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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스윙 - 그해 우리의 헛 방망이질
작가 : 톰과제리2
작품등록일 : 2018.11.19

1990년 서울의 산동네, 이화동을 배경으로 한 성장 소설.
화가인 엄마는 이혼 후 미국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민을 갔고,
아빠는 새로 결혼한 여자와 강남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할머니의 미싱 일을 도우며 살던 단비가 아빠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나 위선적인 아빠와 새엄마에게 염증을 느끼고
학교에서 도둑 누명을 쓴 절친, 민희와 학교를 탈출하여
친엄마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여수로 떠난다.
그러나 마주하게 된 진실은 단비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민희는 실제로 지갑을 훔쳤고 위선적이기만 한 아빠에게도 하나의 진실은 있었다....

 
16. 남쪽 나라에서의 반전
작성일 : 18-11-19 11:03     조회 : 288     추천 : 0     분량 : 17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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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남쪽 나라에서의 반전

 

  그날 보도제작국은 지진과 해일, 폭발물, 연쇄 충돌 사고 같은 대형 사건 사고들이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터져서 하루 종일 소란스러웠다. 누구 말대로 일진이 사나운 날일지도 몰랐다. 회사 사람들은 다른 날 보다 눈에 띄게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동찬은 다른 회사 사람들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혼자 자신의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동찬은 회사일과는 상관없는 일로 전화를 다섯 통 쯤 돌렸다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날 오후 늦게 윤숙이 전화를 해왔다. 전화를 받아보니 단비 때문에 학교에서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윤숙의 말에 의하면 단비가 도벽으로 벌을 받고 있던 아이를 도망시켰다고 했다. 그것도 밧줄을 타고 학교 삼 층에서 뛰어 내려 몰래 교문을 나간 다음 집에 연락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딸이 학교에서 얌전히 공부하고 있을 줄 알았던 동찬의 입장에서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거기다가 윤숙이 덧붙인 이야기는, 자신은 단국이의 작은 이모, 즉 여동생이 미국에서 모처럼 귀국 하는 날이라서 단국이 데리고 공항에 나가봐야 한다고 것이었다. 그러니 단비의 행방은 동찬 보고 찾아보라고 했다. 동찬은 윤숙에게 서운함을 느꼈지만 뭐라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단비 이야기에 놀란 동찬은 윤숙과 전화로라도 입씨름을 할 만한 기력이 없었다.

 

  전화를 끊은 동찬은 막막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단비가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온 이후 단비의 행동은 늘 동찬의 신경을 건드렸었다.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자식이라도 역시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것과 자신의 허리춤 옆에 두고 보는 것은 달랐다. 단비의 말투, 눈빛, 움직임에서 폭발을 향해 가는 불씨가 잠복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한 때의 사춘기적인 반항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고 황주미에게 있었던 끼와도 다른 것이었다. 또 아직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때가 되면 단비의 모습은 한 번 더 바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학교에서 말썽을 피울 것이라는 예상은 할 수 없었다. 단비는 자라오면서 말썽을 피운 적이 없었다. 도벽이 있는 애와 함께 밧줄을 타고 학교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너무 황당했다.

 

  동찬은 학교에 직접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담임은 이미 퇴근했다고 했고 당직인 사회 선생과 통화가 되었다. 단비는 원래 벌을 받을 짓을 안 했는데 그저 친구가 도망가는데 같이 따라 나섰다고 했고, 삼 층 복도에서 아이들이 밧줄이 아니라 소방 호스를 타고 내려와 도망갔다고 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지만 뭐라 항의할 입장은 아니라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동찬은 민희라는 아이의 집과 단비 친구들 집으로 전화를 돌려서 이미 귀가한 아이들로부터 그날 일에 대해서 물었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최근에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 했고 그 날 일도 단비는 잘못 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퇴근이 가까워질 무렵 자신이 몇 십 분 전에 통화를 했던 민희네 집에서 전화가 왔다. 민희 엄마가 민희한테 전화가 왔고, 무작정 하루 여행을 하고 오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동찬은 그 말을 듣고 전화를 어디서 했는지, 아이들이 어디로 간다고 했냐고 물었지만, 그 것은 알지 못한다고만 했다. 동찬은 민희네 쪽에서 '민희가 단비와 여행을 간다'는 말을 남겼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뭔가 올 것이 왔다는 막연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동찬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일단 동네 경찰서에 전화를 해두었다. 정식 신고접수가 될 리가 없었지만 동찬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퇴근 후에 잡혀 있었던 선약도 취소하고 회사를 나섰다. 동찬은 자신의 차도 그대로 놓고는 멍한 얼굴로 여의도를 지나서 어느새 옆 동네 역 근처의 어느 거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이동을 한 것처럼 동찬은 회사 문을 나선 다음 바로 낯선 풍경의 거리에 서있었다.

