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일반/역사
스윙 - 그해 우리의 헛 방망이질
작가 : 톰과제리2
작품등록일 : 2018.11.19

1990년 서울의 산동네, 이화동을 배경으로 한 성장 소설.
화가인 엄마는 이혼 후 미국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민을 갔고,
아빠는 새로 결혼한 여자와 강남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할머니의 미싱 일을 도우며 살던 단비가 아빠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나 위선적인 아빠와 새엄마에게 염증을 느끼고
학교에서 도둑 누명을 쓴 절친, 민희와 학교를 탈출하여
친엄마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여수로 떠난다.
그러나 마주하게 된 진실은 단비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민희는 실제로 지갑을 훔쳤고 위선적이기만 한 아빠에게도 하나의 진실은 있었다....

 
12. 새로운 사건의 발단
작성일 : 18-11-19 10:58     조회 : 277     추천 : 0     분량 : 8205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12. 새로운 사건의 발단

 

  단비가 동찬의 집에서 지낸지도 일 년이 훌쩍 넘었다. 단비는 아빠에게 말한 대로 겨울 방학 동안 매일 학교 독서실에 나갔다. 이제는 아파트 근처 동네 길이나 건물들도 눈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 동네에서 단비가 좋아하는 것은 피자 가게와 세련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또 백화점과 쇼핑하기 좋은 가게들의 편리함에 단비도 서서히 길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단비는 단지 입구의 '상가 건물'이 세상에서 제일 멋없는 건물 중 하나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학교 독서실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온풍기의 더운 바람과 난로가 함께 있어서 실내는 따듯했다. 난로 위엔 커다란 주전자를 두고 물을 끓여 습도 조절을 했고, 아이들은 가끔 난로 위에 귤껍질을 태워 실내에 향긋한 냄새가 퍼지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조리실에서 들고 온 큰 냄비로 팝콘을 튀겨 먹기도 했다. 단비는 민희에게 전화를 걸어서 학교 독서실에서 지내는 것도 꽤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민희는 가게를 봐야 한다며 한사코 독서실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단비는 매일 오전 독서실에서 대충 시간을 보낸 다음 민희네 비디오 가게로 갔다. 민희네 가게는 점심 먹고 민희가 문을 열었다. 단비가 오는 오후는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 대였다. 겨울 방학 내내 단비는 민희와 가게 비디오로 영화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영화 홍콩영화, 헐리우드, 특별히 가리지 않고 보았다. 영화마저도 보기 싫은 날엔 음악이나 들으면서 근처 분식점에서 파는 순대와 떡볶이를 사다 먹었다. 단비가 지낸 방학들 중에서 제일 즐거웠던 방학이었다. 민희네 가게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할머니, 김 여사 집이었지만 단비는 딱히 명절이 아니면 김 여사 집엔 찾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겨울 방학이 끝나고 곧 새 학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날은 학생들이 봄방학이라고 부르는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학교는 공부를 해보겠다는 일부 학생들의 요청으로 봄방학 일 주일 동안에도 독서실을 개방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안 나왔지만 각 반에서 지원한 몇 명의 아이들이 모이니 그래도 꽤 많은 수가 되었다. 그 애들이 학교에 공부를 하기 위해 나왔다. 그러나 봄방학의 마지막 날, 교문은 닫혀 있었고 정문 옆 수위실엔 아무도 없었다. 교문 앞엔 수 십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고, 몇 몇은 교문의 쇠창살 틈으로 학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특히 학생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아무도 없는 고요한 학교 운동장이나 교무실 창문이 아니라, 운동장 구석 주차장에 있던 낯선 검은색 세단들이었다.

  그 차들은 분명 중산층 집에서 타는 종류도 아니었고, 기업 사장님들이 타는 차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더 과시적인 빛깔이 차체를 감싸고 있었다. 교문 앞에 모여선 학생들 사이에선 이미 그 차들의 주인은 어깨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교장이 운동장 땅을 저당 잡혀서 사채를 썼는데 못 갚아서 어깨들이 쳐들어 온거라니까."

  "운동장 내놓으라고?"

  "학교는 교육부 껀데 무슨 저당?"

  "그건 공립의 경우고 우리 학교는 사립이잖아,"

  "그럼 우리 학교 운동장을 빚쟁이한테 잘라 준다는 거야?"

 

  아이들은 그날 교문 앞에서 불만에 찬 얼굴로 이런 소리를 떠들다가 흩어졌다. 그러나 학기 중간에 생긴 일이 아니다 보니 그 날의 일은 유야무야 묻혀갔다. 교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비밀로 묻혔다. 물론 후에 운동장 한 귀퉁이가 어딘 가로 팔려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날 있었던 일은 이 학년이 되어 단비에게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예고하는 작은 사건이었는지도 몰랐다.

