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개구리 권법
요코는 몸을 옆으로 돌려 손을 올려 피하는 시늉을 했다. 요코의 늘씬한 몸매가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단기 개천 저 주시면 안돼요? 빌려 주시던지.....”
“안 돼!”
나 돌이 어렵게 말했더니, 요코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안 돼요.....”
나 돌은 왜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묻는 건 뻔뻔스럽다고 생각했다.
“섭섭하지? 그래도 안 돼, 책의 의도는 일본과는 상반된 입장이고, 주인을 만나면 일본 에 좋지 않아, 그러니까 포기해!”
“포기요? 그래도....”
요코의 반응은 완강했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요코를 설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매달린다고 책을 주지는 않을 거였다. 그렇다고 생전 처음 대하는 증조할아버지의 흔적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난 일본사람이야, 일본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어, 나 돌은 나철의 후예고,
어떤 식으로든 책을 주는 일은 안 생겨.”
“저 보라고 쓴 책인데요? 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럼 왜 보여 줬어요?”
아무것도 못하고 물러나는 건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책을 읽고 나돌이 주인인 줄 알았어, 그래서 찝찝해서 보라 한 거고, 그만하자!”
요코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 돌은 의무감이 들었다.
“쪼금 더 볼게요, 보기만 할게요.”
일단 시간을 끌기로 작정했다. 요코는 눈을 마주하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것도 마다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 되겠다, 쫌 더 보고 주는 걸로.”
“고마워요, 잠깐만 볼게요.”
나 돌은 식탁에 다시 앉았다. 개구리 권법을 설명한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며칠을 두고 흉내를 내면서 익혀야 할 그림이었다. 요코가 당장 책을 없애지는 않을 거면, 매일 와서 익히는 수가 있었다.
“야, 얍! 호이!”
나 돌은 가볍게 기합을 넣으면서 그림을 따라 하느라, 일어나서 헛발질과 헛손질을 하였다. 요코는 하는 짓을 보면서 웃었다. 요코가 앞에 섰다.
“내가 하는 거 따라 해봐!”
요코는 말을 마치고, 허공에 두 발을 허벅지 높이로 뛰어서 올렸다. 나 돌은 요코가 가볍게 허벅지 높이로 오는 걸 보고는 놀랐다. 요코는 벌렸던 두 손을 모았다가 떼었다. 순식간에, 동시에 일어난 동작이었다.
“쉬운 동작은 아니지?”“보세요!”
나 돌은 요코가 한 동작을 따라 한다고 뛰어올랐지만, 수직으로 뛰어올라, 두 발을 앞으로 내미는 것은 불가능한 동작이었다. 그러면서 두 팔을 벌렸다가 오므렸다 떼기는 생각도 못 할 동작이었다. 무릎 높이로 올라 두 발을 앞으로 뻗치다, 꽈당! 뒤로 넘어졌다. 요코가 웃으며 나 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요코의 손이 닿은 허리에 찌릿한 전율이 왔다. 숨이 멎었다.
“내가 올려 줄게, 해!”
그러면서 요코가 나 돌의 몸을 위로 올렸다. 나 돌은 가볍게 뛰어 올라 요코가 하던 동작을 그대로 재현했다. 하지만 요코가 훨씬 빨랐다. 허공에 헛손질을 하는 게 우스웠지만, 열심히 휘둘렀다. 아무런 느낌이 안 들었다. 요코가 허리를 잡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기본적인 동작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공력이 있어야 할 수 있어.....”
그리고 요코는 좀 전에 한 동작을 그대로 재현했다. 자연스럽고 눈에 넣기 힘들게 빨랐다. 요코가 부러웠고, 아름다웠다. 침을 꼴깍 삼켰다. 요코의 핸드폰 벨소리가 식탁 위에서 울렸다. 요코는 눈으로 웃으며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확인했다.
“예,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요, 알겠습니다.”
요코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은근함에 무게가 느껴졌다. 손님이라고 표현해주어 고마웠다.
“바쁜데 저 때문에..... 혼자 할 수 있어요.”“무슨, 친구하기로 했잖아, 요코!”
요코는 이름을 부르라고, 말끝을 올렸다.
“요, 코!”
“충성! 군인처럼 말고 부드럽게 불러, 한 번 더!”
“요코! 고마워요.”
나 돌과 요코의 사이에 위아래가 정해졌다. 요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충성심이 생겼다. 사랑하기에는 아주 멀리 있는 요코였다.
“개구리 권법을 내가 가르쳐 줄까?”
“정말요? 그럼 땡큐지요.”
“나한테 써먹으면 안 돼, 약속할 수 있지?”
“그런 일이 왜 생겨요, 절대 그런 일 없어요.”
요코가 새끼손가락을 세워 내밀었다. 나 돌이 손을 쓰윽! 바지에 문지르고 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을 걸고 난 후 요코는 엄지를 세워 부딪치며, 손을 흔들었다.
“도장, 약속 지키기!”
“예, 사부!”
나 돌이 크게 외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요코가 웃으며 나 돌의 허리를 잡고 위로 올렸다. 나 돌은 허공에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반복하면서 기합을 질렀다.
*..*
사거리를 돌아서 한강 쪽으로 ‘녹십자 약국’이라는 흰 바탕에 노란 글씨가 적힌 간판이 보였다. 종운은 2차선 도로 맞은편에 불이 환하게 켜진 약국을 주시했다. 약국 안에는 하얀 옷을 입은 남자 약사 둘과 여자 약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아이보리색 재킷을 입은 민지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홉 시 반에 닫는다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시 이십 오 분이었다. 나무에 기대고 서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간혹 약국을 응시 하였다. 민지가 키 큰 남자 약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큰 약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누구를 흉내 내느라 동작이 컸다.