  동찬은 자신이 왜 그 곳에 서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거리는 노숙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거리의 골목 어귀나 건물 처마 아래에는 술병을 들고 있거나 술병을 등 뒤로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동찬을 흘끔흘끔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동찬이 그들을 볼까봐 일부러 퀭한 눈으로 땅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길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사람도 보였다. 저런 사람은 곧 경찰들한테 더 깊숙한 골목으로 쫓겨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동찬은 알고 있었다. 동찬은 저 더러운 차림의 사람들보다야 덜 하겠지만 그만큼 처참한 기분으로 거리에 서있었다.

  잠시 후 동찬은 그 거리를 빠져나와 술집과 음식점이 빽빽이 들어선 유흥가의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호객꾼과 술꾼들 그리고 웨이터와 아가씨들이 보였고, 경찰들은 발걸음은 느릿하지만 눈동자는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찬은 그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십 년 쯤 유행에 뒤떨어진 원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간간히 보았다. 중년의 남녀가 젊은 연인들처럼 허리를 잡고 안고 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러다가 한 여자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동찬의 눈에 들어왔다. 유행에 뒤쳐졌는지 앞서가는지도 알 수 없고, 무채색인지 유채색인지도 알 수 없는 원피스를 입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 황주미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토록 지워버리고 싶었던 사람. 그리고 푸른 바다가 동찬의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 황주미가 꼭 보여주고 싶다고 졸라서 황주미의 친정이랄 수 있는 여수의 바닷가를 한 번 가보았다. 기차를 타고 갔던 그 시절은 동찬과 황주미가 제일 행복했고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보았던 바다가 지금 동찬의 시야에서도 넘실거리고 있었다.

  동찬은 살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 사이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 거리는 아니겠지만 어딘 가에서 단비도 답이 없는 물음을 가슴에 안고 헤매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동찬은 단비의 증발은 단비가 던진 수수께끼인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이 던진 수수께끼라는 결론을 스스로에게 내렸다. 매듭을 묶은 것은 단비가 아니라 자신이었으므로 동찬은 스스로 묶은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단비가 안전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는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동찬의 입술은 타들어 갔다. 동찬은 아까 봤던 노숙자처럼 땅바닥에 구겨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 순간만은 진심 그러고 싶었다. 동찬은 버스 터미널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터미널 대합실에 간 다음에는 돈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출발 시간까지는 거의 세 시간이 남았다. 단비와 민희는 역 주변의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출입문이 투명해서 아예 안이 들여다 보이는 밝은 분위기의 오락실을 발견하고 거기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 가게에는 몸을 써서 하는 오락기계가 많이 있었다. 단비와 민희는 미니 농구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나 움직이는 자석을 공 삼아서 골대에 집어넣는 손으로 하는 축구 같은 게임을 했고 곧 빠져들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오락이 그래도 자신들이 길 위에 있다는 불안을 덜어 주었다. 가방을 구석에 던져 놓고, 단비와 민희는 미친 듯이 놀았다. 그러다가 자정이 가까워지자 단비와 민희는 가방을 챙겨 들고 역으로 이동했다.

 

  단비와 민희는 심야 기차를 기다리며 서울역의 어두운 플랫폼에 서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성인이라기엔 어정쩡해 뵈는 단비와 민희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어깨는 움츠러들었지만 단비는 다리에 힘을 주고 어둠 속에 서있었고, 민희는 발로 바닥을 치면서 긴장감을 풀었다. 곧 철로 저쪽의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단비는 침을 삼키면서 속으로 감격을 했다. 엄마의 흔적을 찾으러 간다는 생각 보다는 그저 떠난다는 생각이 단비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단비와 민희는 기차에 올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기차가 출발하자 두 사람은 여행에 대한 기대로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민희는 험난했던 하루의 피곤이 밀려왔는지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금세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잠들어 버렸다. 그러나 단비는 들뜬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아서 잠을 못 자고 창밖의 불빛과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 쯤 왔을까. 기차는 가로등과 빌딩의 불빛이 비추는 도시를 빠져나와 어둠 밖에 보이지 않는 들판을 지나가고 있었다. 자정을 분명 넘겼으니 다음 날이었다. 분명 '어제'는 단비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될 것이지만, 어떤 느낌으로 기억될지 기차를 타고 여수를 향해 가는 그 순간에도 확신이 안 섰다. 두려웠던 순간과 희열을 느낀 순간도 있었지만 아직 전 날은 끝이 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여수에 도착을 하고 돌아와 봐야만 알 것 같았다.