 

  이 학년, 삼월 첫 등교일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교실을 찾아가서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단비와 민희는 운 좋게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단비와 민희는 같은 반이 된 다른 애들과 같이 새 교실을 찾아가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약간 흥분한 상태에서 누가 담임으로 들어올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애가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와 칠판에 글씨를 썼다. 아마도 교무실 칠판에 적혀져 있던 각 반 담임 명단을 보고 온듯했다. '배철권'이었다. 그 이름을 본 순간 교실에서는 탄식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가난하고 촌스러운 게 죄는 아니지."

  "성격 자체가 음울하게 타고난 걸 어쩌겠어."

  "티 없이 밝기만 한 성격은 큰 장점이야."

 

  단비와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과거에 평범한 선생님들을 '암울 삼종세트'니 뭐니 하며 욕을 한 것에 대해 난데없이 반성을 하고 있었다. 반성의 요점은, 모든 교사가 자신이 맡은 과목에 어느 정도 학문적 열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고 학생들이 교사를 뒤에서 탓하는 것은 건방진 짓이었다.

  단비와 친구들을 이토록 반성하도록 만든 이는 다름 아닌 배철권이었다. 그의 코는 항상 술에 취한 듯 벌개있어서 술주정뱅이 같은 인상이었고, 그의 국어 수업은 그의 겉모습 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그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을 편애한다든가, 시험 등수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몽둥이질을 하고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야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다'라고 강요하는 종류의 교사는 아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타입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업 시간에 수업 진도도 제대로 못 나가면서 여학생들을 향해 한다는 소리가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든가, '바지씨를 잘 만나야 한다', '결혼을 했으면 아이로 남자를 묶어야 한다' 등이었다. 실제 대부분의 B여고 애들은 '여자에겐 결혼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며, 여자 팔자는 남자에 얹혀가는 것이고, 결혼을 했으면 아이를 낳아야 안심을 할 수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배철권이 하는 말들을 매우 재수 없게 생각했는데,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배철권처럼 무능하고 교양 없어 보이는 선생이 그런 소리나 수업시간에 해대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최소한 교과서 진도라도 제대로 알고 지껄이면서 저런 소리를 하면 말이나 안 하지'라는 심정이었다.

 

  이 학년이 시작된 날, 수업 시간이 모두 끝나고 단비는 민희와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배철권이 담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민희는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역시 씁쓸한 얼굴이기는 했다. 민희가 먼저 말을 했다.

 

  "이상하긴 해. 배 씨가 허접한 거 학부모들한테 들킬까봐 학교에서 절대로 담임을 안 시킨다고 들었거든. 왠 일인지 몰라."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닐까?"

  "글쎄.... 혹시 교장이 자기랑 수준이 비슷하니까 통한다고 갑자기 칭찬이라도 한 거 아닐까? 둘이 쌍벽을 이루는 거 같은데."

  "민희, 너 직접 교무회의라도 봤냐? 큭큭."

  "큭큭. 근데 배 씨가 애들 일에 전혀 개입할 수 없으니까 차라리 깐깐한 교사보다 낫지 않을까? 난 학교한테 바라는 거 없거든. 난 우리 학교가 좋아."

  "하긴 나도 그래."

  "배 씨한테도 유감 없어."

  "그건 아냐."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배철권은 전교에서 가장 짧은 조례와 종례를 하는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담임을 무시했지만 대신 애들 사이에서 말썽은 없이 지내자라는 분위기가 있어서 조용하게 이 학년의 날들이 지나갔다.

 

  사 월이 되자마자, 연례행사인 일, 이 학년 체육대회를 향해 서서히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선수로 뽑힌 애들은 배구 연습을 했고, 나머지 애들은 응원과 단체 무용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고사 기간에 잠시 조용했다가, 오월 중순이 되자 체육대회 준비에 온 학교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듯 보였다. 방과후부터 일몰 때까지 운동장에서는 음악소리와 배구 연습 소리, 응원연습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영경이 같은 각 반의 공부파 애들은 단체 무용연습이나 응원연습 같은 것들로부터 피신해서, 눈에 안 띄는 장소에서 혼자 귀를 막고 공부를 했다. 민희는 잔뜩 인상을 쓰고 먼지 나는 운동장 바닥에 앉아 응원 연습을 하다가 때 되면 집으로 갔다. 체육대회에 취미가 없는 단비는 방송반 핑계를 대고 방송반실로 도망쳐 와서 꼼작 않고 있다가 집에 갔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틀 후, 방과후였다. 그 날도 단비는 '그래, 이런 맛에 방송반 하는 거지'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교무실 복도를 지나 방송반실에 갔다.

