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고 저녁 무렵 어머 댁으로 돌아왔다.
퇴원할 때 챙겨온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들과 글들은 다락방 내 비밀 서류 가방(아타셰 케이스)에 넣고 잠가 두었다.
이튿날 아침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원 사실을 전하고 이사 준비를 도울 것이 없는지 물었는데, 아내는 포장 이사를 불러 준비가 거의 끝났으니 내가 굳이 올 필요가 없다고 하며, 이사가 끝나고 한번 들러줄 것을 청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 근처 인력 사무소를 찾았다. 일용직 근로자 출력 명부에 등록하고, 근무지를 배정받았다.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신축현장이었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병동으로 연결되자 나는 김미영 씨를 찾았고, 누구냐는 간호사의 질문에 오빠라고 했다. 잠시 후.
-여보세요?
“저예요. 어제 퇴원했어요”
-네…. 뭐 하실 거예요?
“그날 말씀드렸듯이 일을 배우든지 직장을 구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기술을 하나 더 배워서 자격증을 따던지 뭐든 시작하려고요. 한 달 안에. 그때까지 마냥 놀 수는 없어서 인력 사무소에 오늘 등록하고 왔어요. 내일부터 일용직 다니며 용돈이라도 벌어야죠.”
-잘하셨네요. 응원할게요. 그리고 이쪽으로는 급한 일 아니면 전화하지 마세요. 전화가 자주 오면 간호사들이 보호자에게 확인을 하거든요. 대신 제가 하루 한 번씩 전화할게요. 하늘 씨 퇴근 시간 이후에. 공중전화로.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이렇게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나네요. 일도 열심히 하고, 준비도 열심히 하면서 기다릴게요. 미영 씨 퇴원하는 날. 그리고 딸기랑 편지지 세트 보냈어요. 편지는 따로 도착할 거예요.”
-고마워요. 일할 때 조심해서 안전하게 하시고, 또 술 조심하시고, 알죠? 내일 제가 전화할게요. 공중전화로.
“그래요. 내일 봐요. 안녕 sweet heart.”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미영 씨 콜사인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연인한테 쓰는 말인데.
“그래서 안 되나요? 그러지 말까요?”
-아니에요. 그만 끊어야겠어요. 내일 봐요.
통화는 서둘러 끊어졌다. 간호사나 보호사의 눈치가 보였나 보다. 생각했다.
나는 그녀와의 통화 후(거의 일주일 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날 출근 준비를 했다. 장갑과 안전화, 각반, 작업복과 모자, 수건, 방진 마스크 등을 배낭에 챙겨 넣었다.
다음날 새벽 5시 30분 알람 소리에 일어나 간단히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우고 출근했다.
딱히 많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추위에 많이 시달렸다. 퇴근하고 씻고 식사를 마치고 나자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난 어머니를 피해 작은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의 첫 근무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그녀의 일상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 하루 한두 번(점심시간, 퇴근 후) 그녀와의 통화는 내겐 모든 피로와 근심, 스트레스를 씻어주는 달콤함이었고, 덕분에 단주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찍히는 통장의 입금 내역을 보면서 그녀와의 여행을 상상하며 행복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성적인 나와 대립해야 했다.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고 나도 답장을 써 보냈는데, 매일 통화를 하면서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편지에는 통화로 다 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나는 그리움을 가득 담아 답을 적어 보냈다. 그렇게 이 주가 흘렀을 무렵, 그녀로부터 다음 주 퇴원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린 새해가 시작되면 함께 가까운 도시로 여행을 가기로 약속을 하고 1월 초로 날짜를 정했다. 나는 차량을 대여 예약했고,(내 차는 아내가 사용 중이므로) 통영의 한 호텔도 예약해 두었다.
이틀 후 저녁. 세상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썩이던 그 시각, 나는 식사 후 밖으로 나가 그녀와 통화를 하고 싱글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순간 집 안의 공기가 무거움을 감지했다. 큰방에는 밥상이 치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TV는 꺼져 있었으며, 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께서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러 앉히셨다.
“너 누구랑 매일 그렇게 통화하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친구예요.”
“남자니 여자니?”