  단비는 멀지 않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면 야단과 반성, 책임, 이런 단어들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할 것임을 알았다. 이모 할머니를 찾아 가는 이 여행은 분명 최종족으로 그렇게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끝까지 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그 순간 알 수 없다고 단비는 생각했다.

 

  단비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음료와 과자를 파는 카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승객들 대부분이 잠이 든 시각이라서 판매원은 낮은 목소리로 과자와 음료수 이름을 외치면서 카트를 끌고 오고 있었다. 단비는 음료수를 사려고 지갑을 찾았다. 기차표와는 따로 가방 안에 두었던 지갑, 아무리 가방과 겉옷을 뒤져도 지갑이 나오지를 않았다. 입이 순식간에 마르고 갑자기 피가 거꾸로 온 몸에 낭패감이 엄습했다. 단비는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그제야 알았다.

 

  “민희야, 일어나봐! 지갑, 지갑이 없어.”

  “뭐?”

  “우리 큰 일이야. 나 어디서 지갑 잃어버렸나봐. 이러면 돌아올 표도 못 사는데....”

 

  음료수 판매원이 카트를 밀고 단비와 민희를 지나가버렸다. 민희는 부스스한 얼굴로 잠에서 깨서 단비가 배낭 가방을 홀딱 뒤집는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오락실에서 걔네들이었어! 느낌이 이상했어."

  "무슨 소리야?"

  "농구 골대에 공 넣기 할 때 구석에서 전자오락하던 애들 기억 안 나냐?"

 

  민희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았지만 딱히 그 애들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소매치기이냐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지갑이 단비에게 없다라는 것이 기 막힌 일이었다. 단비는 울듯한 얼굴이 하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민희가 태연스런 얼굴로 잠바 주머니에서 지갑으로 쓰고있는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쥬스는 사올 테니 넌 여기 앉아 있어."

 

  민희는 단비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돌아갈 표도 못 사게 생긴 상황에 대해서 별로 걱정을 안 하는 듯 보였다. 민희는 가버린 음료수 카트 쫓아 옆 칸으로 넘어갔다. 단비는 너무나 차분한 민희의 반응에 살짝 약이 올랐지만 그냥 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이온 음료 한 병과 탄산 음료 한 병을 사들고 민희가 왔다. 그 때까지도 단비는 민희 손에 들려 있는 녹색의 개구리 캐릭터 주머니를 보질 못했다.

 

  “울지 말고. 표 얼마였지? 이 돈으로 살 수 있을 거야.”

  “무슨 돈?”

 

  그 때 단비는 보게 되었다. 민희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초록색 바탕에 개구리 캐릭터가 그려진 주머니였다. 민희는 자리에 앉은 다음 부끄러움도 없이 그 주머니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턱 걸쳐 놓아두었다. 단비는 충격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것은 단비에게는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민희. 너.... 이거.... 반장 꺼 아냐?”

  “응. 맞아.”

 