 

  모든 것은 방송실의 벼룩이 뛰어 다니는 낡은 야전 침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학교의 크고 작은 방송을 도맡아 하는 방송실의 구조는 실제 방송장비가 있는 엔지니어 룸과 방송반실로 구분이 되어져 있었다.+ 장비가 있는 엔지니어 룸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지만, 방송반실은 공간도 넓은 편이어서 반원들이 회의도 하고 모여 놀기도 하는 곳이었다. 방 한가운데는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벽엔 캐비넷이들 있었다. 그리고 구석엔 매해 방송제 때 무대를 꾸미는 데 쓰이는 합판으로 된 칸막이 같은 것들이 서 있었었는데, 칸막이들이 묘하게 가려주는 바람에 칸막이 안쪽에 있는 야전 침대는 일부러 칸막이 안 쪽을 들여다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단비는 방송실 야전침대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누웠다. 칸막이들은 병풍처럼 단비에게 응달을 만들어 주었다. 창이 없는 구석이라 운동장 쪽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운동장에서 나오는 여러 소리들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다른 애들은 운동장에 있는데, 이렇게 누워 쉴 수 있다는 것이 깨소금 맛이었다. 그렇게 단비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단비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낯선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고, 단비는 어딘지는 모르나 추운 얼음벌판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단비는 잠에서 깨어났고 오한에 떨면서 옅은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뭐라 떠드는 남자 목소리가 칸막이 바깥에서 들려왔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단비는 잠결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배철권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아주 작은 부스럭 소리도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이 굳어 왔다. 단비는 고개만 살짝 움직여서 칸막이 아래를 통해서 배철권의 발과 두 명의 학생 발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낡은 야전 침대는 '삐그덕'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야?"

 

  배철권의 목소리였다. 단비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배철권이 어정쩡하게 일어서 있었고, 이학년 방송반원 두 명이 종이 뭉치를 앞에 두고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방송반원 아이들은 시험지를 향해 눈을 내리 깔고 있었고, 숨 막힐 듯 답답한 분위기였다.

 

  "오단비. 거기서 뭐하고 있었어?"

  "잠시 잠들어서....."

  "그래? 너도 여기 와서 좀 도와줘라. 얘들이 하는 거 보고 따라 하면 돼. 잠깐만."

 

  단비는 뛰어나갈 생각도 못 한 채, 얼결에 그 자리에 앉았고 비로서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 학년 일 반부터 오 반까지의 국어 중간고사 답안지였다. 그 반들은 정확하게 배철권이 맡고 있는 반들이었다. 육 반부터 구 반까지는 다른 선생님이 맡고 있었다. 그날 두 명의 방송반원과 배철권은 객관식 칠 번 문제에서 삼 번으로 쓴 학생들의 답을 이 번으로 고치고 있었다. 또 주관식 한자 쓰기 문제에서 거의 정답에 가깝게 썼으나 한 두 획을 잘 못 쓴 학생들의 주관식 답도 고쳐 주고 있었다. 단비 앞에 답안지 할당량이 놓여졌다. 단비는 당장 소란을 일으키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싫어요'라고 말하거나 뛰쳐나가야했었다. 그러나 단비는 숨 막히는 실내 분위기와 평소와 다르게 눈에 힘을 준 배철권의 기세에 눌려 답안지에 손을 대고 말았다. 아뿔사.... 배철권을 포함해서 네 명이 나눠서 하다보니 일은 이십 분 정도 지나자 끝이 났다. 배철권은 답안지를 재빨리 봉투에 넣고는 단비와 아이들에게 방송반실에서 나가라고 한 다음 본인도 교무실로 사라졌다. 방송반원 아이들은 복도에 나서자 재빨리 사라졌고, 단비는 복도에 혼자 서있었다. 방금 방송반실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 한 순간의 기분 나쁜 꿈만 같았다.

 

  단비는 쓰러질듯 휘청거리면서 복도를 빠져 나와 운동장 가장자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운동장엔 아직도 일 이 학년의 각 반 학생들이 저마다 자리 한 쪽을 차지한 채 체육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구 연습하느라 공 튀기는 소리와 응원 연습 소리, 음악 소리 같은 온갖 소리들이 한꺼번에 섞여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운동장에 나와 있던 민희와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지만 단비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단비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어리석고 비겁하다는 사실에 실망해서 몽둥이로 자신을 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마음 속이 편치 않아서 였을까. 단비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에 시달렸다.

