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서일의 후예
수복이 제일 굵은 플라타나스를 응시하고, 고개를 돌려 나 돌을 보고 난 후, 뛰어 올랐다. 나 돌이 시전 한 개구리 권법으로 플라타나스 나무를 가격했다. 어른 허리 높이로 뛰어서 플라타나스 옆을 가격하고, 내려왔다 다시 옆으로 뛰어올라 플라타나스를 가격했다.
수복의 두 발이 가격한 자리가 움푹 파였다. 수복이 두 손으로 가격한 자리에도 파였다.
“와, 쓰러지겠다!”
종운이 수복의 가격을 받은 플라타나스가 우직! 소리를 내는 걸 듣고 외쳤다. 수복이 플라타나스를 왼발로 가격했다. 가격을 받은 플라타나스가 오른쪽으로 우직! 소리를 내더니 쓰러지다, 옆에 서 있는 플라타나스에 걸려 기대고 섰다.
“어머, 어머머.....”
민지가 비명을 질렀다. 나 돌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종운은 플라타나스가 넘어질까 봐, 민지를 밀었다. 수복이 봤냐는 표정으로 나 돌 앞에 섰다.
“이게 개구리 권법이다. 모자람이 많지만.....”
“개구리 권법을 아네요?”
“흣, 평생 배우고 익혔다.”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가 만든 건데, 어떻게 알아요?”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가문의 무술이다.”
나 돌은 수복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그래서 저절로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나 철 할아버지가 창시한 개구리 권법을 수복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신기했지만, 가문의 무술이라는 말에 의문이 생겼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나 철인데요, 할아버지 함자가 뭐에요?”
“서자 일자 서일이다, 나철의 후예라고?”
수복의 목소리가 수그러져 다정하게 물었다. 수복의 입에서 서일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 돌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서일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와 수련을 하셨어요, 역사에는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두 분은 백두산에서 수련을 하셨어요. 독립 운동도 함께 하시고요.”
“알고 있다, 나철 종사님의 후예라는 말이 사실이냐?”
수복도 반가운 표정으로 다정하게 물었다. 옆에서 듣던 종운이 끼어들었다.
“우리 할아버님는 나정련이라고 나철 할아버지 큰 아들이었어요. 임오교변 때 돌아가셨구요. 서일 종사님은 우리 할아버지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신의 경지에 이른 무술을 구사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후예를 만나다니..... 하늘의 뜻입니다.”
수복은 진지하게 종운의 말을 들으면서, 얼굴이 펴졌다.
“이름이 뭐니?”
수복이 나돌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묻는 것 같았다.
“나 돌이에요, 아빠 내 이름을 누가 지었어?”
“할아버지가 나 돌이라고 지어 준건데, 뜻은 나도 몰라..... 귀한 이름이라고 하시긴 했지만, 돌이 귀한 건 아니니까.....”
나 돌은 어려서부터 왜 이름이 나 돌인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왜 이름을 돌이라고 지었냐고 묻지 않았다. 돌이나 보석이나 희소성의 문제고, 몇 개 없는 거보다는 많은 게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단기 개천에 나 철이 흔하고, 귀한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남긴 걸 읽을 때도, 같은 생각이라고 동감했었다.
“할아버지가 돌이를 만나면 잘 모시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믿기지 않는다.....”
처음으로 수복이 인간적인 고민을 얼굴에 담았다. 종운과 나 돌은 수복이 궁금해하는 걸 나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수복의 입에서, 돌이를 만나면 잘 모시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말을 서일이 남겼다는 게, 신비로웠다.
“단기 개천에 개구리 권법과 서일 할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어요. 두 분이 백두산에 살아 계실지도 몰라요....”
나 돌은 혹시 수복이 단기개천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단기 개천? 단기 개천을 알아? 우리 집안의 가보를 알아? 이럴 수가.....”
“우리 나 철 할아버지가 남기신 책을 아세요?”“나철 할아버지와 서일 할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태어날 때부터 그 책에 기록된 개구리 권법을 배우고 익혔다. 우리 아버님은 무술 익히기는 체질에 안 맞아, 내가 그 계승자가 되었다. 아무나 익힐 수 있는 무술이 아니라서.....”
수복은 말을 하면서 나 돌의 몸을 자세히 관찰했다. 나 돌은 수복이 자세히 보는 게 어색해서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렸다. 민지가 끼어들었다.
“보통 인연이 아니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우리 집에 가서 족보를 따져 봐요.”
“그게 좋겠다, 우리가 이사를 온 것도 우연은 아니네.....”
종운이 민지를 거들었다. 민지가 발끈했다.
“우리가? 당신이 우리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 은근슬쩍 묻어가려 하지 마, 어림도 없어!”
민지가 종운에게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수복이 망설이며 나 돌을 보았다.
“우리 집에서 얘기해요. 얼마 전에 단기 개천을 보게 되었거든요.”