  잠시였지만, 민희의 눈은 어두운 광채로 번뜩였다. 분명 단비가 지금까지 알던 민희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단비는 민희가 무서워졌다.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창 밖 어둠 보다 더 짙은 어둠이 고여 있는 굴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단비의 머릿속은 고장난 기계처럼 작동이 멈춰있었다. 단비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단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 칸으로 뛰어 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열차 칸과 칸이 연결 되는 부분으로 갔다. 승객이 머무는 칸에서 빠져 나오니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리고 찬 바람이 목 안으로 파고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지만 밤이 깊어가자 단비는 육체적 피곤을 물리칠 수 없었다. 졸음이 몰려와 무릎이 꺾였다. 그래도 단비는 객차 안으로 돌아가서 민희 옆에 앉고 싶지 않았다. 단비는 배신감에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있다가 차갑고 불편한 철판 위에 주저앉아 졸았다. 단비의 인생에서 그 보다 더 신산스런 밤은 없었다.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여수에 도착했다. 낯 선 곳에 왔다는 긴장감에 단비와 민희는 함께 기차에서 내렸다. 단비가 앞장 섰고 몇 발짝 뒤떨어져서 민희가 여수역에 발을 내딛었다. 새벽의 상큼한 공기가 코와 폐를 자극했지만 단비는 어수선한 밤을 지내서인지 토할 것만 같았다. 단비는 여수에 첫발을 이런 최악의 기분으로 내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양치를 안 한 입에서는 냄새가 났고, 얼굴에 물만이라도 묻혀 보겠다고 들어간 공중 화장실에선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역 앞은 평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단비는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역 앞에서 서성였다. 지난 밤 민희의 녹색 개구리 주머니를 본 순간부터 단비의 목표는 민희에게 분노와 경멸을 표출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이모할머니의 집을 찾아 간다는 애초의 목표는 시시하고 하찮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 단비가 한 생각은 파출소를 찾아 가는 것이었다. 마침 길 건너편으로 파출소도 눈에 띄었다. 그 곳에서 경찰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서울 집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면 전화 한 통화 정도는 쓸 수 있도록 해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동찬이 나머지는 다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었다. 단비는 그것만이 이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동찬과 연락이 되는 순간, 단비는 동찬에게 자존심 구겨가며 구구절절하게 여수로 오게 된 이유, 그러니까 이모 할머니의 편지와 학교에서 있었던 황당했던 사건에 대해서 해명해야했다. 동찬은 단비의 이야기를 대강 듣고는 이모 할머니고 나발이고 당장 서울로 오라고 호통을 칠 것 같았다. 경찰들은 단비와 민희를 잡아놓고는 꼼짝 없이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도록 만들 것 같았다.

  동찬의 반응을 생각하자 그래도 이왕 어렵게 내려왔는데 민희에 대한 증오라는 기분에 휩쓸려 그냥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은 냉정하지 못한 일처리였다. 단비가 이렇게 복잡한 생각 속에 서있는데 등 뒤에서 민희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야, 너 서울엔 어떻게 갈 거야? 여수 시내를 돌아다닐 버스비는 있어?”

 

  단비가 돌아서서 뻔뻔스런 민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민희는 돈도 있겠다, 혼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으나 단비 주위에 머물러 있었다. 단비는 '왠 상관이냐?’라고 호기롭게 받아쳐야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단비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민희가 다 안다는 얼굴로 범죄의 증거인 녹색 주머니를 흔들면서 단비 앞길을 가로 막았다.

 

  “그냥 돌아가기는 싫지?"

 

  민희는 단비의 속마음을 딱 집어 말한데 이어, 단비가 지나칠 수 없는 제안까지 했다.

 

  "일단 이 돈으로 돌아갈 기차표도 끊고 밥도 사먹고 여비로 쓰자. 돌아가서 채워 넣으면 되잖아.”

 

  단비는 결국 민희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단비는 민희와 역 안으로 돌아가서 기차표를 산 후, 민희와 근처 식당에 앉아서 국밥까지 같이 먹고 말았다. 서먹서먹했지만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혼자서 다니는 것보다는 민희와 같이 다니는 것이 더 나았다.

 

  단비와 민희는 주소가 씌어진 메모를 들고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 이모 할머니 집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처음에는 창밖으로 차분하고 소박한 도시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버스가 시 외곽으로 나가자 바다와 밭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풍경은 단비 마음속의 혼란스러움을 누그러뜨렸다. 단비와 민희는 별 말 없이 창밖을 보았고 마침내 목적지인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은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고, 조금 떨어져서 보면 집들은 텃밭사이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마을 입구엔 코스모스와 들국화 등의 가을꽃이 뒤엉켜 피어있는 들판이 있어서 농촌 마을이라기 보다는 관광지 같은 느낌도 조금 주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집을 찾기는 의외로 쉬웠다. 마을 입구 쪽에 있는 마당 딸린 단층 양옥이었다. 단비는 이모 할머니가 아직도 그 주소에서 사는지 아닌지를 확신을 할 수가 없어서 그 집 문을 두드릴 때 가슴이 떨렸다.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데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실망하고 돌아서려는데 사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마을 길에서 다가왔다. 여자는 넓은 이마에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미소 짓는 눈초리엔 근심이 옅게 배어있었다.

