜 뿌려 뿌리길. 이 바닥에서 송애란 사생활 모르는 인간들 있어? 어디에다가 그런 급 떨어지는 애를 붙여 붙이길!!"
" 네. 알겠습니다."
" 조만간 터질 폭탄 안고 갈 필요 없다고 그러니 잘나가는 애 말고 신선한 애 그런 애로 알아보라 해. 신 실장 리안이 한국 돌아와서 첫 작품이야. 괜한 구설수 될만한 애들은 싹을 다 자르라고."
" 네"
뉴욕모델계의 판도를 바꿀 만큼 거물급으로 성장한 리안에게 수많은 러브콜이 쏟아졌다. 이미 예상한 결과였다. 지 대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안을 할리우드에 발 빠르게 입성시켰다. 영화, 시리즈물 드라마, 리안은 이미 할리우드에서도 신비로운 비주얼에 완벽한 연기력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동양인 최초 주연을 도맡아 하며 입지를 다져나갔다.
" 리안 왜 갑자기 한국엘 가겠다는 거야?"
" 안젤라 나는 한국 사람이야. 물론 여기서 인정받은 건 너무 축복할 일이지만 그래도 한국에 뿌리를 두는 건 당연한 거라고. 그게 우리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자 자긍심이지. 후후 그렇다고 여기 다시 안 오겠다는 게 아니잖아."
" 그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리안......"
" 나 없는 동안 홍보나 잊지 말라고. 한국드라마도 내가 찍으면 할리우드 작품 못지않을 테니"
" 하여간 못 말리는 자신감이야. 후후후 잘 다녀와 리안 보고 싶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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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현의 집-
" 엄마 이거 봐~"
" 율이 왔어? 어머 얼굴이 그게 뭐야?"
" 오늘 페스티벌 갔었는데 거기서 은아 이모가 페이스 페인팅 하게 해줬어."
" 그랬어? 와~ 우리 율이 너무 신났겠다."
" 응 진짜 재밌었어. 헤헤"
" 그럼 재밌게 놀고 오신 권율 님 이제는 뭘 해야 할지 알고 계시지요?"
" 후웅~ 엄마 조금만 있다 지우면 안 돼요? 나 이거 너무 마음에 드는데."
" 흠. 좋아 대신 손 깨끗이 씻고 이따 자기 전에는 꼭 지우는 거다. 알았지?"
" 네~"
율이는 수현의 말에 신이나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
" 뭐가 힘들어. 율이랑 있으면 내가 더 신나서 방방 뛰는구만. 너 늙었나 봐 쓰잘머리 없는 소리하는 거 보면."
" 후후후"
" 그것보다 면접은?"
" ............. 아무래도 애 딸린 이혼녀는 취직하기 쉽지 않은가 봐. 그래도 뭐 아르바이트하고 있으니까."
" 그래 너무 조급해하지 마."
" 아버지한테 죄송....."
" 너 한 번만 그런 소리 하면 가만 안 둬!"
" 알았어. 안 할게 지퍼 꾹!"
" 옳지. 후후 밥은 먹었어? 아직이지? 우리 율이 나오면 고기나 뜯으러 갈까나?"
" 흠. 그럴까나?"
수현이 한국에 들어온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역시나 애 딸린 유부녀를 써 줄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수현의 걱정을 아는 은아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지금 수현의 상황을 은석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과연 말을 해주는 게 나은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미 은석은 닿을 수 없는 별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더욱더 고민스런 은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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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감독 스튜디오-
" 그래서 송애란은 안된다는 거야? 아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물론 걱정하는 부분 이해해. 어 그래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리안의 첫 작품을 맡은 노감독은 솔직히 손 안 대고 코 푸는 느낌일 정도다. 그 전까지 그렇게 콧대 높게 굴던 정상급 여배우들도 이제 자신들이 발 벗고 앞다퉈 연락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중 세계적인 배우 리안과 대세인 송애란의 조합은 그야말로 작품이 최악의 쓰레기가 아닌 이상(물론 작품성이 최악이라 해도 본전은 할 정도다.) 홈런이 분명했다.
" 송애란은 안된데요?"
" 어. 아쉽지만 어쩌겠어. 지금 우리한테 리안이 우선이니 최대한 빨리 송애란 쪽에 연락해 괜히 보도자료 흘리기 전에. 문제는 아역인데....... 연기 좀 한다는 애들은 이미 너무 대중에 알려져 있어서 "
" 그러게요. 이번 영화에서 솔직히 아역하고 리안 씨 의 호흡이 가장 중요한데 어쩌죠?"
" 오디션 공고를 기획사마다 최대한 뿌려. 포트폴리오, VCR영상 따위 필요 없어. 무조건 실생활사진, 실생활 동영상거기서 이미지 맞는 애들 추려 바로 실물미팅! 힘들겠지만 그게 최선이야. 그 중 최종 선발된 애들 다섯 그 심사는 리안에게 맡겨보자고."
" 네? 아역 캐스팅을 리안 씨 에게 맡기신다고요?"
" 아빠와 아들 사이잖아. 단번에 알아볼 거야. 누가 자기 아들인지. 후후후"
노감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