나 돌은 수복에게 단기개천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무술을 수복의 수준으로 익히기는 너무 늦었다고 받아들였다.
“작년 음력 개천절에 마니산에서 제를 올렸는데, 나철 할아버지가 이 아파트로 가라는 계시를 내려주셨어요....만나라는 뜻이었구나..... 허.....”
수복은 나 철의 몸을 자세히 살피며, 지난 일을 회상했다.
“주차 문제도 우연이 아니었군요? 그때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종운이 주차장을 거론하자, 수복이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 돌은 괜한 말을 했다고 종운을 툭, 쳤다.
“빨리 와, 난 먼저 가서 음료수라도 챙겨 놓을 게.”
민지가 앞장 서 갔다. 나 돌이 수복의 손을 잡았다. 수복이 나 돌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 돌은 시게이가 손을 잡았을 때가 떠올라 긴장하는데, 뜨거운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종운이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을 보면서 웃었다.
“곧 몸에 변화가 올 거다, 그러면 나철의 후예가 맞다.”
수복이 나직하게 나 돌에게 일렀다. 나 돌은 온몸에 퍼지는 뜨거운 기운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복이 나 돌을 땅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나 돌의 등 뒤에 두 손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나 돌은 정좌를 하고 앉아 등에서 들어오는 수복의 뜨거운 기운을 받았다. 종운은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뒤쪽에 앉아 숨을 죽였다.
“마음을 열어라.....”
“예.”
편하게 숨을 골랐다. 나 돌의 몸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종운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수복의 몸에서도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나 돌은 숨을 고르며,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눈을 떠라.”
수복이 나 돌만 들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나 돌이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 쉬었다. 전보다 숨 쉬는 것이 한결 부드러웠다.
“일어나 봐, 한 번 보자!”
수복이 밝은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묻어있었다. 나 돌이 일어나면서, 수복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종운의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돌이야!”
종운은 키가 수복이만큼 커진 나 돌을 보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나 돌은 종운이 작아진 것과 수복이 작아 진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여 몸을 둘러보았다.
‘내가 커졌네..... 아빠, 선생님!“
나 돌은 무릎을 꿇고 수복에게 절을 하려고 했지만, 수복이 말렸다.
“나철의 후예답게 행동해라. 앞으로는 선생님이라도 부르면 안 된다, 난 나철의 후예에게 당연히 한 일을 한 것뿐이다. 만나서 반갑고, 기쁘다.”
수복이 나 돌을 만난 후로 가장 긴 문장을, 들떠서 풀어 놓았다. 얼굴에 환한 기운이 돌았다. 나 돌은 종운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그렁거렸다.
“아빠, 아빠.....”
“돌이야, 너무 좋다, 고맙습니다, 서일의 후예님!”
나 돌은 키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다. 집에서는 평범해서 못 느끼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는누가 무어라하지 않아도, 스스로 작은 키를 느꼈다. 하지만, 거인이라고 생각했던 수복과 눈높이가 같아졌다.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었다. 요코가 나 철의 빽이라고 부러워 한 의미를 알았다. 몸이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난 서일의 후예다, 나 철 종사님은 어른이시다, 나 돌을 모시라는 할아버지의 명을 따를 거다. 그러니 함께 다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다.”
수복은 또박또박 나 돌에게 같이 다녀야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종운은 수복의 의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았다.
“그래 돌이야, 할아버지가 넌 크게 쓰일 거라고 하셨어, 그런데 불같은 성질 빼고는 다른 사람과 비슷해서 할아버지가 틀린 줄 알았는데, 역시 맞았구나, 서일과 나 철의 후예가 함께 다니면 당할 자가 없겠다.”
수복이 나 돌의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끄덕였다. 나 돌은 수복과 같은 눈높이에서 보는 것이 신기해서 빙긋이 웃었다. 수복이 믿음직스러웠다.
“우리 아빠 키도 어떻게 안 될까요?”
수복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웃었다.
“단 한사람 나철의 후예에게만 통해, 나 돌이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제가요?”
“응, 말 놓고 지내자. 나도 나이는 많지 않아...”
수복이 수줍은 표정으로 나 돌에게 웃으며 제안했다. 종운이 끼어들었다.
“몇 살인데요?”
“1995년 음력 개천절이요.”
“뭐, 돌이랑 동갑이네, 돌이는 음력 8월 15일 가경절이 생일이야, 가만,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개천절이네..... 내가 정신이 없어서.....”
종운은 사십은 넘어 보이는 수복이 나 돌과 동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속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믿어야 했다. 수복이 주머니에서 주민증을 꺼냈다.
“봐, 동갑이지?”
수복이 나 돌에게 자랑스럽게 주민증을 보여주었다. 나 돌도 주민증을 꺼내 수복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 아빠 키를 내가 크게 만들 수 있어?”
나 돌은 그러고 싶었다. 종운은 십 센티만 더 컸어도 세상을 바꾸었을 거라고, 늘 아쉬워했었다.
15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