 

  “누구신데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세요?”

  “저희는 서울에서 이 분을 찾아왔습니다. 이 분 댁이 맞나요?”

 

  단비는 낡은 편지봉투에 씌어져 있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그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스쳐갔다. 곧 그 여자는 차분함을 되찾았고, 대답을 듣는 순간 단비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네, 맞아요. 서울에 남아 있다는 주미의.....”

  “네네. 저 오 단비라고 해요. 황주미 씨 딸이에요.”

 

  그 여자의 얼굴엔 곤란한 표정이 역력했으나 애써 누르는 듯 보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밖엔 빛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거실은 응달이 져서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단비와 민희는 낡은 소파에 앉았고, 앞에는 여자가 마시라고 내온 주스 두 잔이 있었다. 여자는 시원스럽게 먼저 말을 쏟아내지는 못하고 단비와 민희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단비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잠시 있었는데 여자가 침묵을 깨고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작은 사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분을 말하는 거 같은데,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맞게 오긴 왔지만 너무 늦게 온 셈이었다.

 

  "고인이 되신 분을 생각해서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실은 학생한테 이모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이기도 하고."

  "네?"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고. 그래서 황주미는 어렸을 때 힘들게 클 수밖에 없었어요."

 

  단비는 당혹스러움과 혼란함에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도 단비는 가까스로 평온한 얼굴을 하면서 물었다.

 

  "그게 무슨...."

  "학생이 어려서 세세히 말하기가 그렇네."

  "나 안 어린데...."

 

  이모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라니. 단비가 예상했던 내용이 아니었다.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단비가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직접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황주미 씨.... 엄마가 미국에서 화가로 사는 것은 아시죠?"

 

  단비는 막상 황주미를 엄마라고 부르려니 버릇이 안 되서 어색해서 혀가 꼬이는 것을 느꼈다.

 

  "...."

  "엄마와 연락하세요? 주소나 전화번호 알고 싶어서요."

  "우리도 연락은 안 해요. 여기까지에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자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 몸을 돌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성적으로 따져 본다면 그것이 예의상이던 사태파악을 위해서든지 그 여자가 누군지, 할머니나 엄마와의 관계가 어떤지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단비에게는 그럴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여자가 황주미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이 말을 마무리했을 때 단비의 마음속엔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무감 때문에 단비의 마음속은 폐허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 왔는데 이게 끝이라니.... 단비는 잠시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앉아있었다. 민희는 놀라울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고 그냥 단비 옆에 기둥처럼 앉아 있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간 여자는 한 동안 나오지를 않아서, 손님들 보고 가라는 소리를 한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민희가 눈짓으로 현관문을 가리킬 때 즈음, 여자가 카드봉투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옛날 사진 중에 남아 있는 거에요. 여기에 우리 집 전화 번호 적어놨으니까 서울에 가자마자 잘 도착했다고 전화 하고. 먼 길 인데 걱정되서 그러니까."

 

  여자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더 이상 말 할 게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카드 봉투를 받은 단비는 봉투 안을 살짝 열어 보았다. 황주미가 어린 시절에 어딘가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상상 속의 얼굴과는 분명 달랐지만 또 신기하게도 낯설지는 않았다. 구체적으로 처음 보는 엄마의 얼굴이었지만 단비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단비는 엄마의 현재를 알고 싶었던 것이지 과거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단비는 카드 봉투 안의 내용물만 확인하고 대충 덮었다. 단비는 사진이라도 받아드는 것에 만족을 해야 했다. 단비와 민희는 서울에 도착하면 잘 갔다는 전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그 집에서 나섰다.

 

  단비와 민희는 작은 밭과 공터가 있는 동네 길을 지나 큰 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엄마의 친척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쩌면 당사자를 직접 만나지 않는 한 아무리 대단하고 구체적인 말을 들어도 허무 할 수밖에 없는 지도 몰랐다. 그런데 당사자를 만날 길은 모두 막혀있는 셈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단비는 공터에 무수히 피어 있는 가을꽃들을 무심히 지나쳐갔다.