잠시 망설였으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고, 또 무언가 눈치를 채고 물으신 것 같았기에(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직감은 놀라운 것임을 잘 안다.) 사실대로 답했다.
“여잡니다. 그냥 친구. 여자요.”
어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시고는 말씀하셨다.
“너 바람 났구나! 아주 단단히!”
그리곤 어머니는 얼마 전 그녀에게서 온 편지 두 통과 통장을 꺼내 보이셨다. 나는 가로채듯 그것을 빼앗으며 소리 질렀다.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책상하고 가방을 뒤지세요. 왜!”
통장을 펼쳐봤다. OO랜트카, 통영OO호텔. 선명하게 인쇄된 체크카드 결제 내역. 내가 일을 다녀온 날이니, 예약이라는 걸 아셨을 것이다. 선명한 증거 앞에 변명이 통할 리 없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어머니에게 외도는 불륜이고 크나큰 범죄다. 어머니 식으로 말하자면 ‘지옥에 떨어질 일’ 인 것이다.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그냥 좋은 친구일 뿐입니다. 상상하시는 이상한 관계 아닙니다.”
단순한 친구라는 나의 답에, 오히려 어머니는 나를 설득하려고 하셨고, 난 고집을 부리며 우길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친구 이상은 아닙니다. 말이 잘 통하고 서로 마음이 잘 맞아, 가끔 보는 그저 그런 친굽니다. 자꾸 이러시면 서로가 불편해서 안 되겠네요. 제가 방을 구해서 나가든지 해야지.”
나는 그렇게 말을 잘라 대화를 끝내고,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고,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마당에서 연거푸 담배만 태워대던 중 형님이 찾아왔다. 어머니의 부름이 있었으리라. 술까지 사 왔다. 소주 두 병, 내 상태를 뻔히 알면서도 술을 사 왔다는 건 무슨 의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기 싫었다. 머릿속은 복잡했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가슴이 타는 듯했다. 술이 너무나도 간절했지만, 차마 내 손으로 사 오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그녀와의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와의 다짐 때문에…. 그런데 형이 오아시스를 직접 사 들고 와 대화를 청했다.
난 거부하지 않고 밥상에 반찬 두어 개만 꺼내 술상을 차리고 형과 마주 앉았다. 답답한 마음에 불부터 끄기 위해 먼저 한잔을 따라 들이켰다. 전신에 짜릿한 쾌감이 퍼지며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난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어쩐일이야. 술까지 사 들고….”
곧바로 답이 없기에 나는 술을 한잔 더 따라 마시며 물었다.
“어머니가 가보라 셨겠지. 뭐라시던?”
“너 여자친구 생겼다고 그러시더구나.”
“그래. 맞아. 친구. 말 그대로 여자 사람인 친구일 뿐이야. 형도 어머니도 걱정할 부류의 관계가 아니라고. 그래서 형 생각은 어떤데?”
형은 술을 한잔 따라 마신 후 답했다.
“단둘이 여행을 다니는 사이라면, 단순한 친구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구나. 어쨌든 난 그런 건 상관없다. 예전에 너였다면 여자친구 아니라 애인이 생겨서 바람을 피웠다고 했어도 난 크게 반대하지 않았을 거야. 단, 들키지 말고 조심스럽게 만나고, 즐기고, 뒤끝 없이, 미련 남기지 말고 흔적 없이 정리하라고 말했겠지. 넌 그럴 수 있을 만큼 똑똑한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넌 아냐. 알코올에 중독된 후로 많이 달라졌어. 예전의 네가 아니야. 넌 정리할 수 없을 거야”
난 술을 다시 한 잔 따라 마시고 물었다.
“지금의 난 어떻다는 거야? 뭐가 달라졌는데?”
형도 다시 한 잔을 비운 후 답했다.
“나약해. 예전에 넌 자존감 넘치고 똑똑해서 어디서나 당당했지. 강했어. 그런데 지금 넌 나약해.”
“그래서, 시작부터 하지 마라. 그거군. 그래서 이렇게 술을 먹여서 다시 정신병원에 가둔다는 계획인 거야? 둘이 만나서 여행을 가고 무언가 시작하기 전에 둘을 떼어 놓겠다…. 머리를 쓰셨구만. 하지만 내가 거부하고 저항하면 어쩔건데? 날 이길 자신은 있나 보지?”