“깝치고 있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가로수 나무 옆으로 기대고 섰다. 사거리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약국 안에 약사들이 하얀 옷을 벗었다. 민지는 책상을 정리하느라 빠르게
움직였다. 종운은 긴장한 표정으로 사람들 틈에 섞여서 푸른 신호등이 들어온 차도를 건넜다. 약국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녹십자 약국 간판에 불이 꺼졌다.
“가까워요, 걸어갈게요.”
“오늘은 제가 데려다 준다니까요, 부담 갖지 마세요.”
민지가 양복이 잘 어울리는 큰 약사와 골목 쪽으로 왔다. 종운은 잽싸게 골목에 입구가 있는 pc방 건물 안으로 숨었다. 건물 옆 주차장으로 키 큰 약사와 민지가 들어갔다. 종운이 두 사람 뒤를 몸을 웅크리고 따라갔다.
“차를 타고 같이 갈라고?.”
성질이 올라왔다. 혼자 고상한 척 하더니, 다른 놈하고 붙어 다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약사가 리모컨을 눌러 주차장 구석에 주차되어 있던 검정 승용차에 전조등을 깜박거리게 했다.
“걸어갈게요!”
“그러지 말고 타고 가세요.”
민지는 승용차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약사에게 걸어간다고 돌아섰다. 약사는 당황해서 문을닫고 민지를 잡았다. 종운이 중얼거렸다.
“걸어 갈 거면서 왜 따라와, 따라오길.....”
약사는 민지의 재킷을 잡고 돌려세웠다. 민지가 키 큰 약사를 올려 보았다.
“자신 없어요, 그만 갈래요.”
“제가 민지씨를 가볍게 생각하고 대한다고 오해 마세요, 그리고 오너라고 갑질한다고 생각 하는 건 아니지요? 관심과 호기심을 참기 힘든 상태를 사랑이라고 한다면, 저는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견디기 힘들 만큼이요.”
“저는 혼자에요, 박사님 부인이 차를 같이 탄 걸 아시면 큰일 나요, 감당하기 싫어요.”
“알긴 어떻게 알아요? 제가 책임지지요.”
“책임요, 어떻게요?”
“어떤 식으로든지. 민지씨!”
약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민지를 불렀다. 종운은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분노를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약사는 민지를 가볍게 품에 안았다. 민지는 약사의 품에 안겨 올려다보았다. 약사는 웃으며 민지와 눈을 맞추었다.
“저를 믿으세요, 함께 할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부담되고 싶지 않아요.”
민지는 약사의 품에서 나와 돌아서 걸었다. 종운은 얼른 차 뒤로 숨었다. 약사는 뒤에서 민지를 안아 돌려세워서, 품에 안았다. 민지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다가 멈추었다. 약사가 민지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 입술을 맞추었다.
“하지 마, 하지.....”
“미치겠어.....”
약사가 민지의 입술에 입술을 맞추고, 허리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었다.
“미쳤어, 저 여자가 미쳤어.....”
종운의 눈이 터질 것처럼 커졌다. 숨이 흔들리게 크게 내쉬었다.
약사가 민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해, 민지의 몸이 약사와 완전히 밀착했다.
“아유, 담배냄새.....”
민지가 약사가 입술을 붙이고 조금 지나자, 얼굴을 돌렸다. 숨어서 보던 종운이 민지의 말을 듣고 손을 입으로 가져가 호~ 숨을 불어서 담배 냄새가 나는지를 확인했다. 약사가 민지의 허리를 한 손으로 안고 차 쪽으로 갔다. 민지는 약사가 끄는 곳으로 끌려갔다.
“이러면 근무하기 곤란해져요.”
“뭘요,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안돼요, 이런 식으로 안돼요.”
민지가 약사가 잡은 허리를 손으로 떼어냈다. 숨어 보던 종운의 얼굴이 펴졌다.
“저를 못 믿어요? 그럴듯한 아파트 한 채는 마련해 줄거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사랑은 변해요.”
“미리 걱정 말아요, 알아서 할게요.”
“정약사하고는?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가 그만 뒀잖아요?”
“정미애씨요? 아무 관계도 아니었는데, 떠벌리고 다닌거예요. 약국 차려 나간 게 제
책임은 아니잖아요, 어쨌거나 개업하라고 일억 보탰는데요.....”
“일억이요? 정약사는 그런 말 안하던데요? 박사님한테 당했다고 욕하던데요?”
“연락하세요? 순 사기꾼이니까 믿지 마세요.”
“그래서 조심하려고요.....”
민지가 하는 말을 숨어서 듣던 종운의 얼굴이 펴졌다. 키 큰 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애씨 말을 믿으세요? 실망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지씨는 그런 소문에 신경쓰 지 않는 줄 알았는데... 해명 할 기회를 주세요.”
약사는 담담하게 사무조로 민지에게 말을 던졌다. 민지는 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들을게요, 오늘은 그냥 가세요.”
“그럼 제가 뭐가 됩니까?”
“들어가세요.”
민지는 돌아섰다. 약사는 조수석 문을 열고 민지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민지가 약사에게 끌려 조수석에 탔다.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이러면 곤란합니다, 타고 잠시만 얘기해요.”
약사는 조수석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탔다. 숨어 보는 종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승용차에 시동이 걸리고, 전조등이 켜졌다. 승용차가 주차장을 나가느라 도로 경계석을 넘었다.
“스톱, 서!”
종운이 주차장을 나온 승용차 앞을 두 팔을 벌리고 막았다.
1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