  그런데 그 때 단비는 이상한 시선이 자신의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기분을 느꼈다. 뒤돌아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연하게 단비는 이상한 여자를 보았다. 잡초와 꽃들이 무성한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던 이상한 여자가 단비를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아마도 단비와 민희가 이 마을에 이방인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 여자는 많은 색깔이 담겨 있는 유랑극단의 무대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기괴한 행색이었다. 단비는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는 여자의 멍한 눈초리가 무서웠다. 민희도 뭔가 기분이 안 좋은지 슬슬 뒷걸음을 치면서 뛸 준비를 했다.

 

  "뛰자!"

 

  단비는 민희의 말에 따라 아무 이유 없이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어서 단비는 그 '유랑극단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틈도 없었다. 뛰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허둥지둥 그들의 최종 목적지였던 작고 조용한 마을을 빠져나왔다. 허망한 여행의 결말이었다.

 

  단비와 민희는 큰길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바닷가를 따라 난 도로를 계속 달렸다. 도로 아래로는 깎아놓은 듯한 절벽이 있는 곳도 있었고, 완만한 경사면에 층층이 밭을 일구어 놓은 곳도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절벽과 푸르른 밭들,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바다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이 창 밖에 계속 펼쳐졌다. 황주미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이 바닷가를 보고 자랐다면 그 풍경을 마음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어 할 것 같았다.

  그 때 단비는 어렸을 적에 봤던 황주미의 바닷가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주미는 그 곳을 보고 그린 것이 분명했다 그 풍경과 느낌을 화폭에 담아내려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우수가 깔려 있는 바닷가 풍경. 화가, 황주미는 지금도 이 바닷가를 그릴까? 단비는 황주미가 분명 지구 어딘가에서 이 바닷가를 그릴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에메랄드 바다가 있는 그림과 그 그림 옆에서 놀고 있던 아이를 잊을 리가 없었다. 황주미는 여기서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단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버스 차장에게 손을 흔들면서 내린다는 표시를 했다. 민희도 따라 내렸다. 두 사람은 해안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단비는 문득 아침부터 아무 소리 않고 자신을 따라온 민희를 보았다. 하루종일 무뚝뚝한 얼굴로 있던 민희는 풍경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 잔잔한 미소를 띠고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민희가 가슴에 쌓였던 울분을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날려 보내려는 듯 조용하면서도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단비도 수평선 너머를 보면서 민희처럼 깊은 심호흡을 했다.

  지난 밤에 있었던 녹색 주머니 일은 단비의 마음을 휘저어놔서 단비의 마음을 뿌연 흙탕물처럼 만들어 놓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앙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다시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비는 민희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한테 새로운 가정이 생겼는데 내가 미국으로 찾아가면 엄마가 정말 좋아할까? 나 부담 주기는 싫거든.”

  “조용히 찾아간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새 식구들 모르게.”

  "작업실이나 화랑로 찾아가면 분명 만나 줄 꺼야."

  "근데 아까 그 여자가 미국 주소 모른다고 했잖아."

  "아직 희망이 있어. 미국에 가서 전시회를 열었던 화랑을 찾아갈꺼야. 거기엔 분명 연락처가 있을 거고."

 

  민희는 단비의 질문 따위에는 관심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

  단비는 문득 아침부터 진짜 하고 싶은 말이 하고 싶어졌다.

 

  “민희야, 나 한 가지 이해 안 되는 게 있어.”

  “뭐?”

  “초록색 주머니, 반장 돈주머니 말이야. 그걸 왜 나한테 보여줬어? 그 주머니 갖고 다니는 거, 꼭 ‘나 나쁜 짓 했어요’라고 말 하는 거잖아. 돈만 빼고 그 주머니 버릴 수 있는 기회는 많았어. 내 말이 틀려?”

 

  민희가 순간적으로 지난 밤 기차에서 어두운 광채로 번뜩이던 눈빛을 보여주었던 때처럼 단비를 쏘아 봤다. 순간 단비는 다시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꼈다.

 

  “후훗. 들켰어. 아니 들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단비는 민희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단비의 마음속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혼탁해지고 있었다. 민희가 계속 말을 했다.

 

  "그 사람을 시험하고 싶었거든.”

  “누구를....”

 

  단비의 머릿속엔 지난밤이 아니라 이 학년이 되면서 일어났던 여러 기괴하거나 의문스러운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런 때도 있는 법이라고 넘겼었는데 쉽게 밝혀질 수 없는 이유가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강기중. 도둑으로 몰리면 그 사람은 내 편을 들어 줄까. 아니면 나를 벌 주지 못해 안달을 할까, 시험해 보고 싶었어. 히히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강 씨고 나는 최 씨니깐 학교에선 모르는데 말이야."