 

  체육 대회가 이 삼 일 앞으로 다가왔다. 일 이 학년 학생 모두가 체육대회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이상한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서 흘러 다녔다. 이학년 앞 반에서 국어 시험 성적이 예상보다 잘 나온 애들이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시험이라는 것이 보고 나면 대개 자신들의 예상 점수 보다는 실제 점수가 한 두 문제 차이로 낮게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여서 몇 몇 아이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에 관심 있는 애들은 배철권이 가리킨 대로 하자면 정답은 삼 번이었지만 실제 시험에서는 정답은 이 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B 여고가 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는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단비는 배철권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이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와서 학교를 며칠 쉬고 싶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소문까지 떠돌자 단비는 불안한 마음에 부쩍 말수가 적어졌고 의기소침해졌다. 결국 민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집에 무슨 일 있냐?

 

  단비는 자신의 변화를 감지해낸 민희에게 눈물이 날만큼 고마움이 느껴졌다. 단비는 학교 뒤뜰, 우물 가에서 민희에게 방송반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혹시 누군가 들을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두리번거리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단비의 이야기를 다 듣자 민희는 대뜸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하하. 난 또 뭐라고. 한 두 문제 고친 게 무슨 대수야. "

  "야, 조용히 해."

  "시험 답안지 고쳤대요. 고쳤대요!"

 

  단비는 누군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손가락을 입게 갖다 댔지만 민희는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별 일도 아니구만."

  "교무실에서 나랑 방송반 애들 찾아내서 정학 준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럴 거 같지 않은데."

  "왜?"

  "니들이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니라 선생이 시킨 거잖아. 그리고 너나 방송반 애들이 이런 일로 처벌받으면 엄마들이 가만있겠냐?"

 

  단비가 듣기에 민희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난 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줄 알았네. 내 참."

 

  단비는 민희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마음이 놓이는 거 같았다. 그래도 단비는 조례와 종례시간에 배철권의 흐리멍텅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쾌하고 찜찜했다. 단비는 B여고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전학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단비가 생각하지 못 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천막 아래에 배철권의 얼굴이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다. 체육대회가 있던 다음 날 아침 조례에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국어 수업이 있었던 옆 반 주번 아이가 이 학년 이 반 교실을 지나가면서 배철권이 전근을 갔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아이들은 학기 중간에 담임이 갑자기 사라진 사건 앞에서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침착과 침묵은 올 것이 왔다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배철권이 국어 과목 성적과 관련된 추문 때문에 학교에서 사라진 것을 다들 짐작하는 분위기였다.

  학생들 중 누군가가 교무실에 문제제기를 했는지, 아니면 선생님들 사이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는지 과정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배철권이 방송반실에서 한 짓은 교무실에 발각이 된 것이 분명했다. 그다지 엄정하게 운영 되어온 학교는 아니었지만 B여고도 이 일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전체 교사들의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뒀다가는 시 담당부서의 외부 감찰을 불러들일까봐 걱정을 한 재단의 약삭빠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학교는 부랴부랴 교사를 바꾸는 수순을 밟았다. 교무실은 전력을 다해서 조용히 처리하기로 하고, 외부에 단 한 마디도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단비는 학교의 조처를 보고 안도의 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 그날의 '기억'에 대한 죄의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때 단비는 배철권이 그렇게 사라진 일이 불러올 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8 18. 에필로그 - 완결 2018 / 11 / 19 270 0 2995   
17 17. 보는 이 없이 능소화는 지고 2018 / 11 / 19 289 0 4065   
16 16. 남쪽 나라에서의 반전 2018 / 11 / 19 290 0 17375   
15 15. 소방 호스를 타고 뛰쳐나온 펭귄 2018 / 11 / 19 279 0 10794   
14 14. 안개 속에서. 2018 / 11 / 19 257 0 2285   
13 13. 의문의 교사 2018 / 11 / 19 274 0 1259   
12 12. 새로운 사건의 발단 2018 / 11 / 19 278 0 8205   
11 11. 상식의 이면 2018 / 11 / 19 273 0 9340   
10 10. 추위를 싫어한 펭귄 2018 / 11 / 19 268 0 5485   
9 9. 민희네 비디오 2018 / 11 / 19 310 0 5507   
8 8. 지덕쳇! 괴상한 학교 2018 / 11 / 19 291 0 14838   
7 7. 강남 아파트 2018 / 11 / 19 271 0 5352   
6 6. 떠난 다는 것은.... 2018 / 11 / 19 260 0 2291   
5 5. 이런 것도 형벌일까 2018 / 11 / 19 297 0 9491   
4 4. 천생연분 – 찌질남과 악녀 2018 / 11 / 19 269 0 15980   
3 3. '미술'이라는 금기어 2018 / 11 / 19 256 0 12912   
2 2. 능소화 넝쿨에 휘감긴 집 2018 / 11 / 19 278 0 6381   
1 1. 미싱 소리가 들리던 동네 2018 / 11 / 19 431 0 6743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대포여신 서현금
톰과제리2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