형은 내 잔에 남은 술을 따라주고, 새 병을 따 자신도 한 잔 따라 마시고 입을 연다.
“네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 사람들 못 이겨, 너 같은 사람 제압하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야. 좀 있으면 도착할 거야. 이거 다 마시고 조용히 따라가라. 괜히 몸 상할 짓 하지 말고.”
난 형이 따라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형의 잔과 내 잔을 다시 채운다.
“그렇다면 칼이라도 빼 들고 설쳐봐야겠군. 혹시 알아? 내가 이길지….”
“네가 아무리 미쳤어도,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건 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여자 있는 병원이 아니고 시립정신병원으로 갈 거다. 오래 있으라는 거 아니다. 마음만 정리해라. 그럼 바로 빼주마.”
“외통수구만,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네. 부탁이 있어.”
“뭔데?”
“나 이거론 간에 기별도 안 가. 한 병, 아니 두 병 더 사다 줘. 맘 편하게 마셔보고 들어가게. 그리고 다 마실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오니까 기다리라 그래. 내가 나갈 때까지.”
형이 전화를 건다.
“어머니 두 병만 더 사다주세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데리고 나갈 테니까, 들어오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세요…. 네.”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다.
“행여 나 따돌리고 도망치거나, 그 여자한테 전화할 생각일랑 말아라.”
나는 비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오셨나? 철두철미 하시구만.”
나는 소주잔을 치우고 물컵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그렇게 난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지 이 주일 만에 다시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그녀와의 약속은 예약으로만 남긴 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렇게 연락이 끊겨버리면 많이 걱정하고 기다릴 텐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입원 후 일주일간은 공중전화도 사용할 수 없기에, 나는 바로 빠른우편으로 편지를 써 보냈다. 자세한 내용까지 세세하게 알리고 싶진 않았고, 그냥 그녀의 편지와 카드사용 내역을 통해 그녀의 존재가 노출됐고, 그 때문에 어머니와 다툼이 있었고, 술을 마셨고, 잠시 입원하게 됐다고 썼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못나서 미안하다고….
일주일이 흘러 통신 제한이 풀렸고, 난 바로 그녀가 있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 퇴원 전이었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미영 씨. 혹시 제 편지 받으셨나요?”
“아니요. 편지 보냈었나 봐요. 아직 안 왔어요.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예요, 지금?”
난 그간의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간략히 설명했다. 어머니께 그녀의 존재가 노출됐으며 그 때문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그녀는 괜찮다고 하며 도리어 내가 걱정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실망감은 지울 수 없었다.
여행을 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다시 술을 입에 댓다는 것이 실망스럽고 속이 상한 듯했다.
“좀 참지 그랬어요.”
“참았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예요. 외통수였거든요.”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녀 역시 말이 없었다. 난 마지막 인사를 하고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미안해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하지만 여기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 길어야 앞으로 두 주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나가서 다시 연락 드릴게요. 건강히 잘 지내요. 안녕.”
“네. 그래요. 안녕.”
그리고 2주가 흘렀다. 입원 3주가 되던 날.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내가 졌어. 안 만날 게 그 사람. 시작 안 할게. 보내줘 집으로.”
퇴원한 후 곧바로 거제 집으로 향하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나왔어요. 잘 지냈어요?”
- 그렇저렇 지내요. 일거리 찾느라고 조금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하늘 씨는 별일 없는 거죠?
“네 덕분에…. 지금 거제 집에 내려가는 길이에요. 이사하고 한 번도 안 가봐서 제 짐 정리도 좀 하고, 아들이랑 진로문제로 상의도 좀 하고, 옷도 좀 챙기고, 아내랑 이야기도 좀 하려고요.”
-네. 잘 다녀오세요.
“다녀와서 또 연락드릴게요. 그럼 이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애초에 원했던 것처럼 그녀와 좋은 친구로 만이라도 남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로 보아 그것마저 불분명해 보인다. 어머니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다. 그녀는 크게 실망했고, 나로부터 멀어졌다. 이런 생각에 잠긴 동안 어느새 버스는 거제 터미널에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