  " 아빠가 집에 안 계신 것이...."

  "우리 엄마가 최 씨야. 호적 엄마쪽으로 되어 있어."

 

  바늘귀를 빠져나온 빛의 가닥 같은 미세한 빛이 단비의 머릿속을 비추었다. 그 빛은 단비에게 따라오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단비는 입이 얼어붙어서 잠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비는 이렇게 평화로운 바닷가에서 민희의 쓰라린 고백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 사람 너를 처음부터 알았을 거 아냐?”

  "나중에 이름 보고 알았겠지. 처음엔 내 얼굴도 몰랐을 거야."

  "어제 사 층 상담실에 가둔 것도 그 사람?"

  “처음에는 학주 학생주임

 가 끌고 교무실 구석에 꿇어 앉혀놨는데, 두고 보는 것이 짜증이 났는지 사 층 상담실로 몰고 가더라. 뭐, 처음부터 알면서 아는 척도 안 한 인간인데. 흑흑.... 처음부터 그냥 다 망치고 싶었어.”

 

  먼지와 땀이 배어 있는 민희의 볼 위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단비 마음도 저려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단비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민희에 대한 의구심과 마음의 앙금 이런 것들이 가라앉자 마음이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단비는 홀가분한 정도가 아니라 기뻐서 뛰고 싶을 지경이었다.

  단비와 민희는 버스를 잡아타고 여수 시내로 돌아왔다.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한 낮의 열기가 철로 위에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비와 민희는 겨우 반나절 야외를 다닌 셈이었는데 얼굴이 햇빛에 그을려 있었다. 이제는 기차를 잡아타고 돌아갈 일만 남았다. 이번에도 민희가 먼저 집에 전화를 해서 두 사람이 무사히 서울로 돌아간다는 말을 했다.

  단비는 몸과 마음이 한층 가벼워져서 집과 학교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겁이 나지 않았다. 돌아가면 책임져야 할 일이 남아 있지만 단비는 차분히 해결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단비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어느덧 기차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단비와 민희는 마지막으로 역을 둘러보면서 기차에 올랐다. 만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떠나자니 아쉬웠고 여전히 에메랄드 빛 바다가 단비의 눈에 아른 거렸다. '아, 여수....' 마음속으로 도시 이름을 부르는데, 단비 가슴 한 켠이 저며왔다.

  기차 안에서 단비와 민희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창 밖으로 서서히 노을이 지고 어둠이 벌판에 깔리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기차는 무심하게 질주했다. 민희가 문득 낮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니가 언젠가 얘기 해줬던 동화 생각이난다. 펭귄 주제에 추위를 싫어한 애 있잖아."

  "그래서 빙하 타고 적도로 탈출했었지."

  "행복한 결말이었나?"

  "응. 존재를 알지 못했던 적도 펭귄 친구도 만나고 소원대로 야자수 쥬스 마시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어."

  "난 그 동화가 재미있었어. 펭귄이 웃겼거든."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민희의 목소리가 단비의 귀에 자장가로 들렸다. 단비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단비와 민희가 단잠에서 깨어났을 때, 완전히 어두운 저녁이었고 기차는 서울에 거의 다와 있었다.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단비와 민희는 피곤한 얼굴로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했다.

 

  단비와 민희가 말없이 사람들 틈에 섞여 서울역 밖으로 빠져 나왔을 때, 출구 근처에는 초조하게 딸을 기다리고 있던 민희 엄마가 있었다. 단비는 민희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민희는 단비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자신의 엄마 쪽으로 달려갔고, 두 사람은 함께 택시 정류장 쪽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단비는 공중전화를 찾아서 여수의 할머니 집에 전화를 했다. 잘 도착했다는 말을 남기자 그 여자는 다행이라고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단비는 그제야 그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 집안으로 시집을 온 여자인지 아니면 할머니와 직접 혈연관계가 있는 식구인지 단비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채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큰 물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단비는 역 출구 앞 광장에서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여수에서는 당당히 동찬의 아파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때 단비에게 생각 난 곳은 김 여사 집이었다. 김 여사라면 뭐라 말 안 하고 단비를 맞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서 두리번거리는데, 길 저쪽에서 단비를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동찬이었다.

 

  "여수에 갔다 왔다고?"

  "네."

 

  동찬도 단비도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지 몰라서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아빠 집 말고 할머니 집으로 가면 안 되요? 거기서 며칠만 지낼게요."

  "일단 차로 가자."

 

  동찬의 차는 근처 빌딩 지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단비와 동찬은 자동차 운전석과 보조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가고 들어오는 차량이 없어서 지하 주차장 안은 공동묘지처럼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동찬은 재빨리 시동을 걸지 못하고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앞만 보고 있었다. 결국 이야기를 시작한 쪽은 단비였다.

 

  "아빠, 여수 엄마 쪽 친척들과 따로 연락하세요?"

  "아주 가끔 한다."

  "왜 그런 말씀은 안 해 주셨어요?"

  "사정이 있었다. 가보니 거기선 뭐라고 하든?"

  "미국에 있는 엄마랑 연락 안 한 대요. 그래서 연락처는 모른대요. 그리고 이모 할머니, 엄마의 엄마라고 하던데. 왜 외할머니가 있다는 말은 안 하신 거에요?"

  "....."

  "엄마 젊었을 때 사진 두 장 받아왔어요. 엄마 어떤 사람이었어요?"

  "사진 받았다면 사진으로 보면 되잖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냐고요?"

 

  대화는 수렁에 바퀴가 빠진 자동차처럼 앞으로 굴러가지 못하고 공회전만 하고 있었다. 결국 동찬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동찬은 황주미에 관해서라면 시원하게 밝히지 않고 늘 도망쳐왔고 그 순간에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떠안고 있는 것 같은 단비는 절망스러웠다.

 

  동찬과 단비를 실은 승용차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 나와 지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단비는 여수에서 받았던 사진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가방 안에 있던 카드봉투를 다시 꺼내 보았다. 십 대 후반의 황주미 사진 세 장이 봉투에서 나왔는데, 첫 느낌은 낯설었다. 단비는 단비 자신이 느끼기에도 아빠 쪽을 닮은 듯 했고 엄마와는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낯설면서도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비는 사진을 가방 속에 다시 넣고 오른 쪽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동차는 도심 밤거리를 유유히 빠져 나가고 있었다. 방향을 보니 동찬의 집이 아니라 김 여사의 집을 향해 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때였다. 단비는 창 밖 어둠 속에서 어떤 얼굴이 불쑥 솟아나서 단비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고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간 다시 그 얼굴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다가 사라져갔다. 단비는 정신이 몽롱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수 할머니 집에서 나오면서 봤던 그 유랑극단 옷차림의 중년 여자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이상한 여자를 맞닥뜨린 순간은 눈빛이 이상해서 도망치기 바빴지만 지금 생각하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로 사진 속의 얼굴이었다. 단비는 황주미를 보고 온 것이었다.

  동찬은 무슨 생각을 하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앞만 보면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단비의 눈에 자동차 창밖의 네온사인 불빛이 혼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분 동안 단비는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을 꾹 누른 채 있어야 했다. 많은 말들이 입술을 달싹이게 만들었지만 입술을 움직여 소리를 내지 못했다. 결국 김 여사 동네 입구에서 차를 멈추자 단비는 간신히 한 마디를 했다.

 

  "아빠, 나 만나봤어요. 그 동네 길가 꽃밭에서요."

  "그랬구나."

 

  자동차는 김 여사의 집을 올라가는 길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차가 멈추자 단비는 다시 봉투 속의 사진을 꺼내봤다. 분명히 길가 꽃밭이 여자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동찬도 그 사진을 입술을 깨물고는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단비가 갑자기 생각난 듯 기습적으로 동찬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아세요?"

  "모르신다."

  "아, 그랬구나."

 

  동찬의 눈은 단비가 차에서 내릴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비가 차에서 내려서서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찬에게 물었다.

 

  “근데 할머니는 엄마가 미국에서 화가로 성공한 줄 아시잖아요! 미국남자랑 재혼도 하고. 왜 할머니한테 말 안 하셨던 거예요?"

 

  동찬은 짧은 한 숨을 쉬고는 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질문이라기보다는 단비의 비명일지도 몰랐다. 동찬은 한 숨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단비는 침묵이 길어지자 자동차 문을 닫았다.

 

  김 여사는 한 밤중에 단비가 나타나자 적잖이 놀란 얼굴로 단비를 맞았다. 전 날 동찬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단비는 김 여사에게 여수에 갔다 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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